뺑반 – 질주가 남긴 빈틈과 속도착시의 그림자

뺑반 포스터
뺑반 포스터

뺑반, 도로 위 집단 광기의 스릴

뺑소니 전담반이라는 설정을 들었을 때, 나는 처음엔 “자, 또 한 편의 카체이싱 쇼케이스겠군”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스크린 속 도로가 불길처럼 달아오르자 내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뺑반》의 도로는 단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고스란히 노출된 원형 경기장에 가깝다. 밤새 번쩍이는 제철의 슈퍼카가 아스팔트 위를 훑고 지나가면, 바퀴 자국은 마치 추상화의 검은 붓질처럼 뒤얽혀 새로운 전투선을 그린다. 이에 질세라 순찰차는 사이렌을 배기음처럼 토해내며 폭주자와 동기화되고, 좁은 골목에서마저 엔진의 포효가 벽을 메아리치며 관객의 심장을 압박한다. 영화는 이 집단적 광기 위에 “정의”라는 초능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대신 도로 위 모든 이들의 감각을 과열시켜 “속도가 곧 생존”이라는 무정한 룰을 들이민다. 그 결과 제철과 민재, 시연이 벌이는 추격은 축구 경기의 공수 전환보다 빠르게 화면을 가른다. 트레일러와 일반 승용차, 심지어 불법 개조 차량까지 난입하며 ‘도로 참여형 관객’을 무심코 만들어버리니—나 역시 극장에서 팝콘을 움켜쥔 손에 땀이 흥건했다. 그렇다고 《분노의 질주》처럼 화끈한 피니시만 고집하지도 않는다. 중간중간 드러나는 급정거·풀브레이크라는 공백은, 관객에게 “지금 내 차 앞을 막아서는 건 어떤 인간일까?”라는 공포 섞인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엔진음의 높낮이로 감정 곡선을 설계한 사운드 디자인도 빼놓을 수 없다. 스로틀을 꽉 밟는 순간 귀를 압도하는 중저음은 복부까지 울리고, 휴게소 같은 정적 구간에서는 잠깐의 귀울림이 남아 살결에 소름을 돋게 한다. 이런 장면마다 느껴지는 감각적 드래프트 덕분에,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귀에는 배기 냄새가, 손바닥에는 스티어링 휠의 열기가 남아 있었다.

뺑반, 캐릭터는 빛났지만 서사는 미끄러졌다

류준열이 연기한 서민재의 눈빛에는 늘 두 개의 속도가 공존한다. 회전 속도 6,000rpm까지 치솟은 추리 두뇌와, 정체 구간처럼 느릿하게 주변을 스캔하는 감성 속도가 그것이다. 이 두 박자가 번갈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야기를 끌고 가면 얼마나 흥미진진할까 기대했지만, 영화는 어느 지점에서 급하게 클러치를 놓쳐버린다. 중반 이후 민재의 비범한 관찰력은 “추격할 타이밍 알려주는 내비” 정도로 축소되고, 조정석의 정재철은 초반 동물적인 위협을 유지하다가도 갑자기 “범죄 재벌 101 교과서”처럼 평면화된다. 가장 아쉬운 건 공효진의 은시연이다. 화려한 프로필과 원칙주의라는 ‘시동’을 걸어 두고도, 그녀를 끝까지 폭주하게 만드는 서사적 연료가 부족하다. 초반 “내가 현장에 서야 해”라는 절박함이 후반부에는 “이쯤이면 분량 채웠지?” 같은 기계적 움직임으로 바뀌어버린 느낌. 스토리는 기승—쾅쾅—결 구조에 의존하다 보니 개연성보다는 ‘다음 액션 세트피스’를 위해 급정거와 급가속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인물 동기는 안전벨트를 풀어놓은 듯 이리저리 덜거덕인다. 그럼에도 캐릭터들은 틈틈이 빛을 낸다. 정재철이 분노를 삭이며 떨리는 눈꺼풀로 핸들에 손을 얹는 순간, 또는 민재가 사고 현장 타이어 자국만 보고 “러버 스트립의 너비가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는 순간—이때만큼은 영화가 돌아가야 할 올바른 기어를 찾은 듯했다. 결국 《뺑반》은 배우들의 활화산 같은 에너지를 온전히 받아줄 화산 분화구를 설계하지 못한 채, 용암을 여기저기 흘려보내 버렸다는 인상을 남긴다.

