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재스민 – 허상에서 붕괴까지 추락

영화 블루 재스민 포스터
영화 블루 재스민 포스터

블루 재스민 – 한순간에 무너진 상류층의 허상

재스민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뿜어내던 ‘퍼스트 클래스’의 잔향은 샌프란시스코의 눅눅한 공기에 잠식되며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뉴욕 펜트하우스와 샹들리에 대신 그녀를 맞이한 것은 동생 진저의 협소한 아파트의 낡은 전등, 과거의 화려함을 들이밀기엔 지나치게 낮은 천장이었죠. 그러나 재스민은 공간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를 증명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파에 앉아 “여긴 가구 배치가 엉망이야”라고 투덜대는 것이었으니까요. 우디 앨런은 이 짧은 대사 하나로 시청자에게 재스민의 뿌리 깊은 허영을 각인시킵니다. 영화는 이후 내내 ‘디올 블라우스 위에 덕지덕지 발린 공포’라는 아이러니한 풍경을 반복적으로 보여 줍니다. 재스민이 들고 다니는 에르메스 백은 그녀의 계급 신분증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벼랑 끝에 매달린 두 손 중 하나를 가리고 있는 커다란 장갑일 뿐이죠. 상류층 사회에서 “외모·재력·인맥”이라는 세 개의 기둥이 쓰러지는 순간, 남는 것은 허무뿐임을 감독은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특히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과거를 복기하는 장면은, 무너진 성채 위에 종이 탑을 쌓는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를 연상케 합니다. 그럼에도 재스민은 끝끝내 현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비단 재스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관객의 불편한 자기반영 거울이 됩니다. 상류층이라는 단어를 ‘돈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붙잡을 과거가 많은 사람들’로 재해석하며, 사회적 사다리의 가장 위와 가장 아래가 실은 한 발짝 차이일 뿐임을 시종일관 입증하는 셈이죠. 그리하여 관객은 재스민의 추락을 구경하다가, 문득 자기 발밑도 허공일지 모른다는 섬뜩함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블루 재스민 – 거짓과 자기기만이 낳은 파멸의 나비효과

재스민의 세계는 ‘화이트칼라 범죄’와 ‘블루문 반주’로 양분됩니다. 남편 할이 저질러 온 대담한 사기는 버나드 메이도프 사건을 연상시키며, 영화는 이 거대한 거짓을 수정 구슬처럼 흔들어 관객에게 쪼갠 빛을 비춥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건, 할의 범죄보다 재스민의 자기기만이 훨씬 치명적인 폭발력을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불법 투자 서류에 무심코 서명하며 “나는 숫자엔 젬병이야”라고 웃어넘기고, 남편의 바람을 눈치채면서도 ‘에스테틱 친구’ 운운하며 고개를 돌립니다. 감독은 이러한 외면이 단순한 무지나 순진함이 아니라, 적극적인 공모이자 자기 보호 본능이라고 못 박습니다. 감사 서류에 눈길 한 번 안 준 선택, 동생 진저의 복권 당첨금을 ‘확실한 투자’라며 권유한 선택, 그리고 마지막으로 FBI에 남편을 밀고해 버린 선택까지. 재스민의 나비 날갯짓들은 점잖은 체면 옷을 입었으나, 결국 주변 인물들의 삶을 연쇄적으로 쓰러뜨립니다. 진저는 결혼생활을 잃었고, 오기는 사업 자금을 잃었고, 아들 대니는 성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파국이 임계점에 달했을 때조차 재스민은 “나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며 고개를 치켜세우죠. 그래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거짓말을 해도 되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얼마나 자주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가? 그리고 그 대가를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라는 훨씬 불편한 물음이죠. 마지막 장면에서 재스민이 공원 벤치에 앉아 허공에 대고 웅얼거릴 때, 그녀의 독백은 더 이상 사치를 동경하는 관객을 비웃지 않습니다. 대신 관객 각자가 품고 있는 작은 기만의 씨앗에 경고음을 울립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순간, 당신도 이 푸른 악몽의 순서를 예약하게 될지 모른다’고 말이죠.

블루 재스민 – 허영을 벗겨낸 후 남은 것들

모든 금박이 벗겨지고 나서 재스민에게 남은 것은 참혹할 만큼 원초적인 감정들입니다. 부끄러움, 두려움, 그리고 외로움. 그녀가 새 연인 드와이트에게 직업과 가족사를 통째로 날조한 사실이 들통나 도망치는 장면에서, 드레스를 움켜쥐고 뛰는 모습은 레드카펫 대신 정육점 바닥을 질주하는 백조처럼 처연합니다. 그 후 그녀가 찾은 곳은 화려한 파티가 아니라 중고 악기점—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잔해가 먼지 속에 쌓여 있는 공간입니다. 마치 영화가 “허영을 걷어내고 나면 사람은 결국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진실 앞에 선다”고 선언하는 듯하죠. 더 잔인한 건, 이 처절한 진실의 순간에도 재스민은 여전히 흰색 샤넬 재킷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허영은 벗어 던지려 해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두 번째 피부처럼 그녀를 따라다닙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개인의 도덕적 실패를 넘어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겨눈 듯 보입니다. ‘계급’이라는 갑옷을 입고 사는 한, 우리는 스스로를 속여서라도 갑옷을 광내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허영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엔 무엇이 남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은 그 빈자리에 ‘연대’의 가능성을 살짝 엿보게 됩니다. 진저는 끝내 언니를 밀어내지만, 관객은 그 선택이 잔혹함이 아니라 자기보존임을 이해하게 되죠. 우디 앨런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때로 잔인해져야 한다”는 역설을 통해, 허영이 빠진 공간을 ‘서로의 경계선을 존중하는 거리감’으로 채웁니다. 덕분에 우리는 재스민의 파멸을 통해 역설적 희망 한 조각을 건져 올립니다. 삶의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비로소 타인의 슬픔을 이해할 여백이 생긴다는, 먹먹하지만 분명한 깨달음입니다.

블루 재스민 – 귓가에 멤도는 멜로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한동안 블루문 멜로디가 귓가에서 맴돌았습니다. 언젠가 바에서 들었던 긍정적인 가사보다, 이제는 “푸른 달빛 아래선 사랑도 운도 끝내 빛을 잃는다”는 허무의 변주곡처럼 들렸습니다. 재스민의 비극은 단순한 인물 연구가 아니라, 내 안의 ‘작은 재스민’을 헤아려 보라는 초대장 같았어요. 잘난 척하고 싶어 SNS에 과장된 사진을 올린 순간, 불편한 진실을 덮고 “바쁘다”며 회피했던 순간, 혹은 누군가의 충고를 “촌스럽다”고 흘려넘겼던 순간들이 스치더군요. 영화를 통해 깨달은 건, 화려함은 때로 슬픔을 감추는 포일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가 지나치게 반짝일 때, “저 사람도 외로워서 저렇게 빛을 문질렀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먼저 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내 삶의 갑옷에도 주기적으로 금이 가 있나 살펴보고, 그때마다 솔직한 고백으로 빈틈을 메워 보려 합니다. 우디 앨런이 재스민을 통해 보여 준 건 실패담이자 경고장이지만, 동시에 두 손 놓고 주저앉지 말라는 격려처럼도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블루문 아래 서 있습니다. 다만 누군가는 그 달빛을 거울 삼아 자신을 들여다보고, 누군가는 눈부심에 도망치죠. 영화를 보고 난 지금, 저는 가능하다면 전자를 택하고 싶습니다. 허영 대신 연민을, 자기기만 대신 솔직함을,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을 용기를 선택하는 쪽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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