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 디스토피아가 던진 질문
서울 하늘을 뒤덮던 빌딩 숲이 한순간에 무너지자, 유일하게 서 있는 ‘황궁아파트’는 곧 인간 군상(群像)의 축소판이 된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왜 우리는 콘크리트 박스에 목숨을 걸었을까?”라는 물음을 관객의 가슴팍에 쑤셔 넣는다. 십수 억짜리 대출을 감내하면서까지 사야만 했던 신축 단지, 입주민 카페에서 벌어지는 층간소음 혈투, 출입 카드 없으면 돌아서야 하는 경비초소…. 현실 속 ‘아파트 공화국’의 단면을 이미 체험해본 우리는, 재난 이후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아파트라는 공간이 생존과 우월성의 기준이 되는 모습에 씁쓸한既視感을 느낀다. 입주민들은 스스로를 선택받은 생존자라 칭하며 외부인을 “바퀴”로 낙인찍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밤 그들을 계단 아래로 내쫓는다. 기괴한 것은 이 폭력이 특정 악당 한 명의 광기가 아니라, “우리 집값은 지켜야지”라는 익숙한 내면 논리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된다는 점이다. 영화는 광장 한복판에 거대한 손거울을 세워두고, 관객들에게 “너라면 달랐을까?”라고 묻는다. 경비실 열쇠를 쥔 다섯 명의 주민대표가 폐쇄회로 TV로 복도를 지켜보며 밤샘 근무를 서는 장면은, 우리 일상 속 실시간 단속 문화—무인 택배함을 열어보는 CCTV, 아이들의 소음 decibel을 측정하는 어플—와 겹쳐지며 묘한 자기반영(自己反映)을 만들어낸다. 결국 이 작품은 “아파트가 유토피아인가, 콘크리트 감옥인가”라는 진부한 명제를 피해 가지 않는다. 대신, 파괴된 도시라는 극단적 배경 위에 우리의 익숙한 탐욕과 공포를 놓아두고, 그 감정이 얼마나 빠르게 집단의 법과 윤리를 뒤틀 수 있는지 생생하게 증명한다. 관객은 2시간 동안 아파트라는 사적 공간이 어떻게 순식간에 ‘국가’로 팽창하고, 담벼락 하나로 수백 명의 인생을 분리하는 국경선이 되는지 목격한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한 이유는, 영화가 던진 질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헬리콥터가 떠나간 자리, 스크린 밖 우리의 베란다 창문에도 여전히 묵직한 콘크리트가 서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병헌이 빚은 가짜 구원자 서사
이병헌이 연기한 ‘영탁’은 등장 순간부터 관객의 도덕 레이더를 교묘히 어지럽힌다. 불길이 치솟는 1층을 향해 질주하고, 얼어붙은 수도관을 맨손으로 두드려 물을 뽑아내는 장면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 리더감이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 서린 음영은 ‘히어로 메시야’보다 ‘염려 많은 호객꾼’에 가깝다. 영탁은 주민들을 설득할 때마다 성경 구절과 흰 돌, 지팡이 같은 상징물을 기가 막히게 활용한다. 마치 히틀러가 광장 연설에서 민족주의 레토릭을 내던지듯, 그는 외부인 배척 논리를 ‘가족 보호’라는 달콤한 슬로건으로 포장한다. 이병헌은 이 캐릭터의 양면성을 극도로 얇은 티슈 한 장처럼 붙여 놓는다. 회의실에서 “우리에게는 질서가 필요합니다”라고 미소 짓는 얼굴과, 복도의 어둠 속에서 피범벅이 된 채 “문을 잠궈!”라고 포효하는 얼굴이, 분명 같은 인물인데도 도무지 하나로 겹쳐지지 않는다. 관객은 그 간극(間隙)에 갇혀 영탁을 미워하려다 어느새 동정하고, 경멸하다가도 불현듯 고개를 끄덕인다. “저 정도 책임을 짊어지면, 나라도 저럴까?”라는 자문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다. 특히 진짜 이름 ‘모세범’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영탁이 토사물처럼 울음을 쏟아내는 클로즈업은 이병헌표 비극의 정점을 찍는다. 그는 단 한 컷으로 ‘사기꾼·살인자·어쩌다 리더’라는 세 겹의 가면이 동시에 찢겨 나갈 때 인간이 맞닥뜨릴 허무를 증명한다. 덕분에 영화는 단순한 파시즘 풍자극을 넘어, “권좌에 오른 선량한 개인은 어떻게 괴물이 되는가”라는 고전적 질문을 새 피로 적셔 낸다. 관객이 극장을 나와 라이브 방송으로 쏟아지는 정치적 선동, 부동산 시장의 혐오 여론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도 결국 이병헌이 만들어낸 ‘가짜 구원자의 실감’ 덕분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박서준·박보영 현실 부부의 딜레마
