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앨리스, 잊힘과 사랑의 잔향

스틸앨리스 포스터
스틸앨리스 포스터

스틸 앨리스 – 기억 사이에 남은 나

알츠하이머가 파고드는 순간은 종종 핀 조명이 꺼지는 장면과 비슷했다. 관객석에서 한 줄기 스포트라이트가 스르르 사라지고, 방금 전까지 무대 중앙을 환히 밝혔던 광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그 공백을, 앨리스는 자신의 하루 곳곳에서 맞닥뜨린다. 어제 막 손에 넣은 단어가 도망가 버리고, 매일 밟던 조깅 코스가 낯선 미로로 변하는 찰나―그때 그녀의 뇌는 “소멸”이라는 짧은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곧이어 기묘한 역광이 켜진다. 남편 존이 건네는 따뜻한 머그컵, 큰딸 애나가 보낸 초음파 사진, 막내 리디아의 다급한 숨소리가 어두운 무대 뒤편을 채우며 “나는 아직 여기 있다”라고 반복해서 속삭여 주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앨리스가 셀프카메라 앞에서 미래의 자신에게 약 복용 방법을 일러 줄 때, 그 목소리는 단순한 ‘안락사 지침서’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마지막 배역 연습, 즉 잊힘과 맞서는 ‘존재 증명’의 리허설이다. 언어학자로서 품어 온 단어 사랑의 총체를 집약하여, 한 문장 한 문장에 치열한 생존 의지를 주입한다. 내가 영화를 보며 마음이 절절하게 당긴 지점도 바로 여기였다. 기억은 하나씩 사라져도, 사랑은 오히려 해상도를 높이며 남아 있다. 지나가는 풍경 속 그늘 하나, 식탁 위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자국 하나에까지 “아직도 나는 앨리스다”라는 흔적이 겹겹이 스며드는 모습에서, 나는 인간성이란 결국 기억의 완결성이 아니라 ‘남고자 몸부림치는 의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이룬 정보의 총합이 곧 나라고 착각하지만, 스틸 앨리스는 말한다. 기억의 전등이 꺼져도 내가 내 뺨을 스스로 꼬집고,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다시 배우려 애쓴다면 그 찰나에도 ‘나’는 완강히 남아 있다고. 그리하여 영화가 반복 재생하는 바닷가 홈비디오―소년 시절의 바다냄새가 언어학자의 뇌를 스친 순간―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 마지막 포스트잇처럼 어둠 속에서 파란 잔광으로 반짝인다.

스틸 앨리스 – 조발성 알츠하이머의 잔혹함

조발성 알츠하이머라는 단어는 병명이기 이전에 시간에 대한 조롱처럼 다가온다. ‘조기(早期)’라는 한 글자는 정상이라 믿었던 흐름을 얄궂게 거꾸로 돌려 놓고, 마흔과 쉰 사이를 “아직 젊다” 대신 “이미 늦었다”로 덧칠한다. 영화는 그 잔혹한 역행을 관객의 체내 시계에 직접 새긴다. 오늘 아침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깜빡했던 출근층 버튼, 카페 앞에서 놓친 우산 위치 같은 소소한 건망증이 갑자기 뒷목을 당긴다. ‘혹시 나도?’라는 물음표가 목젖에 붙어 출렁이는 동안, 스크린 속 앨리스는 CT 스캔에 붙은 자신의 뇌 영상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회색 음영으로 얼룩진 뇌지도가 말이 없는 대신 의사의 시선을 타고 ‘가소성’이 아닌 ‘퇴화’를 선언한다. 특히 영화는 지능-학력-사회적 성공이라는 견고한 갑옷마저 알츠하이머 앞에서는 종잇장처럼 찢어진다는 사실을 시종일관 강조한다. “높은 지적 수준이 오히려 증상 포착을 더 늦춘다”는 의사의 설명은, 노력과 성취로 무장한 현대인에게 잔혹한 역설을 들이몬다. 결국 조발성 알츠하이머가 진짜 빼앗아 가는 것은 기억 자체만이 아니다. ‘나는 성과로 규정된 사람’이라는 자부심, ‘머리가 무기’라는 자기 서사가 통째로 붕괴되며 정체성의 하중이 허공에 매달린다. 그렇기에 앨리스가 슬라이드 발표 도중 공백을 맞닥뜨렸을 때의 공포는, 언어 한 단어를 잃은 것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나’를 단숨에 잃어버린 간극이다. 그 순간 그녀를 받치는 건 애써 외운 정의나 고급 어휘가 아닌, 두 손 모아 겨우 짜낸 “죄송합니다”라는 평범한 말 한 마디뿐이다. 잔혹함은 바닥까지 내려간다. 가족력 50%라는 확률 아래에 놓인 자녀들은 미래를 인공조명처럼 벼르는 유전자 검사기를 손에 쥐고, ‘알고 선택할 권리’와 ‘모르고 살아갈 자유’ 사이에서 비명을 삼킨다. 이 병이 가져오는 비극의 지형은 이렇게 한 사람의 뇌를 넘어 가족·사회·미래 계획 전반을 침수시키며 퍼져간다. 스틸 앨리스는 그 전조를 영화적 서스펜스가 아닌 일상의 균열로 촘촘히 박아 넣어, 관객 각자의 시계를 교묘히 뒤틀어 놓는다.

