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즈 올 라이트 – 사랑과 가족의 재발견

The Kids Are All Right p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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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즈 올 라이트 – 완벽해 보이던 가족의 균열

캘리포니아 한복판, 햇살이 부서지는 뒤뜰에 놓인 원형 테이블. 거기에서는 늘 신선한 토마토 샐러드와 홈메이드 피노누아가 함께 돌았다. 의사인 닉과 조경 디자이너를 꿈꾸는 줄스, 그리고 두 엄마의 사랑을 양분 삼아 자란 조니와 레이저. 언뜻 보면 이 네 식구는 이웃들이 부러워할 만큼 견고했다. 하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작은 금에 초점을 맞춘다. 18세가 된 장녀 조니가 “법적으로” 익명 기증자를 찾을 수 있게 되자, 아이들은 묘한 호기심에 휩싸이고, 식탁에서만큼은 끈끈하던 가족의 공기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엄마 둘이 서로의 숨소리까지 꿰뚫어 본다는 듯한 눈빛으로 상의하며 애써 덮어 두었던 갈등―닉의 완벽주의와 줄스의 자존감 결핍―이 아이들의 행동을 기폭제 삼아 수면 위로 떠오르는 대목은 숨이 막힐 만큼 현실적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닉이, 줄스가 고른 값비싼 트럭을 보며 “사업은 로고부터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질 때, 관객은 혼자 중얼거린다. ‘결국 우리 집도 저렇지.’ 그 균열은 거창한 사건이 아닌, 피곤한 퇴근길에 던진 한마디 비수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겉으로는 “자녀의 뿌리 찾기”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오랜 동거가 견뎌야 할 사소한 상처들을 파고든다. 금이 살짝 벌어진 자리에 비집고 들어오는 건 바로 도너 아빠 폴이다. 그의 등장으로 네 식구의 균형추가 살짝 기울자, 미끼를 삼킨 낚싯줄처럼 감춰 뒀던 감정이 팽팽히 당겨진다. 어딘가를 둘러보면 “완벽한 가족”처럼 보이는 집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냄비 뚜껑에 탄 자국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영화는 그 자국을, 태연한 미소를 바른 채 들여다본다.

키즈 올 라이트 – 엄마 둘, 사랑의 방식 둘

닉과 줄스는 한눈에 보아도 다른 별자리다. 닉은 ‘실용’이라는 별에서, 줄스는 ‘예술’이라는 별에서 날아왔다. 렌즈가 닉을 포착할 때마다 그녀는 손에 의료차트를 들고 있거나 난로 옆에서 두툼한 의료저널을 넘긴다. 반면 줄스는 잔디 위에 맨발을 놓고 토양을 만지작거리거나, 창가에서 밑그림을 끄적이다 연필을 귀에 꽂는다. 사랑은 때때로 상호 보완의 얼굴로 찾아오지만, 오래 갈수록 차이는 틈이 되고, 틈은 갈라짐이 된다. 닉의 사랑법은 ‘돌봄’ 그 자체다. “약은 먹었니?”로 시작해 “오늘 장은 내가 볼게”로 끝나는 그녀의 하루는 규칙표처럼 빼곡하다. 하지만 줄스에게 그런 돌봄은 간혹 검열처럼 느껴진다. 그가 새 조경 사업을 위해 트럭을 사 오자 닉은 “로고부터 만들었어야지”라며 두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는다. 줄스는 바짝 마른 잡초처럼 눈을 피한다. 그의 사랑은 ‘인정받고 싶은 몸짓’으로 표현된다. 정원에 작은 비밀스러운 터널을 만들다 보면, 누군가가 “와, 정말 멋져!”라고 말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줄스에게 폴의 무심한 칭찬 한마디―“와, 생태적인 감각이 끝내주네요”―는 사막의 이슬처럼 달콤했다. 사랑의 방식이 달라 충돌하는 부부는 많지만, 이 둘에게는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에서 비롯된 또 다른 과제가 얹힌다. 사회적 시선과 고군분투하며 ‘완벽한’ 레즈비언 가족을 입증해야 한다는 부담감. 닉이 목소리를 한 톤 올려 “우린 부모로서 충분하지 않아?”라고 외칠 때, 그 말에는 20년간 견뎌 온 편견과 싸움이 덧칠돼 있다. 줄스가 한밤중 베란다에 서서 와인 잔을 빙글 돌리는 장면이 뼈아픈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남편의 표정을 읽고 싶어 하는 ‘아내’처럼, 또 세상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소수자 커플’의 구성원처럼, 두 겹으로 흔들린다. 결국 둘의 갈등은 한순간의 외도로 폭발하지만, 영화는 용서와 책임의 과정을 납작하게 축소하지 않는다. 닉이 “결혼은 마라톤이야”라고 흐느낄 때, 줄스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랑의 방식이 다르기에 더 복잡하지만, 바로 그 다름 덕분에 서로를 새롭게 발견하기도 한다는 역설. 영화는 두 엄마의 갈등을 통해, 관객 각자의 관계를 비추는 서늘한 거울을 내민다.