박서준이 연기한 ‘민성’과 박보영이 연기한 ‘명화’는 표면만 보면 이상적인 신혼부부다. 따끈한 전세 계약서와 설레는 인테리어 견적서를 품에 안고, “올해는 꼭 베란다에 허브 화분 놓자”는 소소한 꿈도 공유하던 두 사람. 그런데 대지진이 한 번 흔들자, 그달의 상환 스케줄과 임용고시 합격 통보는 먼지처럼 사라지고, 둘의 결혼 생활은 ‘숙소 동행’으로 급강하한다. 관객이 이 부부에게 끌리는 이유는, 두 사람이 영탁 같은 거창한 권력욕도, 금해회장 같은 노골적 탐욕도 없기 때문이다. 민성은 공무원 매뉴얼을 떠올리며 “시스템부터 다시 세워야죠”라고 말하다가도, 한밤중 복도에서 외부인이 떨고 있으면 덜덜거리며 문을 닫아 버린다. 명화는 간호사로서의 윤리를 붙들기 위해 “같이 살아요”라고 외치지만, 그 한마디가 남편의 안전마저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턱 끝이 흔들린다. 박서준은 ‘착한 사람이 비겁해지는 순간’을 아주 조용한 호흡으로 그려낸다. 눈동자가 흔들리기 전에 미세하게 굳어지는 턱선,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굴러 떨어지기 직전의 짧은 침묵…. 그때마다 관객은 스스로의 투명한 이기심을 들킨 듯 부끄러워진다. 박보영은 특유의 맑은 눈빛으로 ‘이상주의의 끝까지 버티는 사람’의 고집을 보여준다. 외부인을 숨겨주다 들통 난 뒤, 계단 밑에서 웅크린 채 “그래도 살려야 했어요”라고 속삭이는데, 그 순간 그녀의 눈가에 커다란 슬픔이 물결친다. 그 눈빛은 명화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이미 폐허가 되었음을 알고 있지만, 끝까지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다. 이 부부의 갈등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편으로 남기 위해, 어디까지 양심을 접을 수 있는가”라는 냉혹한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스크린 바깥에서 각자의 파트너, 가족, 동료를 떠올리게 만든다. 재난이 오지 않아도, 우리는 일상 속 ‘작은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협상과 타협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크린을 넘어선 여운
상영이 끝났을 때 극장 안은 묘하게 고요했다. 박수도, 탄성도, 엔딩곡에 맞춰 폰을 뒤적이는 소리도 잠시 멈췄다. 나는 그 적막 속에서, 영화가 남긴 찝찝한 여운이 서로의 가슴팍을 더듬는 듯한 공기를 느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관객들 사이에 흐르는 무언의 긴장감이 있었다. 누구는 “야, 내가 저 아파트 주민이면 더 독해졌을 거야”라고 중얼거렸고, 또 다른 누구는 “민폐 캐릭터라고 욕하지만 명화 같은 사람 한 명은 꼭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내 안에서도 두 목소리가 싸우고 있었다. 한쪽은 “살아남으려면 결국 담장을 쌓아야 해”라고 속삭였고, 다른 한쪽은 “담장 밖의 비명을 외면한 순간, 담장 안도 지옥이 돼”라고 말하며 맞섰다. 영화는 그 싸움을 말리지 않는다. 오히려 끝없이 붙들어 놓는다. 마치 ‘판단하라’고 하지 않고 ‘멈춰서 생각하라’고, ‘누가 옳은가’보다 ‘무엇이 더 인간다운가’를 묻는 듯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창밖으로 뻗은 회색 레일 위에 줄지어 선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었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어쩌면 이미 거대한 디스토피아의 서막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익숙함이라는 이름 아래 무뎌진 풍경들이 이제는 낯설게 다가왔다.그렇다면 남은 일은 단 하나다. 담을 높이는 대신, 담 너머를 계속 바라보는 연습. 혹독한 겨울밤 외부인의 두드림에 귀 기울이는 연습. 타인의 불안을 나의 일처럼 상상하는 연습. 그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 황궁아파트의 비극은 스크린 안에만 머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진짜 유토피아가 도착한다면, 그것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서로의 손바닥 온도 위에 지어질 거라고, 나는 믿어 보기로 했다. 아주 작고 느린, 그러나 분명한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