스틸 앨리스 – 가족과 돌봄의 무게

엉켜 있는 실타래는 끝을 찾을수록 더 조여 온다. 앨리스 가족의 ‘돌봄의 서사’가 정확히 그렇다. 남편 존은 연구실 스케줄을 쪼개 뉴욕과 보스턴 사이를 셔틀하며 아내의 아침 약을 챙기지만, 전화벨이 울린 호텔 방에서 “회의가 길어질지도 몰라”라고 중얼대는 순간 죄책감이 목을 조른다. 맞벌이로 집안을 떠받치던 파트너였던 아내가 급격히 돌봄의 대상으로 전환되는 시점, 존은 배우자가 아닌 ‘케어러’라는 낯선 직함을 부여받는다. 큰딸 애나는 임신 중에도 유전자 검사 양성 판정을 품고, 태어날 쌍둥이에게 혹여 알 수 없는 빚을 물려주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반면 막내 리디아는 검사 자체를 거부하며 “미래가 정해진다면 현재를 살 수 없잖아요”라고 버틴다. 돌봄을 둘러싸고 균열과 연대가 동시에 증폭되는 이 모순적 구조가 영화의 심장을 뜨겁게 두드린다. 특히 간병이 일상이 되면 가족은 두 겹의 피로에 시달린다. 첫째는 ‘돌보는 노동’의 물리적 피로, 둘째는 ‘사라져 가는 사람을 지켜봐야 하는’ 정서적 피로다. 앨리스가 핸드폰을 찾아 거실을 뒤엎고 냉장고에서 샴푸를 꺼낼 때, 관객은 방금 전까지 따뜻했던 거실 조명이 갑자기 형광등처럼 싸늘해지는 기시감을 느낀다. 누군가의 일상이 통째로 오작동할 때, 돌보는 이들의 세계 역시 뿌리째 흔들린다. 영화는 돌봄 행위가 ‘사랑의 연장’으로만 그려지는 낭만적 틀을 거부하고, 피로·죄책감·분노·포기의 감정 스펙트럼을 투명하게 펼쳐 보인다. 동시에 리디아가 뉴욕집에 돌아와 엄마의 머리를 빗겨 주며 독백 연습을 들려주는 장면에서는, 돌봄이 단지 책임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 맺기’이자 ‘언어의 재발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순간 리디아의 대사는 연극 대본을 넘어 엄마에게 바치는 유일무이한 ‘즉석 자장가’가 되고, 앨리스의 텅 빈 눈동자엔 미세한 물빛이 깃든다. 영화가 일러 주는 돌봄의 무게는 그래서 역설적이다. 너무 무거워 모두를 짓누르지만, 동시에 그 무게 덕분에 서로를 향해 끝끝내 팔을 뻗는 이유가 생긴다.

스틸 앨리스 – 출구

엔드크레딧이 흐르자 극장 천장의 emergency EXIT 초록빛이 묘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출구’라는 단어가, 앨리스가 남긴 영상 속 마지막 지시처럼 당혹스러운 울림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영화가 묻는다. “기억이 무너져도 당신은 어디로 나아갈 건가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머릿속 노트를 펼쳐 내 삶의 작은 포스트잇을 떠올렸다. 새벽마다 습관처럼 타던 동네 버스 번호, 누군가를 위해 끓이던 라면에 꼭 뿌리던 파 건더기, 지갑 속 오래된 공연 티켓―이 조각들이 모여 ‘나’를 이룬다고 믿었지만, 그 중 몇 개가 사라져도 내 웃음·두려움·사랑은 여전히 유효할까? 앨리스는 무대 위에서 기억을 잃는 공포와 싸우며 밑줄을 긋고 또 그었다. 나는 일상 속에서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휴대폰 알람을 켜고 또 껐다. 그녀는 카메라 앞에 서서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라고 외쳤고, 나는 빈 극장 통로에서 숨을 크게 내쉬며 “나는 아직 배우고 있다”라고 중얼거렸다. 스틸 앨리스는 완벽한 기억이 아닌 ‘흔들리며 버티는 의지’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고 속삭인다. 그래서 오늘 밤, 나도 작은 의식을 치르려 한다. 침대 맡 스탠드를 끄기 전, 하루 동안 놓쳤던 이름 하나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천천히 불러 보는 일. 혹시 내일 그 이름이 흐릿해져도 좋다. 그럼에도 나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잊힘과 사랑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부여잡을 수 있으니까.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