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문맹과 죄의 그림자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한 ‘한나 슈미츠’는 처음엔 그저 무뚝뚝하고 과묵한 여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15살 소년 마이클의 시점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걸친 외투 너머로 오래 서린 그림자를 감지하게 되죠. 그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문맹’**입니다. 그러나 고레에다식 따뜻함이나 스필버그식 휴머니즘과 달리, 스티븐 달드리는 문맹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눈먼 무지는 한나를 나치 친위대의 치명적인 부속품으로 만들었고, 그녀가 순순히 맡았던 업무—가스실로 갈 사람을 선별하고 보내는 일—마저 “그저 해야 할 직무였을 뿐”이라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달드리는 한나가 글자를 모르는 장면을 굳이 보여주지 않고도, 식당에서 메뉴 주문을 마이클에게 맡기거나 지도를 내미는 순간마다 땀 한 방울을 돋게 하며 무지의 냉기를 시청자에게 고스란히 체감시킵니다. 문맹은 죄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타인의 생사를 가르는 행위를 정당화한다면, 무지는 더 이상 개인적 결함이 아닌 집단적 폭력의 근거가 됩니다. 영화의 법정 신은 이를 정면으로 들이밀지요. “필체가 같으면 당신은 종신형입니다. 다르면 풀려납니다.” 한나에게는 종이 위의 글자보다 스스로의 수치심이 훨씬 더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기꺼이 “내가 썼다”고 말하며 영원한 침묵을 선택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무지의 고백”은 오히려 마이클을 향한 유일한 양심 고백이었습니다. 법정에서 마이클의 눈빛은 숱한 질문을 던지지만, 대답은 늘 같은 장소를 맴돌죠. 한나의 죄는 나치라는 시스템에서 비롯됐는가, 아니면 스스로 지식과 양심을 저당잡힌 개인의 선택이었는가? 달드리는 이 질문에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관객에게 한나의 피 묻은 칼을 던져 놓고, “이제 당신이 읽어 보라”고 속삭입니다. 무지는 죄일까요? 적어도 한나는 그 대가를 전 생애로 치렀고, 남겨진 우리는 그 답을 끝내 회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리더 – 책으로 엮인 두 운명
전염병에서 막 회복한 한 소년이 전차 검표원 누나에게 들러붙어 책을 소리내어 읽어 주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도, 원작 소설 속에서도 가장 서정적인 순간으로 꼽힙니다. 신체적 접촉보다 더 강렬한 교감이 ‘낭독’이라는 행위로 완성되기 때문이죠. 파란 티셔츠에 흙바람이 묻은 열다섯 살 마이클이 호메로스의 구절을 읊는 모습은, 사춘기의 땀냄새와 고전 문학의 냄새가 기묘하게 어우러져 청각과 후각을 동시에 자극합니다. 한나는 책장을 넘길 수 없는 대신, 소년에 대한 욕망과 책에 대한 갈망을 한데 묶어 한 호흡에 마십니다. 그래서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한국어 부제는 결코 과장이 아니죠. 읽어 주고, 들려주고, 기억해 주는 행위가 그들에게는 치열한 사랑의 언어였으니까요. 그러나 낭독의 달콤함은 2막에서 독이 됩니다. 법정에서 증언자로 출석한 유대인 생존자는 “수용소로 끌려가는 열차 안에서도 한나가 성경을 읽어 주었다”고 회상합니다. 한나에게 낭독은 애정 표현이자 일상의 의식이었지만, 피해자에게 그것은 죽음으로 이끄는 자장가였던 셈입니다. 같은 행위가 전혀 다른 기억으로 각인된다는 점에서, 영화는 ‘이야기를 읽어 준다’는 행위조차 권력이 될 수 있음을 폭로합니다. 마이클이 보내는 카세트테이프는 18년간 한나의 독방을 메웠고, 마침내 그녀가 ‘the’라는 세 글자를 읽어내는 순간에 이릅니다. 듣는 자에서 읽는 자로, 피해자가 아닌 책임 지는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통과의례였지요. 하지만 독(讀)과 독(毒)은 한 끗 차이. 한나는 자기가 이제는 읽을 수 있게 된 사실로 인해, 오히려 과거의 죄를 더 선명하게 직시하게 됩니다. 두 사람을 엮어 준 낭독은 결국 두 사람 모두를 돌이킬 수 없는 회한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이, 이 영화가 던지는 가장 잔혹한 알레고리입니다.