키즈 올 라이트 – 성소수자 부모 가정의 ‘평범한’ 고민

레즈비언 커플, 인공수정, 도너 아빠… 자극적인 키워드만 캐내면 이 가족은 ‘특별 사례’처럼 보인다. 그러나 카메라가 실핏줄처럼 녹아든 일상을 비추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놀라우리만큼 평범해진다. 저녁 식탁에서 휴대전화 사용 금지를 외치는 엄마, 감사 편지를 밀린 아들을 닦달하는 엄마, 몰래 술을 맛본 딸, 그리고 지긋지긋한 잔소리라며 방문을 쾅 닫는 사춘기 아들. 피가 섞이지 않은 부모라도 자녀의 생활 습관과 성적, 친구 관계 앞에서는 도무지 ‘쿨’해지기 어렵다. 이는 혈연 여부와 무관한, 부모라는 역할의 숙명적 평범함이다. 영화가 진짜 빛나는 지점은 바로 이 일상을 섬세하게 복원해 내는 데 있다. ‘성소수자 가족’이라는 간판 아래 깔려 있을 법한 선입견―뭔가 독특하거나 별나게 살 것이라는―을 걷어내고, 우리가 다 아는 잔소리·지루·웃음·눈물이 뒤섞인 평범한 풍경을 들려준다. 동시에 서구 사회가 이 가정에 들이대는 잣대 역시 은근히 드러난다. 학교 상담 교사는 “아버지상 부재 때문에 공격적인 친구를 만나는 건 아닐까요?”라고 묻고,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믿는 인근의 주부조차 “우리 애도 한 번쯤 그 집에 초대해 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드러낸다. 영화는 그런 질문에 ‘반박’ 대신 ‘경험’을 내놓는다. 네 식구가 포도주를 따르며 깔깔거리는 소리, 감자 그라탱이 오븐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냄새, 부부싸움 뒤 어색한 침묵 속에서 흐르는 TV 소리… 그 일상은 여느 집과 다를 바 없고, 그러기에 더 강력한 설득력을 띤다. 성소수자 부모 역시 때로는 잔소리꾼이고, 때로는 실수를 저지르며, 결국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붙잡는다. 영화는 편견과 호기심의 시선을 가볍게 걷어내며 말한다. “이 집도, 당신네 집과 다르지 않아. 아이들은 다 자라고, 부모는 다 서툴러.” 그 평범함이야말로, 편견을 무너뜨리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키즈 올 라이트 – 내가 받은 큰 선물

마지막 장면, 대학 기숙사 앞에서 조니를 내려준 뒤 애써 웃어 보이던 닉이 차창을 올리며 끝내 울음을 터트린다. 그 곁에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줄스는 “We’re not breaking up, right?”라고 묻는다. 대답 대신 닉은 줄스의 손을 꼭 잡는다. 어깨를 들썩이는 두 사람의 silhouette을 바라보며 나는 어느 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건 우리 집 얘기야”라며 소리 없이 맞장구를 치다가, 마지막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관계란 결국 ‘서로에게 실망할 권리’와 ‘다시 붙잡을 용기’를 함께 갖추는 일이라는 것을.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를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균형은 한 번 맞추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절마다 다시 조율해야 하는 오래된 현악기 같다. 줄스의 외도를 보며 “버려진 것 같다”고 토로하던 레이저의 입술, “엄마 왜 이렇게 과보호해?”라고 투덜대던 조니의 눈동자, 갈비뼈처럼 앙상해진 서로의 자존심… 그럼에도 가족은 파국 대신 ‘협상’을 택한다. 담담하게, 끈질기게. 이 영화는 특이한 설정으로 우리를 끌어오지만, 끝내 보여 주는 건 ‘평범한 회복력’이다. 울음을 참고 싶은 날, 밤하늘을 봤다. 별빛 사이로 희미한 구름이 흘렀다. 어쩌면 우리 관계도 저 구름 같다. 뾰족한 별들을 잠시 가릴지언정, 이내 스스로 흩어지며 길을 터 준다. 다음 구름이 올 때까지, 우리는 다시 웃으며 살아간다. 영화관을 나와 핸드폰을 꺼내 “잘 자” 한 줄을 가족 단톡방에 남겼다. 문장을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오늘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괜찮지 않을 때조차 같이 머무르는 용기’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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