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권력의 역습과 시민의 저항

서울의 봄 포스터
서울의 봄 포스터

서울의 봄 – 역사의 시계가 움직이다

1979년 10월 26일의 총성이 울린 뒤부터 영화 「서울의 봄」 은 거대한 시계를 돌리듯 분 단위로 압축된 역사의 톱니바퀴를 보여 준다. 벙커 한가운데로 쏟아져 들어오는 장교들의 발소리, 땀에 번진 무전기 잡음, “대통령 서거”라는 단 한 줄 보고가 전해질 때의 공기 진동까지—카메라는 이 모든 촉각적 긴장을 따라가며 관객의 심장을 초단위로 세밀하게 조여 온다. 특히 12·12 쿠데타 당일 타임라인을 자막 대신 전화벨, 구두굽, 심박을 비트처럼 배치해 ‘리듬’으로 들려주는 연출은 압권인데, 현실 시간과 극중 시간이 완전히 겹쳐지는 순간 우리는 박정희 시해와 전두환 반란 사이에 놓인 불과 47일의 공백을 뼈저리게 체감한다. 그 공백은 곧 대한민국 헌정 질서가 무장력에 의해 잠식되는 ‘틈’이기도 했다. 영화는 이 텅 빈 틈을 거대한 시계 태엽 안으로 들여다보듯 클로즈업하며, “누가 언제 어느 톱니 하나만 살짝 밀었어도 역사는 달라졌을까”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돌려준다. 덕분에 관객은 단순히 스크린을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역사적 긴장의 현장에 동원된 증인 兼 시계공이 되어 초침 하나하나를 숨죽여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몰입은 화려한 전투 장면 없이도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쿠데타의 시계’가 또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불안한 예감을 지금—2025년의 우리—에게까지 전염시킨다. 영화 속 시계태엽은 멈췄지만, 현실의 민주주의 태엽은 끊임없이 점검하고 감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거대한 공명음처럼 남는다.

서울의 봄 – 불붙는 권력욕과 신념의 충돌

전두광(황정민)이 휘둘러대는 휴대용 재떨이와 이태신(정우성)이 굳게 쥔 장군모 사이에는 단순한 계급 다툼을 넘어선 ‘세계관의 충돌’이 숨 쉬고 있다. 영화는 두 인물을 고전 비극의 영웅과 폭군처럼 직조한다. 전두광은 카멜레온처럼 목소리를 바꾸며 상관 앞에선 충성, 부하 앞에선 공포를 연기한다. 그가 “세상은 그대로야”라고 읊조리며 어둑한 복도를 걸어 나올 때, 화면은 붉은 조명을 깔아 욕망이 불꽃처럼 춤추는 내부를 시각화한다. 반면 이태신은 늘 짙은 그림자 속에 서 있다. 국기 경례하는 병사들에게 돌아서서 “대한민국 육군은 국민을 향해 총을 들지 않는다”고 낮게 웅얼대는 장면에서, 관객은 그의 신념이 군인의 직업윤리를 넘어 인간 존엄에 닿아 있음을 확인한다. 두 사람은 한 시대를 관통하는 양극의 윤리 좌표다. 전두광이 권력을 ‘탈취’하려는 순간순간마다, 이태신은 그것을 ‘반환’하려 애쓴다. 정우성과 황정민이 주고받는 대사는 칼맞춤 같은 호흡 덕에 대본을 넘어 쉐익스피어식 설전으로 승화된다. “이 나라 요건은 다 같은 편”이라며 조롱 섞인 손짓을 건네는 전두광의 미소가, 사실은 거대한 공포 정치의 서막임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그래서 관객은 이태신의 한 걸음이 얼마나 절박한지, 그의 한숨이 왜 그렇게 무거운지 본능적으로 헤아리게 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무장 반란을 막기 위해선 또 다른 무장이 필요할까, 아니면 흔들리지 않는 신념 한 줄이면 충분할까?” 그 질문은 9시간의 혈투를 넘어 오늘 우리 각자의 자리로 불쑥 튀어나온다.

