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킹 – 권력과 욕망의 달콤한 붕괴서사

더 킹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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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킹 – 권력의 달콤‧잔혹 성장곡선

한강을 따라 난 밤길, 네온사인처럼 번쩍이던 주인공 박태수의 욕망은 처음엔 단순했다. “나도 한 번 쯤 세상을 주무르는 편에 서 보고 싶다”—그 한 줄짜리 꿈이 공무원 시험책 귀퉁이에 메모처럼 적혔을 때는 소박해 보였지만, 영화는 그 메모가 어떻게 권력 카르텔의 DNA와 뒤엉켜 괴물로 부풀어 가는지를 집요하게 보여 준다. 태수는 “양아치 출신의 금의환향”이라는 욕망의 장밋빛 환상을 들고 검찰 조직에 입성한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건 흰 장갑 낀 정의의 손길이 아니라, 법전 위에 놓인 납작한 하회탈이다. 라인에 올라서면 만사가 풀릴 것 같던 순간, 한강식이 내미는 금빛 사다리는 사실 온갖 거래와 타협으로 덕지덕지 용접된 롤러코스터였다. 높이 치솟을수록 아래로 곤두박질칠 속도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태수는 재벌, 정치인, 조폭은 물론 국민정서까지 요리조리 꿰어 찌개 끓이듯 숟가락을 놀린다. 카메라는 그의 성공을 ‘샴페인 거품’처럼 톡톡 튀는 몽타주로 포장하지만, 그 거품은 반짝이는 순간에 이미 터질 준비를 마치고 있다. 노력과 능력으로 이룬 성장이라 착각한 모든 장면에 사실은 조종자의 실이 엮여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 달콤했던 풍미는 번개처럼 혀를 할퀸다. 결국 태수는 권력의 화려한 포도송이가 아니라, 썩어들어가는 포도송이를 붙들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캐릭터의 성장곡선은 그래서 ‘상승→정체→하락’ 같은 평면 그래프가 아니다. 그보다 ‘단맛에 취한 미생물이 자가발효 끝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곡선’에 가깝다. 달콤함은 부패와 맞닿아 있고, 권력은 스스로를 먹어치우며 부풀어 오른다. 감독은 이런 비극을 잔혹동화의 리듬으로 읊조린다. 태수가 최고점에 서 있을 때 관객은 이미 그 발밑 콘크리트가 스멀스멀 무너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스스로 궁극의 위치라 믿은 한 남자의 순간 최대치 미소가, 바로 다음 컷에서 칼바람처럼 스러지는 광경——그것이 더 킹이 들려주는 ‘달콤하지만 죽음보다 쓰라린 성장곡선’이다.

더 킹 – 한재림식 블랙코미디 연출 미학

한재림 감독은 권력범죄라는 무거운 주제를 **“블랙코미디의 프레즐”**처럼 비틀어 버린다. 짠맛·단맛·쓴맛이 꼬여 있는 그 프레즐을 씹는 동안, 우리는 속으론 “참 웃기다”를 외치지만 목구멍 끝엔 알싸한 독주가 밀려온다. 영화 초반, 태수가 한강식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올드 팝 ‘Let It Whip’이 댄스플로어처럼 울리고, 1990년대 양귀비꽃 무늬 넥타이를 맨 검사들이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는 하이퍼랩스 쇼트가 쏟아진다. 관객은 그 과장된 미장센에 킥킥 웃으면서도 “저 낯 뜨거운 기세, 현실에 정말 존재했을까?”라는 냉소를 동시에 경험한다. 바로 이 **“웃음과 분노의 동시 점화”**가 한재림식 미학의 핵심이다. 그는 마틴 스코세지의 <좋은 친구들>을 연상시키는 돌발 내레이션, ‘멈춤-줌인-음향펀치’ 3단 편집으로 속도감을 확 끌어올리다가도, 대뜸 MP3 벨소리 같은 싸구려 효과음을 깔아 웃음을 터뜨린다. 권력형 검사들의 흥청망청 룸살롱 굿판 시퀀스에서는 핸드헬드 카메라를 인공 흔들림으로 더 뒤틀어, 관객의 눈을 일부러 어지럽힌다. “취해 있는 건 태수와 검찰만이 아니다. 이 세상을 구경하는 너도 취해 있구나”라는 돌직구다. 조명 또한 눈부시도록 밝거나 밤하늘보다 어둡게 극단을 오가며, 권력의 극과 극을 시청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그 결과 스크린 속 비리는 ‘분노의 다큐’가 아닌 ‘그로테스크한 서커스’로 재포장된다. 그런데 막상 웃고 나면, 입안엔 언제부터인가 쇳맛이 돌고 있다. 풍자와 현실이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재림은 카메라를 들어 검찰청 복도·국회 청문회장·도심 한복판 등 현실 공간을 애써 과장하지 않은 톤으로 찍는다. 그 덕에 관객은 영화적 과잉미와 뉴스 속 진짜 풍경을 구분하지 못하고 헤맨다. 블랙코미디의 레시피란 곧 “과장을 통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역설”임을, 더 킹은 한 장면 한 장면 증명한다.

