
트리 오브 라이프 – 은총과 자연의 두 길
테런스 멜릭이 던지는 첫 화두는 너무도 단순하면서도 뿌리 깊은 질문이다. “세상은 은총(Grace)과 자연(Nature), 두 길 중 어느 쪽으로 흐르는가?” 영화는 이를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늘어놓지 않고,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오브라이언 가(家) 가장의 단단한 손아귀와 제시카 채스테인의 포근한 포옹 안에 구체적으로 새긴다. 아버지는 “잡아라, 경쟁하라, 살아남아라”라고 외치고, 어머니는 “사랑하라, 용서하라, 내려놓아라”라고 속삭인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를 무력화시키려 싸우는 적이 아니라, 엮이고 어긋나며 결국 한 아이 안에서 끊임없이 흡수·방출되는 에너지다. 장남 잭(소년 시절의 헌터 맥크랙큰)은 아버지가 가르친 생존 논리에 설득되려다, 엄마가 흘린 은총의 씨앗이 마음 밭 어딘가에서 자라나는 것을 부끄럽게 느낀다. 그는 동생 RL에게 BB탄을 발사하고, 개구리를 폭죽에 묶으며, 골목길에서 처음으로 ‘죄책감’이란 돌덩이를 목에 걸어본다. 은총이란 결국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무게를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들여다보는 용기라는 사실을 영화는 잔혹할 만큼 솔직하게 보여준다. 거대한 우주 생성 시퀀스는 “자연”이 실은 냉혹한 경쟁의 장이자 동시에 무차별적 포용의 장임을 드러낸다. 별과 별 사이, 공룡의 발톱 끝, 깊은 해저 화산 분출 속에서도 자연은 태연하다. 그 장대함 앞에서 은총은 한낱 연약한 속삭임 같지만, 멜릭은 카메라를 통해 그 속삭임이 우주적 무관심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작은 횃불임을 입증한다. 은총은 저항이 아니라 공존을 택한다. 자연이 “살기 위해 먹어라”라고 말할 때, 은총은 “살리기 위해 나눠라”라고 응답한다. 그리고 멜릭은 둘 중 어느 것도 완전히 틀렸다거나 맞았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오늘 어떤 쪽으로 걸어갈 것인가?” 갈림길은 거창한 기념비 앞이 아니라, 식탁에서 동생에게 먼저 닭다리를 내줄지 말지 망설이는 아주 사소한 순간마다 불쑥 솟아난다.
트리 오브 라이프 – 시간 너머로 건네는 손
둘째 아들 RL의 죽음 이후, 성장한 잭(숀 펜)은 유리와 철근이 빼곡히 들어선 마천루 속에서 길을 잃은 순례자처럼 서성인다. 동료들과의 기계적인 악수, 엘리베이터의 삭막한 ‘삑’ 소리, 사무실 조도의 차가운 형광빛이 **“이곳이 진짜 현실인가?”**라는 감각적 의문을 쉴 새 없이 자극한다. 멜릭은 이 현대적 풍경을 일종의 사막으로 묘사한다. 물 대신 빛나는 금속과 콘크리트가 흐르는 모래가 되어, 은총의 물기를 모조리 증발시켜 버리는 공간. 그러나 그 사막 한복판에서 멜릭은 ‘시간’을 비워 내는 몽타주를 삽입한다. 빅뱅의 불꽃이 튀고, 별 먼지가 웅혼하게 소용돌이치며, 미시 세계의 세포가 분열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어느 순간 잭이 어릴 적 뛰놀던 훈훈한 텍사스 햇살과 슬며시 맞물린다. 과거·현재·우주적 원시가 뒤섞인 이 콜라주는 “시간”이라는 선형의 자물쇠를 우주적 시각으로 해제해 버린다. 그래서 잭은 기적처럼 **‘동생 RL의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손길’**을 오롯이 현재형으로 다시 듣고, 다시 느낀다. 영화 말미, 해안가 비전(vision) 시퀀스에서 아이·청년·노인이 한 프레임 안에 서는 것은 단순한 천국적 판타지가 아니다. 멜릭이 던지는 중요한 사유: “사랑은 시간 너머에서 서로를 호출한다.” 물리적 ‘죽음’이 은총의 흐름을 끊지 못한다는 선언이다. 잭이 어머니의 음성에 이끌려 동생의 어깨를 감싸 안는 그 순간, 멜릭은 관객에게 ‘상실’이 끝이 아니라 ‘관계’의 다른 국면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사랑했던 이들을 지나간 과거형으로만 추억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추억이 불쑥 현재를 뚫고 들어와 우리를 어루만지는 경험이 있지 않은가. 멜릭은 이를 거대한 우주 이미지와 가정의 소소한 기억까지 몽환적 파노라마로 겹쳐놓으며 시청각으로 체화시킨다. 그 체험은 “내가 시간 속을 흐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내 안에서 호흡하는 것”이라는 전복적 감각을 일깨운다. 관객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엘리베이터 ‘삑’ 소리를 들으면 한순간 빅뱅의 포화와 RL의 웃음이 동시에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질지도 모른다.