서울의 봄 – 하나회, 비밀 사조직의 그림자

영화 속 ‘하나회’는 유령처럼 군과 정계를 떠돌며, 이름 석 자 대신 암호와 시그널로 서로를 호출한다. 감독은 실존 조직의 세부를 교과서적 설명 대신 영화적 장치로 번안한다. 즉석에서 짜인 술자리, 종이에 그려 넣은 ‘인사 배치도’, 벙커 안 음영진 벽면에 엑스자 가득한 메모—이 모든 것이 하나회라는 거대한 거미줄을 시각화한다. 흥미로운 건, 이런 ‘보이지 않는 조직’의 공포가 2025년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영화는 관객이 느끼는 불안을 구체화하기 위해 두 가지 트릭을 쓴다. 첫째, 통신망 도청. 이태신의 참모가 “사령관님, 저쪽이 다 듣고 있습니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스크린을 바라보던 우리 역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둘째, 무력 아닌 ‘인사권’의 폭력. 전두광이 무심히 적어 내려간 보직 이동 명단은 총칼보다 날카로운 현실 폭탄이 되어 수많은 장교의 운명을 뒤흔든다. 영화는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기생 구조를 밝히며, 민주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가 ‘밀실에서 찍힌 도장’일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특히 하나회가 내세운 동지·신뢰·충성의 레토릭이 사실은 개인적 탐욕을 은폐하는 교묘한 수사였다는 점을 낱낱이 드러내며, 조직보다 신념, 서열보다 양심이 먼저라는 고전적 진리를 다시금 환기한다. 관객이 극장을 나서는 순간, 자신이 속한 조직 속 작은 ‘하나회성’—비밀스런 이해관계, 편가르기, 은밀한 보은—을 떠올린다면, 영화의 충격은 현재진행형이 된다.

서울의 봄 – 역사속의 우리

상영이 끝난 뒤 불 꺼진 극장에 잠시 홀로 남아 있었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라는 대사가 스피커 잔향처럼 머리를 울렸다. 그리고 문득, 내가 중학교 시절 사회 교과서 맨 뒤에서 만났던 12·12 사건의 딱딱한 활자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한 줄 각주에 불과했지만, 스크린 속 9시간은 그 활자에 숨결과 체온을 부여했다. 가장 쓰라렸던 지점은 따로 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휴대전화에 찍힌 현재 시각이 21:12였다는 우연이다. 1979년 12월 12일 21시 12분, 쿠데타 병력이 최초로 한강을 건넜다는 기록적 순간 위에 46년 후 나의 일상이 겹쳐진 셈이다. ‘역사는 과거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는 교과서 문장을 이렇게 물리적으로 실감하긴 처음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1980년 봄 대학 신입생이었던 어머니는 “그날 새벽, 기숙사 창문 밖으로 전투차량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어”라고 짧게 말했다. 전화 너머의 긴 침묵이 이어졌고, 나는 차창 밖로 스쳐 가는 서울의 네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영화 속 이태신이 바라본 세종로의 어둠과 오늘의 화려한 네온 사이에는 분명 큰 간극이 있다. 그런데도 묘하게 불안했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엔 ‘누군가의 침묵’을 당연시하는 공기가 남아 있지 않은가. 그 공기를 허물어야 “민주주의는 매일 새로 고쳐 써야 하는 살아 있는 언어”라는 사실이 비로소 증명될 것이다. 결국 「서울의 봄」 은 화려한 사운드·미장센 이상의 것을 건넨다. 그것은 ‘잊음’에 맞서는 기억의 의무이며, 폭력과 회유가 아닌 질문과 대화를 선택할 용기다. 영화를 본 지금, 나는 내 안의 작은 하나회를 점검하기로 했다. 그리고 21시 12분이라는 우연을 새기는 대신, 내일 21시엔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의 봄은 스스로 지켜야 빛난다”는 말을 건네기로 했다. 오늘, 당신에게도 같은 제안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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