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비지트 – 조부모의 미소 뒤 공포
시골 역에 내리자마자 두 남매를 맞이한 건, 영화 속에서조차 보기 드문 ‘순도 100%’의 다정한 미소였다. 고스란히 주름 사이에 묻어 있는 사랑의 골짜기, 폭신한 스웨터에서 풍기는 빵 냄새, 허리를 반쯤 굽혀 손주를 부르는 목소리…. 그 모든 것이 “가족”이라는 두 글자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듯 포근했다. 하지만 낯선 밤 9시 30분의 취침 규칙과 “지하실엔 곰팡이가 많단다”라는 근거 없는 경고가 툭툭 튀어나오는 순간, 그 미소는 종잇장처럼 얇아졌다. M. 나이트 샤말란은 조부모라는 근본적으로 안전해 보여야 할 존재를 ‘공포 기입란’에 적어 넣는 기이한 전치(轉置)를 감행한다. 할머니의 무릎 위에서 막 구운 쿠키를 받아 먹던 카메라는 금세 같은 인물의 알몸‧망상‧광기를 포착하며 스스로의 신뢰도를 무너뜨린다. 관객인 나는 스크린 속 남매와 동시에 배신을 경험한다. 익숙해야 안심된다는 신념이 허탈하게도 전복되는 지점, 그 뒤편에서 할머니는 쥐를 사냥하듯 집 안을 기어 다니고, 할아버지는 스스로를 가장(假裝)의 가장(家長)으로 고정시키려다 배설과 파괴 사이를 헤맨다. 그때 깨닫는다. ‘노쇠함’이란 단순히 육체의 감쇠가 아니라, 기억·도덕·분별이라는 정신적 울타리가 기괴하게 뒤틀리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걸. 샤말란은 이를 잔혹하게 시각화하지만, 동시에 “이 현상이 우리 모두의 내일이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부드럽게 문지른다. 어느 순간 나는 영화가 던진 질문—“사랑과 공포는 결국 같은 문턱인지도 모른다”—에 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떠올렸다. 우리 할머니도 새벽이면 다락에서 누군가와 대화하듯 중얼거렸는데, 혹시 그 속삭임 뒤엔 우리가 보지 못한 절망이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그 납작한 가능성이 목을 눌러 왔다.
더 비지트 – 페이크 다큐의 숨멎 긴장감
베카의 캠코더는 애초에 ‘가족 화해용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켜졌다. 파스텔톤 오프닝 자막, 마이크 테스트하며 킥킥대는 남매의 장난, 배경에 깔리는 잔잔한 어쿠스틱 음악…. 그런데 파일 넘버가 늘어갈수록 영상 거칠기는 올라가고, 호흡 소리는 커지며, 손떨림이 신경질적 파동을 그린다. 이 미세한 물리적 변화가 관객의 심장 박동을 은밀히 동기화한다. 샤말란은 ‘페이크 다큐’가 가진 두 가지 장점을 집요하게 끌어 쓴다. 첫째, 화면 밖의 영역을 마음껏 괴물화할 수 있다는 점. 카메라는 늘 촬영자보다 앞이나 옆을 본다. 그래서 화면 밖, 곧 관객 등 뒤에 무언가 존재할 것 같은 불안이 자연스레 증폭된다. 둘째, ‘녹화 중’이라는 표식 하나가 현실 감각을 붙들어 준다는 점. 남매가 겪는 모든 악몽은 “삭제 후 편집된 악의 덩어리”가 아니라 “실시간 데이터”라는 착시를 입는다. 그 결과 우리는 할머니가 알몸으로 벽지를 긁는 장면에서 광학적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한다. 거친 숨소리가 바로 좌석 옆에서 튀어 나오는 듯 느껴지니까. 이 방식은 저예산이라 지적될 만한 협소한 공간·인물 구성의 한계를 오히려 강점으로 돌린다. ‘못 본 게 더 무섭다’라는 호러의 황금 공식을 현란한 CGI 대신 핸드헬드 흔들림으로 재현한 셈. 나는 관람 내내 손목에 맥박을 대고 있었는데, 프레임이 거칠어질 때마다 혈관도 두툼해졌다. 영화를 보다가 장면을 ‘멈춤’해서 브루 캡처해 보면, 어떤 컷은 아예 영화 스틸이 아닌 실제 사건 현장 사진처럼 보인다. 그곳엔 조명도, 구도가, 음악도 없다. 다만 두려움이라는 원초적 필터만이 켜져 있다. 그 불순물이 없는 공포가야말로 이 작품이 관객을 오싹하게 붙드는 핵심 장력이다.
