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늑대아이, 야성과 모성 사이를 달리다
늑대인간 남편과의 짧은 연애, 그리고 한밤중에 찾아온 두 아이의 울음까지. 영화 속 주인공 하나는 ‘야성’이라는 단어가 품은 낯섦을 단숨에 일상의 온기로 바꿔 버린 사람이다. 처음엔 털 투성이 아기를 품에 안고 “이걸 어떻게 기저귀를 갈아야 하지?”라며 허둥댔지만, 이내 그는 늑대의 본능과 인간의 규칙 사이에 다리를 놓는 법을 배운다. 아이들이 산속을 전력으로 뛰어다니다 긁힌 무릎을 들고 돌아오면, 하나는 꾸중 대신 소독약과 따뜻한 죽을 내밀며 말한다. “나도 아직 답을 모르지만, 같이 찾아보자.” 그 한 마디에는 보호자이자 동료로서의 다짐이 함께 들어 있다. 인간 사회의 시선은 늘 차갑다. 아파트 복도에서 들린 짐승 울음, 서류 미비로 거절당한 예방접종, 우유 대신 날고기를 탐내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슈퍼마켓 점원의 인상 찌푸림. 그러나 하나는 끝내 등을 돌리지 않는다. 그는 아이들의 발톱을 깎아 주면서도 “이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네가 가진 특별한 무기야”라고 속삭이고, 밤마다 덮어 주는 담요보다 더 두터운 안전망을 마음 한가운데에 펼쳐 둔다. 그 야무진 모성은 훈육이 아니라 동행이다. 그래서 영화의 카메라는 어느새 ‘늑대의 울음’보다 ‘어머니의 심장 박동’을 배경음으로 담는다. 나는 그 리듬을 들을 때마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작고 야생적인 욕망들이 스르르 고개를 들고, 동시에 누군가를 품어 주고픈 부드러운 본능도 고동친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모성은 길들임이 아니라 공존의 연습이며, 하나가 보여 준 사랑법은 울타리가 아니라 ‘함께 뛸 수 있는 트랙’을 그려 주는 일이었다.
늑대아이, 선택의 갈림길에 선 남매의 성장기
유키와 아메의 성장은 마치 하나의 나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두 개의 가지처럼 전개된다. 활달하고 수다스러운 유키는 “인간”이라는 햇볕을 향해 잎을 활짝 펼치고, 내성적이고 호기심 많은 아메는 “늑대”라는 그늘진 숲속으로 뿌리를 내린다. 처음엔 둘 다 에너지 넘치는 강아지 같아서 식탁 아래를 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 댔지만, 학교라는 사회적 무대에 올라간 순간부터 균열이 시작된다. 유키는 친구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 지껄이는 대신,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서툰 발톱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해한다. 반면 아메는 교실 창밖으로 보이는 산등성이를 멍하니 바라보다, 종이 울리면 가장 먼저 숲으로 달려 나간다. 그들이 겪는 갈등은 단순히 “정체성”이라는 추상적 단어로 환원되지 않는다. 급식 시간에 생선 냄새를 맡고 욱한 속을 참아야 하는 유키의 얼굴, 자신이 구한 새 chick을 놓아주며 ‘먹이’와 ‘친구’의 경계를 헤매는 아메의 눈빛, 그리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라붙어 버린 성장통이 구체적인 배우의 몸짓으로 구현된다. 영화는 이 성장기를 ‘선택’이라는 말로 명료화하지만, 정작 선택은 일순간의 결단이 아니라 수천 번의 미끄러짐과 되돌아봄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유키가 교실에서 넘어져 흙투성이가 되었을 때 건네받은 친구의 손, 아메가 폭풍우의 밤에 외로운 여우 스승을 구하려고 산으로 올라갈 때 느낀 책임감. 그런 조각들이 차곡차곡 모여 두 남매를 각자의 길로 이끌어 간다. 결국 갈림길은 하나의 점이 아니라, 무수한 작은 Y자 길이 연속된 여정이고, 그 곡선 위에서 아이들은 ‘인간’ 혹은 ‘늑대’라는 표지판을 스스로 세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 나를 규정했던 모든 딱지―우등생, 막내, 문제아―가 사실은 매 순간 새로 붙였다 떼어 낼 수 있는 이름표였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성장의 본질은 이름이 아니라, 이름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에 있었던 것이다.