트리 오브 라이프 – 관객이 완성하는 이야기
〈트리 오브 라이프〉가 논쟁적인 이유는 서사적 ‘빈 칸’을 과감히 비워 두기 때문이다. 전통적 플롯 구조—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를 기대한 관객은 황당할 수밖에 없다. 개연성의 연결 고리는 생략되고, 배우들의 속삭임은 문장도 아닌 기도처럼 흩어진다. 멜릭은 이 ‘불친절’을 통해 관객을 단순 소비자가 아닌 공동 창작자로 초대한다. 예컨대 공룡이 쓰러진 동료에게 발을 얹었다가 살포시 떼고 떠나는 장면. 누군가는 이를 “약육강식 속에서도 싹트는 연민”으로, 다른 이는 “살아남기 위한 냉혹한 확인사살”로 읽는다. 해석이 달라질 때마다 영화는 다른 얼굴을 얻는다. 제작 단계에서 멜릭이 무려 백 시간이 넘는 필름을 찍고도 편집실에서 대부분 덜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관객이 스스로 빈틈을 메워 넣도록 여백을 남겼다. 이는 마치 추상화 앞에 선 관람객이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투사하며 그림을 ‘완성’하는 경험과 같다. 게다가 멜릭은 대형 스크린을 캔버스 삼아 **“영화는 시간 속에 그려지는 회화”**라는 명제를 실험한다. 카메라는 나뭇잎을 통과한 빛 입자를 천천히 쫓고, 물결의 반짝임을 중첩 노출로 겹쳐 보이며, 동작보다는 정서를 우선시한다. 서사의 공백을 감각의 충만으로 채우는 방식이다. 덕분에 관객은 두 시간 남짓의 상영 동안, “내가 무엇을 보았나?”보다 “내가 무엇을 느꼈나?”에 집중하게 된다. 이때 느껴진 감정의 잔향이야말로, 멜릭이 ‘완성본’ 대신 관객에게 건네는 종이와 붓이다. 그래서 〈트리 오브 라이프〉는 누군가에게 태어나서 본 영화 중 가장 큰 감동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상 모음’일 수밖에 없다. 멜릭은 평가 양극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당신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열어 봐 달라”**고 정중히 권유한다. 완성의 열쇠를 손에 쥔 것은 언제나 관객이다.
트리 오브 라이프 – 생각이 너무 많은 영화
영화가 끝이 나는 순간, 나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좋았다’**거나 ‘어려웠다’ 같은 즉각적인 평 대신, 몸 어딘가에 낯선 물결이 서서히 번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집까지 돌아오는 동안 버스 창 밖의 街燈이 새삼 눈부셨고, 횡단보도에 스민 봄비 냄새가 유난히 또렷했다. 멜릭이 심어둔 은총의 씨앗이 내 일상 곳곳에서 빛을 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서히 실감났다. 한동안 나는 “세상은 왜 이토록 불공평할까?”라는 억울함이 인생의 기본값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노력해도 보상받지 못하고, 정직해도 손해 보며, 사랑해도 상실이 남는 현실. 하지만 〈트리 오브 라이프〉가 보여준 것은 “그래서 세상은 잔혹하다”로 끝나는 진단이 아니었다. 영화는 거대한 우주 진화 다큐멘터리를 통해 ‘자연’의 냉혹함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잭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은총의 가능성—가 살아 있음을 증언했다. 나는 그 불씨가 결국 인간이 세계와 맺을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인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총은 무능한 착함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정교하게 구축한 불신의 갑옷을 벗어 던지는 용기다. RL의 죽음 앞에서 잭이 절규하듯 묻는다. “당신이 선하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나요?” 이 질문을 나 역시 수없이 되뇌었다. 멜릭은 이에 대해 논리적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잭의 시야를 우주 탄생의 심연까지 확장시킨다. 그 끝없는 스케일 속에서 잭은 자신의 고통을 상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소중하게 껴안는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야말로 사랑했던 관계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뒤, 나는 내 삶에서도 작은 은총의 행동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지하철에서 자리譲る, 쓴소리부터 튀어나올 때 한 박자 숨 고르기, 이미 지나간 잘못을 붙잡고 되씹기 대신 스스로에게 “괜찮다” 속삭이기. 놀랍게도 그 사소한 선택들이 하루를 바꿔 놓았다. 불평 대신 감사를 적어 본 날, 세상은 예고 없이 ‘조금’ 덜 잔혹해 보였다. 물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는 곳곳에 남아 있고, 멜릭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속삭인다. “너는 은총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생각보다 세상을 크게 흔들 수 있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영화관을 나온 뒤에도 줄곧 나를 시험한다. 오늘 나는 어떤 길로 걸어갈 것인가. 자연의 본능적 힘에 몸을 맡길 것인가, 아니면 은총의 흰빛을 따라 보폭을 조정해 볼 것인가. 아직도 답은 매일 달라진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변화는, 이제 그 갈림길이 내 안에도, 당신 곁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야말로, 멜릭이 내게 건네준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