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에드만 – 장난과 진심 사이의 느린 화해

영화 토니 에드만 포스터
영화 토니 에드만 포스터

토니 에드만 – 장난으로 남은 부성애

빈프리트가 틀니를 끼우고, 가발을 눌러쓰고, “토니 에드만”이라는 이름표까지 달아야만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은퇴 후 손에 쥔 건 여유로운 시간뿐이었다. 그 시간은 달력에 빈칸처럼 남았지만, 노부모의 요양원 방문·애완견 사망·피아노 수강생의 돌연 취소 같은 사건들이 서서히 구멍을 냈다. 그렇게 뻥 뚫린 구멍 사이로 흘러 들어온 존재감 결핍을, 그는 ‘농담’이라는 석고로 메웠다. 딸 이네스가 사는 부쿠레슈티로 날아온 순간부터 빈프리트는 결여를 확인했고, 동시에 그것을 감추려는 몸부림을 장난으로 변주했다. 택배기사에게 동생 코스튬으로 등장해 시간을 지연시키거나, 딸의 사무실 로비에서 선글라스를 번덕이며 몰래카메라처럼 기습 등장하는 모습은 ‘딸의 일상 틈새 어디라도 좋으니 내가 들어갈 자리를 달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이 장난은 상대방의 동의 없는 침입이기도 하다. 업무 메일 알림음보다 아버지의 농담이 더 빈번해지는 순간, 이네스에겐 애정이 아니라 폭격이다. 그럼에도 빈프리트가 코미디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오래전부터 “잘 지내냐?”라는 고전적인 한 문장을 딸에게 붙여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언어가 아닌 실체로 된 ‘농담’이라면, 상대가 바쁠 때도 읽힐 것이란 순진한 확신이 있었다. 공항에서 건네준 ‘행복 키트’ 같은 선물은 그래서 장난과 진심이 뒤섞인 부성애의 거친 번역본이다. 거기에는 철지난 유머가 묻어 있지만, 무너져 내리는 존재감에 접착제를 발라 보려는 절박함도 묻어 있다. 결국 빈프리트의 장난은 사랑의 말끝에 붙는 술책이다. 위로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언어—그게 바로 ‘아재개그’였던 셈이다.

토니 에드만 – 웃음 속에 숨은 슬픔

영화 초반부, 우리는 관객으로서 빈프리트의 농담에 쓴웃음을 흘린다. 하지만 러닝타임이 반을 넘기면 그 웃음은 점차 뱃속을 찌르는 송곳이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캐릭터보다 먼저 관객이 깨닫는다. 그의 농담이 이어질수록 실제로는 ‘울음’이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날카로운 일터에서 살아남느라 항상 등을 곧게 세운 이네스의 모습은 관객에게 일종의 ‘성공 서사’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 서사 속에는 혈압처럼 솟아오르는 스트레스와, 전화통 뒤편에서 쉰 목소리로 반복되는 “네, 처리했습니다”가 숨겨져 있다. 아버지는 그 쉰 목소리를 농담으로 끌어올려 딸에게 “행복하니?”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사실상 야만적이다. 직장 생활 속에서 행복을 논하는 건 누군가의 상처 위에 꽃병을 올려두라는 요구와 같다. 이네스의 표정이 얼어붙는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런데 영화가 잔인한 지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누드 생일파티라는 절정의 코미디 장면 한복판에서, 우리는 낄낄대며 춤추는 부녀의 뒷모습보다 빈프리트의 눈가 주름을 보게 된다. 그 주름은 무대가 끝나면 다시 혼자가 될 것을 예감한다. 웃음이 곧 울음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늘 코미디언이다. 빈프리트는 자신의 삶을 스탠드업 무대로 포장했지만, 커튼콜 뒤에서는 무대 세트처럼 허무하게 접힌다. 그의 분장과 딸의 벌거벗은 몸이 동시에 드러난 순간, 관객은 웃음의 실밥이 찢어질 때 흘러나오는 슬픔의 속살을 직면한다. 웃음은 커튼, 슬픔은 무대. 결국 빈프리트의 이야기에서 커튼은 절대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