더 비지트 – 형제 자매의 찢어진 성장통
공포 한복판에서 베카와 타일러의 성장 서사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궤도를 바꾼다. 시작점에서 베카는 ‘카메라 뒤에 숨는 아이’였다. 아빠의 부재를 직면하기 싫어 다큐라는 방패를 들고, 상처를 24fps로 희석한다. 타일러는 힙합 라임으로 불안과 분노를 농담 처리하며, 강박적 손소독으로 마음의 얼룩을 지운다. 그런데 이 남매가 가짜 조부모라는 괴물을 만나자 숨었던 감정은 고열처럼 끓어오른다. 잦은 토사물, 배설, 굴욕의 똥칠—영화 속 위생 파괴는 그간 둘이 억지로 유지해 온 ‘깨끗한 척’의 껍데기를 벗겨 버린다. 타일러가 클라이맥스에서 얼굴에 묻은 오물을 닦아 내지 못한 채 괴한을 제압하는 장면은 이 성장통의 절정을 상징한다. 더럽혀졌기에 비로소 싸울 수 있는 용기가 분출된 셈이다. 한편 베카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직접 흉기를 드는 순간, ‘기록자’에서 ‘행위자’로 이행한다. 이때 그녀의 눈빛은 오랫동안 지켜온 프레임을 초월해 직시의 영역에 다다른다. 나 역시 동생과 함께 컸기에, 두 사람이 등 맞대고 퀸스 갬빗처럼 수비‧공격을 주고받는 장면에서 묘한 먹먹함을 느꼈다. 어린 시절 우리도 그랬다. 부모가 이혼하던 날, 동생은 아무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울었고, 나는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괜찮다’고 거짓말했다. 영화 속 남매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적 약속을 하는 순간, 내 과거의 후회가 피멍처럼 스며들었다. 성장통은 대개 시간이 지나야 아렸음을 깨닫는다. 베카와 타일러는 단 하룻밤에 그 통증을 통째로 삼켰고, 관객은 그 알갱이를 목 넘김으로 체험한다.
더 비지트 – 성급함에 거는 브레이크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극장 천장에 비친 EXIT 사인이 붉게 깜빡였다. 그 불빛 아래서 나는 이상하게도 안도감 대신 서글픔을 느꼈다. 영화가 보여 준 건 ‘공포에 질려 소리 지르는 아이들’이 아니라, ‘이미 불완전했던 가족을 붙들고 버티려다 공포까지 감당한 아이들’이었다. 샤말란은 괴담을 통해 현실을 암시한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노쇠한다. 때로는 사랑했던 얼굴이 낯설어지고, 기억이 거꾸로 달리며, 가장 안전해야 할 집이 미로로 돌변한다. 그때 필요한 건 대단한 영웅심이 아니라, 베카가 캠코더를 내려놓으며 보여 준 작은 결의일지도 모른다. “지켜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태도.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나는 서랍 깊숙이 묻어 둔 외할머니의 오래된 수첩을 꺼냈다. 낡은 연필로 적힌 레시피 틈마다 삐뚤삐뚤한 메모가 남아 있었다. ‘건강해져라’, ‘밤에는 물 많이 마시지 말 것’, ‘아침 햇빛은 약’…. 그 문장들이 영화 속 ‘지하실 경고’와 겹쳐 보이며 마음이 쿡쿡 쑤셨다. 혹시 그 경고는 공포가 아니라 보호였을까?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전에 이미 판단해 버리곤 한다. <더 비지트>는 그 성급함에 브레이크를 건다. 공포와 혐오는 사실 한 끗 차이라는 것, 그리고 그 틈에 머물 줄 아는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는 법’을 배운 베카처럼, 나도 오늘 밤 내 안의 공포와 대화해 보기로 했다. “괜찮아,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마워.” 그 한마디가 귀신보다 더 무서운 현실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덧칠해 줄 거라 믿으며, 방 안 불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