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 양탄자와 욕망의 별빛항해

알라딘 포스터
알라딘 포스터

알라딘 – 양탄자 위의 첫사랑

처음 자스민이 창문을 넘어 시장에 발을 내딛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 장면에서 카메라는 도로 위를 쓰다듬듯 미끄러지지만, 내 눈길은 그녀가 떨구고 간 빵조각이 아니라 알라딘의 관자놀이에서 번쩍인 ‘나도 모르게 건네는 호기심’에 멈췄다. 그는 생존을 위해 매일 거리의 털실을 뽑아야 하는 떠돌이지만, 그날만큼은 낯선 여인에게 시간을 선물한다. 이 기묘한 선의는 곧 추격전의 스릴로 바꾸어 달린다. 지붕을 박차고 나무기둥을 잡고, 양탄자도 없이 창공으로 몸을 던지던 두 사람은 나와 스크린 사이에 투명한 복층을 만들어 놓았다. 현실에서는 월세 고지서가 내 발목을 잡고 있지만, 영화 속 알라딘은 체납을 무시한 채 공주를 품에 안는다. 그리고 벽돌 사이로 스며든 햇살은 둘 사이 비밀 통로가 되어, “집은 없어도 하늘은 공짜”라는 메시지를 슬쩍 밀어 넣는다. 첫눈에 반했으나 신분이 다르다는 절망, 도망치며 발끝이 툭툭 부딪힐 때마다 느껴지는 살아있음, “괜찮아?” 대신 “도망쳐!”로 취향을 확인하는 야생의 로맨스. 여기서 사랑은 궁전의 콘크리트 대신 비둘기 날갯짓 위에 기둥을 세운다. 내가 스무 살에 처음 가봤던 클럽 옥상도 저랬다. 반짝이는 불빛, 스피커에서 터진 브라스 섹션, 그리고 이름조차 몰랐던 누군가의 웃음. 불가능해 보이던 고공데이트가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다. 두 사람 모두 아직 ‘질문’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쯤 가고 있는가.” 답을 찾기 전에 사랑이 먼저 찾아오면 스스로를 속이기도 쉽다. 결국 양탄자 첫 비행은 그저 화려한 특수효과가 아니다. 꿈이 준비되지 않은 채 눈앞에 착륙했을 때 인간이 잠깐 얻어 타는 ‘심장 과속’의 메타포다. 그 벅참을 겪고 나면 땅위로 내려온 후에도 발에 모래바람이 묻는다. 그래서 나는 영화관을 나올 때마다 지하철 손잡이 대신 공중에 손을 뻗는 버릇이 생겼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회사와 집 사이 어딘가에도 한 장 남은 양탄자가 상자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라딘 – 지니의 세 가지 룰, 욕망의 세 가지 함정

램프에서 파란 연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던 그 순간, 스크린이 새로고침 되는 듯한 충격이 있었다. 지니는 “소원 세 개”라는 심플한 규칙을 내세우지만, 사실 그것은 관객에게 던져지는 세 개의 부채표 같다. 첫째, 사람은 원하는 것이 생기면 반드시 단서조항을 놓친다. 알라딘이 ‘왕자가 되게 해 달라’고 말할 때 그는 사회적 지위만 떠올렸지, 국정 운영이나 경제 개혁 같은 책임은 상상하지 않는다. 둘째, 조건이 충족되면 욕망은 슬그머니 변심한다. 왕자 외피를 얻고 난 뒤 알라딘은 또다시 진실을 숨기려 하고, 지니를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미룬다. 셋째, 마지막 함정은 ‘길들여진 욕망’이다. 자파가 강력한 마법사, 나아가 우주 최강 존재가 되기를 바란 순간, 그의 뇌는 이미 ‘스스로 욕망을 관리할 능력’을 계약서 밖으로 던졌다. 결국 램프가 준 것은 힘이 아니라 ‘힘이 나를 규정하는 현실’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오랫동안 꺼냈다 접어두었던 인생의 체크리스트를 떠올렸다. 더 나은 직장, 조금 더 넓은 집, 인정받는 직함. 얻은 뒤에도 왠지 허전했던 이유는 ‘소원’만 외웠지 ‘대가’는 예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니는 파티클로 흩어지며 중얼거린다. “인간은 많이 가지게 될수록 더 많은 것을 바란다.” 그 대사가 공허하지 않은 건, 지니 역시 자유를 바라면서도 알라딘의 우정 앞에서 망설였기 때문이다. 욕망의 무게는 소유량이 아니라 ‘관계’가 당기는 중력으로 결정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차를 사고, 승진을 하고, 숫자를 모으는 사이, 그 물건과 자리를 공유할 사람이 떠나버린다면 황금마차도 모래바람 속 길 잃은 낙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영화가 들려주는 진짜 룰은 이것이다. “세 가지 소원보다 단 하나의 질문을 먼저 하라. ‘나는 지금 누구와 웃고 싶은가?’” 이 질문 앞에서 욕망은 함정이 아니라 나침반이 된다.