토니 에드만 – 인생코치의 허구와 진실

“토니 에드만, 인생코치입니다.” 루마니아 비즈니스 파티에서 토니가 내민 명함은 듣기만 해도 그럴싸하다. 하지만 관객은 안다. 그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코칭은 ‘누가 봐도 엎어질 장난’을 던져 상황을 꼬이게 만드는 것뿐이라는 걸. 토니의 허풍은 이네스가 판매하는 PPT 슬라이드, 즉 국제 자본이 루마니아 노동자들의 일터를 재단하기 위해 내거는 ‘성과 지표’와 우스꽝스럽게도 닮아 있다.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이네스의 코칭은 거대 기업을 위한 것이지만, 토니의 코칭은 딸 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네스가 조언료를 받는 대신 일자리를 없애는 ‘효율화’를 팔 때, 토니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무런 대가 없이 ‘비효율’을 선물한다. 피아노 키 위를 헛짚는 손, 기업 수뇌부 앞에서 튀어나오는 뜬금 농담, 가발이 반쯤 비뚤어진 어설픔—이 모든 비효율은 이네스에게 스프레드시트가 가르쳐 주지 못한 변수를 보여 준다. “삶은 예정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생코치의 ‘허구’가 곧 ‘진실’이 되는 순간이다. 토니가 틀니를 빼서 딸의 입에 물려 주는 엔딩 장면에서, 코칭의 대상은 역전된다. 아버지가 자녀의 손을 끌어 주던 전통적 관계는 사라진다. 딸은 잠시 아버지의 가면을 경험하며 삶이 흘러가는 광대한 리듬을 맛본다. 그리고 아버지는 카메라를 꺼내 든다. 이 장면에서 코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두 사람 모두가 ‘코칭이 필요 없는 일상’ 한복판에서 잠시 멈춘다. 인생코치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조언은, 조언을 멈추라는 조언일지도 모른다.

토니 에드만 – 용기를 준 영화

처음 〈토니 에드만〉을 끝까지 본 뒤, 나는 엉뚱하게도 내가 가장 최근에 부모에게 보낸 카카오톡을 떠올렸다. “잘 지내지? 바빠서 조만간 전화할게.” 이 문장이 전부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빈프리트의 비뚤어진 가발이 어색한 미소로 느껴졌다면, 불이 켜지는 순간 그것은 내 얼굴에 얹힌 채 덜컥 내려앉았다.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코칭하지 않으려 애쓰기보다는, 코치인 척하며 어울리지 않는 조언을 던진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래도 건강 챙기셔야죠.” 그런 말이 부모님에게 얼마나 허공의 명함처럼 느껴졌을지, 영화가 끝난 뒤에서야 실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창문에 비친 나는 틀니도, 가발도 없었지만 내 표정은 충분히 분장돼 있었다. 나는 삶을 증명하려 애쓰면서도 삶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방법에는 서툴다. 그날 밤, 버스 벨을 누르고 내리기 직전, 빈프리트의 피아노가 귀에서 미세하게 울렸다. 아무 때나 불쑥 시작되고, 엉뚱하게 멈추는 그 불안정한 멜로디. 나는 그 불안정함이야말로 관계가 숨 쉬는 방식이라는 걸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나는 “바빠서 전화 못 해 미안해” 대신 “오늘 저녁, 시간 돼? 그냥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은 의외로 짧았다. “좋다.”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 두 글자 속에, 아버지의 가면과 내 가면이 동시에 벗겨지는 소리가 난 듯했다. 가끔은 가만히 앉아 줘야 한다. 빈프리트가 남긴 그 문장을 마음속에 접어 넣으며,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느닷없는 코미디가 되어 줄 용기를 고민한다. 웃을지 울지는 그다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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