더 리더 – 진실과 구원의 독서
교도소에서 ‘에밀리아 갈로티’를 따라 쓰던 한나가, 마지막 면회실에서 마이클에게 내민 문장은 생각보다 평범했습니다. “꼬마야, 잘 있었니?” 문맹의 굴레를 벗고 처음으로 직접 쓴, 짧은 문장. 그러나 그 아래 감춰진 함의는 거대합니다. 한나는 글자를 읽고 쓰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삶과 죄를 서사화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그것이 구원과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되었지요. 글을 깨우친다는 것은 타인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는 뜻인데, 한나에게 그 타인은 곧 수천 명의 죽은 유대인과 마이클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영화 초반 성당에서 호산나를 듣고 눈물을 흘리던 한나는 이미 ‘구원을 청할 문장’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쓰기까지 30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반면, 마이클은 진실을 읽어 낼 능력을 오래전부터 갖추고 있었지만, 그녀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정의 사이에서 영혼이 찢겨 나갑니다. 그는 법대 교수에게서 “정의는 질문이고, 답은 늘 불완전하다”는 말을 듣지만, 한나 앞에서만큼은 자신이 던진 질문에 어떤 답도 내리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어떤 구원도 선택하지 않은 채 한나의 출소 준비를 도왔고,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았습니다. 영화는 이를 죄책감의 방관이라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달드리 감독이 내세운 결론은 단순합니다. “우리는 온전히 용서할 수도, 완전히 단죄할 수도 없다. 다만 읽어 주고, 들려주고, 기록할 뿐.” 한나가 남긴 짧은 문장은 마이클에게 하나의 과제를 던집니다. ‘당신이 읽은 진실을, 당신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교도소 담장 너머 하늘은 느닷없이 맑았고, 마이클의 손에는 재로 변한 테이프만 남았습니다. 그 순간 관객은 깨닫습니다. 이 영화 전체가 거대한 독서 행위였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2시간 동안 한나의 삶이라는 책을 함께 읽었고, 이제 각자 마음속에 밑줄을 긋고 책장을 덮어야 합니다. 그 밑줄이 회한인지, 연민인지, 분노인지—그 판단이야말로 우리 각자의 구원 의지일 테니까요.
더 리더 – 일상 속 작은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
스크린이 암전된 뒤에도 잔상이 오래 남아 떠나지 않았다. “문맹이 더 부끄러웠다”는 대사 하나가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며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돌이켜 보니, 나는 일상 속 작은 무지를 얼마나 자주 외면했던가. 환경 문제를 기사 제목만 읽고 넘기거나, 타인의 고통을 건조한 통계 숫자로만 흘려보내곤 했다. 한나의 무지는 처참한 역사적 비극이지만, ‘알 수 있었지만 알지 않기로 한’ 내 태만 역시 작은 공범의 씨앗은 아니었을까.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스마트폰 음악 앱 대신 팟캐스트 오디오북을 틀었다. 카세트테이프를 녹음하던 마이클처럼, 나도 활자를 소리로 되새김질하며 걷고 싶었다. 귓가를 울리는 낭독은 내 무지를 덜어내기보다 오히려 새 무게를 얹었다. 이해한다는 게, 용서한다는 게, 심판한다는 게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니. 문득 귀에 꽂힌 이어폰이 언어의 거울처럼 느껴졌다. 낭독자가 발음하는 한 음절, 한 끗의 쉼표마다 “정말 알고 싶어?” 하고 속삭이는 듯했기 때문이다.그 밤, 오래 묵은 비밀처럼 방치해 둔 독일문학 번역본 『에밀리아 갈로티』를 책장 맨 앞칸에 옮겨 놓았다. 이 책을 읽으면 한나가 조금은 달리 보일까? 아니면 내가 더 불편해질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그래도 읽어야 한다. 읽어 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스스로 읽어 내는 사람으로 남고 싶으니까. 그 선택이야말로 나의 작은 ‘호산나’이자, “Please save us”라 속삭이는 내 양심의 목소리일 테니까. 그리고 언젠가, 이해의 고통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나는 무지하지 않으려 애썼다”는 한 문장을 내 삶의 각주로 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