뺑반, 여성 서사의 가능성과 한계

임신한 뺑소니계장 우계장, 검은 슈트에 헤드셋을 낀 시연, 그리고 사건 파일을 장악한 내사과 윤과장—나는 이 여성 삼각 편대가 영화 후반 ‘도로의 여신’처럼 대폭발할 줄 알았다. 초반부까진 틀림없이 기세가 있었다. 우계장은 대테러 상황실 같은 카운트다운 톤으로 “기동폭풍 상황 발생!”을 외쳐 팀을 진두지휘했고, 시연은 검사 남친의 프로토콜을 탈피해 “현장!”을 갈망했다. 하지만 서사가 속력을 올릴수록 여성 캐릭터의 존재감은 이상하게 속도 제한을 당한다. 중반 이후엔 회의실 배경 속 보조 캐릭터로 물러나거나, 느닷없이 신파의 기폭제로만 소환된다. 특히 윤과장은 구조적으로 흥미로운 ‘내부 스파이’ 위치인데도, 그 이면을 조각상처럼 굳혀 두고 말았다. 이로써 《뺑반》이 세울 수 있었던 ‘여성 주도 수사 영화’라는 깃발은 바람 없이 축 늘어진다. 다만 가능성의 씨앗은 분명히 심어졌다. 우계장이 레커차 기사들에게 무전으로 “우리도 도로 위에서 가족입니다!”라고 호소할 때, 교통안전 캠페인을 넘어선 ‘육아·생계·집회’의 연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차기작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때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여성 서사를 풀가속해 주길 바란다. 시연이 손끝으로 조작한 드론 카메라가 고층 빌딩 사이를 누비고, 우계장이 9개월 차 배를 받쳐 들고도 현장을 지휘하는—그런 장면을 본다면 나는 기꺼이 팝콘 세 통을 들고 재관람할 준비가 되어 있다.

뺑반, 내 머릿속 스피드미터

상영관을 나와 찬바람을 맞는 순간, 내 머릿속 스피드미터는 아직 붉은 영역에 걸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평소 50km/h로 달리던 내 차가 괜스레 5km 정도 더 빠른 속도로 미끄러졌다. 영화 속 질주 본능이 잠시 나를 조종한 셈이다. 그러나 신호등 앞 빨간불이 켜졌을 때, 나는 브레이크를 밟으며 생각했다. “도망치는 사람도, 쫓는 사람도, 결국 멈춰 서야 한다.” 《뺑반》은 완벽한 영화는 아니지만, 나에게 두 가지 질문을 남겼다. 첫째, 속도를 사랑하는 우리는 과연 언제 책임이라는 안전벨트를 매는가. 둘째, 정의를 외치며 도로를 봉쇄할 때, 그 봉쇄에 갇히는 또 다른 ‘시민’의 삶은 누가 돌볼 것인가. 이 두 질문은 출근길 도로, 퇴근길 버스, 골목 자전거길 위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 재생된다. 그렇게 보면 영화관을 떠난 뒤에도 《뺑반》은 여전히 나를 따라붙는 꼬리표이자 백미러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차 안에서 매일 작은 추격전을 벌인다. 지각이라는 압박을 피해 달리고, 뒤통수에 밀려오는 후회와 피곤을 떨쳐내기 위해 가속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오늘의 교훈을 떠올릴 것이다. 너무 빨리 달리면, 도로는 곧 무대가 아니라 전장이 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남는 것은 찢긴 범퍼와 식어버린 엔진,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달렸지?”라는 허탈한 질문뿐이다. 이제 시동을 끄고, 창문을 내리고, 밤공기 속에 엔진 냄새 대신 겨울 별빛을 들이마실 시간이다. 뺑소니가 아닌 삶의 핸들을 잡는다는 건, 오늘 내가 만든 속도를 내일의 나도 책임진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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