알라딘 – ‘거리의 다이아몬드’가 왕자가 되기까지

알라딘은 스스로를 “다이아몬드 원석”이라 부르는 동굴의 목소리를 통과한 유일한 인물이다. 흙먼지 묻은 장사꾼 사이에서 반짝이는 건 그의 주머니가 아니라 눈빛이다. 그러나 원석은 본능적으로 광휘를 두려워한다. 노점상 사이를 구르며 산전수전 다 겪은 소년에게 왕궁은 정면승부가 아닌 스텔스 게임의 배경이 된다. 도둑질을 일으켜 세운 몸이지만, 그는 타인의 시선을 훔칠 때만큼은 유난히 서툴다. 가짜 깃발을 들고 행진할 때 말발굽 소리에 발박자를 맞추지 못해 헛디뎠듯, ‘왕자의 걸음걸이’는 단순히 비단 구두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알라딘이 틈만 나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허리를 구부리는 습관을 집요하게 비춘다. 신분은 옷으로 바꿔도 몸짓은 조건반사로 남는다. 나는 이 반복을 보며 대입 수험생 시절을 떠올렸다. 교대역 지하상가에서 산 저렴한 면접용 정장을 입고도,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서는 여전히 교복 주머니를 더듬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왕자 되기’의 조건은 관객이 가늠하는 기준과 충돌한다. 돈, 의상, 지위가 준비됐는데도 왜 자스민 앞에서는 심장이 자꾸 고르지 않게 뛰는가. 그 이유를 영화는 자파의 콤플렉스로 대비한다. 두 남자는 모두 낮은 곳에서 출발했지만, 한쪽은 ‘공감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다른 쪽은 ‘권력의 승강기’를 단숨에 눌러 탄다. 상승 속도가 빠를수록 귀는 멀고 시야는 흔들린다. 그래서 알라딘의 성장 서사는 빠른 승진담이 아니라 ‘느리게 자기 안의 소리를 듣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진실을 고백하지 못해 양탄자 난간에서 미끄러질 때, 지니에게 손 내밀지 못해 마음속 램프가 식어 갈 때, 그는 조금씩 떨어지며 깎인다. 다이아몬드는 광채를 얻으려면 불순물을 깨야 한다. 알라딘이 결국 “내가 왕자가 아닌 걸 인정한다”는 고백을 내뱉을 때, 그동안 갈라진 금이 한꺼번에 털려나가며 면도날 같은 면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빛은 자스민의 눈, 지니의 미소, 아그라바의 새벽빛을 차례로 비춘다. 왕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벗겨지는 과정’ 속에서 탄생한다는 사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짜릿한 역설이다.

알라딘 – 소원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 객석 곳곳에서 발끝으로 리듬을 타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중 한 사람의 어깨너머로 스마트폰 화면이 반짝이는 것을 봤다. 익숙한 부동산 앱이었다. “집은 좁아도 괜찮을까?” “이 월급으로 여행을 갈 수 있을까?” 스크롤을 내리던 그의 고민은 영화가 던진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램프를 보여준다. 고급 인테리어, 화려한 직함, 강력한 팔로워 수. 그러나 알라딘은 묻는다. “너는 그 램프를 문질러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니?” 나는 대답 대신 지니가 자유를 얻고 사람 손을 처음 맞잡던 순간을 떠올렸다. 마법이 사라지니 오히려 두 손에 체온이 깃들었다. 삶도 비슷하다. 번쩍이는 연기와 현란한 빛이 걷히면, 남는 건 어깨를 나란히 할 사람과 허기를 달래 줄 따뜻한 밥 한 끼일지 모른다. 그래서 상영관을 나오는 길, 나는 휴대폰을 잠시 끄고 지하철 역까지 걸었다. 바람이 티셔츠 속을 비집고 들어올 때, 불현듯 양탄자를 타고 날던 자스민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망칠 수도, 날아오를 수도, 애써 숨길 필요도 없다. 내 소원이 이미 내 안에 살고 있다면.” 오늘 밤 침대맡에 램프 대신 공책을 두고, 하고 싶은 일을 세 가지 적어 볼 생각이다. 첫 번째는 지하철 맨 앞칸 창문에 얼굴을 대고 도시의 새벽을 보는 것, 두 번째는 오래 미뤘던 친구에게 전화 걸어 안부를 묻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알라딘 주제곡을 이어폰으로 틀고 동네 골목을 가볍게 춤추며 걸어보는 것. 소박하지만 확실한 기적은 이런 식으로 시작되지 않을까. 영화를 본 당신도 오늘만큼은 손바닥을 살며시 비벼 보라. 파란 연기는 나오지 않겠지만, 그 대신 당신 안의 작은 지니가 귓가에 속삭일 것이다. “이제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말해 줘.”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일상도 거리의 다이아몬드처럼 번쩍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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