늑대아이, 호소다 마모루가 그린 자연의 리듬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계절을 ‘타임랩스 효과’처럼 화려하게 보여 주지 않는다. 대신 시골집 처마에 번지는 물기, 논두렁 위에 얹힌 첫눈, 장마 뒤 들꽃 냄새 같은 미세한 감각을 길게 끌고 간다. 그렇게 축적된 자연의 디테일은 스크린을 넘어 관객의 피부에 촉감을 남긴다. 여름 아침, 열린 창으로 쏟아지는 매미 소리는 목적 없는 합창 같지만, 그 불규칙한 박자가 유키의 웃음과 겹치는 순간 장면은 하나의 ‘리듬’으로 완성된다. 반대로 겨울 밤, 산을 뒤덮은 눈발이 바람에 흩날릴 때, 아메의 고독한 하울링은 실로폰처럼 맑게 울려 퍼진다. 음악 감독 타나카 마사카츠의 피아노 음이 물결처럼 깔리면, 관객은 음표 대신 고도, 습도, 풍향을 읽는다. 이때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캐릭터다. 풍경이 아이들의 속도로 호흡하고, 날씨가 감정의 기복을 대신 말해 주며, 계절의 순환이 플롯의 장단을 결정짓는다. 예컨대 이사 첫해, 씨감자를 심고 실패했던 밭이 다음 해엔 무성한 싹을 틔우는 장면은 ‘육아’라는 키워드를 설명하는 친절한 주석 같다. 돌보지 않으면 썩고, 돌보더라도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여물지 않지만, 그래도 결국은 싹이 난다는 순환의 기적. 이 영화의 미장센은 그런 ‘자연 법칙’을 시각적으로 체화해, 관객에게 “세상은 언제나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나는 상영관을 나와 찬 바람을 맞는 순간, 영화 속 들판의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아 잠시 걸음을 멈췄다. 화면 너머의 계절이 내 현실의 공기에까지 번져 온 경험, 그것이야말로 호소다 마모루가 설계한 ‘공감각적 체험’의 완성일 것이다.
늑대아이 – 우리의 삶과 빗대어 보면?
엔딩 크레딧이 오르는 동안, 하나가 빈 집 마루에 혼자 앉아 산쪽을 향해 미소 짓던 마지막 컷이 머릿속에 반복 재생됐다. 유키는 기숙사 창 너머로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고, 아메는 산 정상에서 바람을 가르며 몸을 세운다. 두 아이는 서로 다른 하울링을 선택했지만, 그 소리가 원을 그리듯 겹쳐질 somewhere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믿음이 내 가슴을 후끈하게 데웠다. 영화가 던진 가장 큰 질문은 “부모는 언제 손을 놓아야 하는가?”가 아니었다. “손을 놓은 뒤에도 계속 이어질 신뢰를 어떻게 키워 둘 것인가?”였다. 하나는 길고 험한 육아의 숲을 통과하며, 아이들 앞에서 한 번도 ‘완벽한 지도’인 척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걸어 본 길을 표식 삼아 보여 주고, 넘어질 때마다 먼저 손바닥을 내밀어 줬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finally 떠날 수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혹은 나와 내 꿈 사이의 거리까지 생각했다. 필요한 건 벨트처럼 단단히 묶어 두는 돌봄이 아니라, 필요할 때 언제든 잡을 수 있는 ‘늘어진 줄’이다. 줄을 쥔 채로도 마음껏 뛰어오를 수 있고, 언젠가 스스로 풀어낼 수 있도록 조금 헐겁게 묶여 있는 끈. 영화관 불이 켜졌을 때, 나는 문득 휴대폰을 꺼내 부모님께 안부 문자를 보냈다. “나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은 조금만 하시고, 대신 요즘 하늘이 예뻐요.” 늑대아이의 마지막 하울링이 내 일상까지 울려 퍼져, 날것 그대로의 삶을 더 사랑해 보라고 등을 떠밀어 주는 듯했다. 우리의 삶도 결국 ‘야성과 사랑’이 공존하는 긴 러닝타임이고,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리듬을 배워 나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