더 킹 – 조인성‧정우성 투톱의 연기 시너지는?

영화가 개봉하기 전, 관객은 ‘조인성 vs 정우성’이라는 미남 투톱 매치업에 먼저 환호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면, 그들의 케미는 단순한 비주얼 합(合)이 아니다. 조인성은 태수의 궤적을 ‘소년성→허세→허무’ 3단 변화로 쌓아 올린다. 초반 양아치 시절, 그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대사를 빠르게 쏟아내 소년 같은 가벼움을 증폭시킨다. 검찰 엘리트 코스를 타자마자, 목소리 톤이 낮게 깔리고 걸음걸이가 길어진다. 마치 “세상 다 이겼다”는 듯한 허세의 물리적 구현이다. 그런데 몰락이 시작되면, 눈동자부터 자주 흔들리고 입술이 마른다. 그 흔들림이 큰 대사보다 동정심을 자극한다. 반대로 정우성의 한강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매끄러운 강철”**을 표방한다. 고양이 같은 눈매를 살짝 치켜뜨고, 기름칠한 듯 부드러운 발성을 유지한다. 덕분에 태수를 유혹하는 대목에서 관객도 모르게 프레젠테이션 세일즈를 당하는 기분에 빠진다. 더 놀라운 건, 강철에 균열이 생기는 후반부에도 정우성은 톤을 거의 바꾸지 않는다는 점이다. 손톱만 한 균열이 번져 쇳빛 거울이 산산조각 날 때, 우리는 “저 부드러운 품위가 사실은 공포였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두 사람이 마주 서는 장면마다, 카메라는 종종 로우앵글로 고개를 치켜든다. 덕분에 둘의 큰 키와 넓은 어깨가 스크린을 압도하며, 관객이 ‘위로 올려다보는’ 시점에 고정된다. 여기서 형성되는 시각적 권위감이 스토리와 맞물려 묘한 아이러니를 만든다. 태수가 무력감을 느낄 때일수록 조인성은 더 크게, 더 어깨가 펴져 보이고, 한강식이 불안에 떠는 순간에도 정우성은 여전히 기품을 잃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두 배우가 창조한 케미는 ‘동경과 질투, 애증과 공포’를 한꺼번에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중력을 획득한다. 만약 태수가 권력이라는 마약에 취한 사내라면, 한강식은 그 마약의 정제라인을 통째로 움켜쥔 브로커다. 그리고 관객은 그 둘 사이 전압에 감전되어, 러닝타임 내내 저릿저릿한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투톱 캐스팅이 종종 ‘얼굴 구경용’으로 격하되는 현실에서, 더 킹의 조·정 콤비는 표면적 미남 경쟁을 뛰어넘어 ‘권력 서사의 양극’ 역할을 정교하게 분담하며 서사의 하중을 똑 부러지게 견뎌 냈다.

더 킹 – 선택의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엔딩 크레딧이 흐르고 불이 켜졌을 때, 나는 극장 의자에 잠시 그대로 굳어 있었다. 관람 내내 웃고 박수 치고 “야, 저건 너무하잖아!”라고 속삭였지만, 막상 스크린이 꺼지니 가슴 한복판이 서늘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과연 얼마나 영화와 다를까?” 하는 질문이 뇌리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태수가 라인을 타며 권력을 누리던 장면에서 나는 어릴 때 봤던 하회탈 가면극을 떠올렸다. 가면은 씁쓸히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이 ‘누구를 조롱하는지’ 알 수 없어서 오싹했던 기억. 한재림 감독은 바로 그 오싹함을, 파티처럼 화려한 영상 뒤편에 숨겨 놓았다. 그래서 극장을 나오며 보랏빛 저녁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네온 간판이 전부 하회탈로 보였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영화는 내게 **“선택의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고 속삭였다. 태수가 결국 칼날을 거꾸로 돌려 권력 사슬을 끊어내려 했듯, 우리도 일상 속에서 작은 정의의 선택을 반복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 약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뉴스 댓글 창에서 무책임한 조롱 대신 사실을 확인하며, 투표소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도장을 찍는 그 작은 행위들이 모여 언젠가 거대한 라인을 바꿀지 모른다. 영화는 완벽한 해답 대신 **‘열린 결말’**을 택한다. 나는 그 열린 공간이 관객 각자의 ‘다짐’으로 채워지길 바란다. 권력의 달콤함이 여전히 유혹적으로 반짝이더라도, 그 달콤함을 경계하며 씁쓸한 뒷맛을 기억해 내는 사람—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킹’을 고르는 유권자이자, 결국 세상을 조금씩 바꿔 낼 우리일 테니까. 나는 오늘도 하회탈처럼 웃는 도시를 걸으며, 속으로 다짐한다. “왕관을 쓰고 싶은 자, 그 무게를 견뎌라. 그리고 그 무게가 타인의 어깨를 눌러서 세워진 것인지, 늘 되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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