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사랑과 절망 그리고 왈츠

영화 마츠코의 일생 포스터
영화 마츠코의 일생 포스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사랑과 파멸의 굴레

첫 장면에서 이미 죽은 채 발견되는 주인공을 따라가며, 관객은 역주행 열차처럼 그녀의 과거로 빨려 들어간다. 마츠코의 일생은 한마디로 **“애정 결핍이 빚어낸 재난 시뮬레이션”**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시선은 늘 아픈 동생 쿠미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눈꼬리가 빠르게 내려앉는 그 외면 앞에서, 마츠코는 광대 같은 기괴한 웃음을 ‘행복의 비밀번호’라 믿고 반복한다. 하지만 미소는 자물쇠를 열지 못했고, 마음에 난 상처는 ‘누가 나를 사랑해 주기만 하면’이라는 굶주림으로 곪아 갔다. 교사 시절, 학생 류를 감싸기 위해 스스로 도둑 누명을 쓰는 선택은 그 굶주림의 첫 폭발이다. 이후 그녀는 폭력적 연인, 기생형 애인, 야쿠자까지 만날 때마다 “이번엔 정말 나를 구해 주겠지?”라고 속삭이지만, 세상은 늘 정반대의 영수증을 돌려준다. 손목에 잡힌 관심의 온기는 잠깐이고, 곧이어 배신·폭력·사기로 변색된다. 그럼에도 마츠코는 매번 자신을 탓한다. “내가 더 주지 못해서”라는 이 왜곡된 책임감은 구덩이를 파도 파도 끝이 없는 밑바닥으로 만든다. 화려한 뮤지컬 넘버와 원색 조명이 그녀의 파멸을 축제처럼 비추는 이유도 여기 있다. 관객은 현란한 쇼를 따라 박수를 치다, 문득 제 손바닥이 뜨겁게 아파 오는 순간을 맞는다. ‘내가 누군가의 사랑을 빌미로 이런 굴레를 씌운 적은 없을까?’—마츠코의 비극은 그렇게 스크린 밖 현실까지 번져, 우리 각자의 관계를 조용히 조명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아버지의 침묵, 딸의 절규

스무 살 무렵까지 마츠코가 품은 모든 꿈은 ‘아버지의 한마디 칭찬’으로 수렴됐다. 놀이공원에서 광대 흉내를 내며 끌어낸 짧은 웃음 한 번이 얼마나 달콤했으면, 그 표정을 평생의 방어기제로 각인했을까. 그러나 아버지에게선 “잘했다” 혹은 “미안하다” 같은 따뜻한 문장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 침묵으로 둘러친 벽 앞에서, 마츠코는 기린처럼 목을 뻗어 애정을 탐색하다 목뼈가 비뚤어져 버린다. 영화 후반, 그녀가 고향집에서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하는 장면은 가슴을 짓누른다. 날짜마다 작은 활자—“마츠코, 연락 없음”—이 빗금처럼 새겨져 있다. 그 순간 관객은 깨닫는다. 아버지는 딸을 사랑했지만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진실을. 이미 세상과 불화 끝에 망가진 마츠코에게 이 기록은 위로가 아니라 절망이다. “사랑했다면 왜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나요?”라는 딸의 속울음은, 한국‧일본을 막론하고 ‘말없이 애정한다’는 미명 아래 감정을 저축만 해온 기성세대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침묵은 때로 학대보다 깊은 흉터를 남긴다. 영화는 묻는다. “지금 당신이 삼킨 따뜻한 말 한마디, 언젠가 늦어 터진 후회의 독이 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극장을 나서는 길, 우리는 어쩌면 엉겁결에 휴대폰 연락처를 뒤적이며 부모나 자식의 이름을 찾고 있을지 모른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우리에게 남은 숙제

마츠코의 최후는 강변 가로등 아래, 불량 청소년들의 무심한 야구배트로 허망하게 끝난다. 손에 쥔 것은 십여 년 만에 잡은 친구 메구미의 명함 한 장. 살아갈 이유를 겨우 다시 주워 든 순간 찾아온 폭력은, 안전망 없는 사회가 약자를 어떻게 소모하는지 적나라하게 증언한다. 영화는 그녀의 생을 전시하고 끝나는 대신 ‘관객 과제’를 남긴다. 첫째, 애정 결핍이 낳는 비극을 ‘개인의 실패’로 돌리지 말 것. 마츠코를 조롱하던 이웃, 성매매 업소에서 그녀를 소비하던 손님, 야쿠자 조직처럼 폭력을 시스템화한 사회 모두가 공범이다. 둘째, 돌봄이 부재한 틈을 제도와 공동체가 어떻게 메울 것인가. 치명적 선택의 갈림길마다 마츠코를 붙잡아 줄 공공 안전망은 없었다. 셋째, 표현된 사랑만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 우리는 ‘알겠지’라고 넘기며 관계를 연명하지만, 실제로는 무너지는 다리를 덮개로 가릴 뿐이다. 영화가 마지막 엔딩 넘버로 보여 준 ‘천국의 계단’은 현실이 아닌 위로일 뿐—현실의 숙제는 스크린 밖 우리 손에 남았다. 이 숙제를 무심히 접어 서랍에 던질지, 오늘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며 풀기 시작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마츠코가 남긴 빈자리보다 큰 질문이, 이제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시험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이 기분은 뭐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는 오래된 거울 앞에 선 기분이었다. 불행을 대책 없이 소비한 건 아닐까 두려웠고, 동시에 내 안에도 서툰 사랑 때문에 길을 잃던 ‘작은 마츠코’가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영화 속 원색이 남긴 잔상은 내 뇌리를 사정없이 두드렸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조차 끝내 고독을 벗지 못한 마츠코처럼, 나 역시 반짝이는 도시 불빛 속에서 누군가의 인정 한 줌을 갈구하며 걸어온 건 아니었을까. 상냥함을 가장한 무관심, 또는 “알겠지”라는 편리한 침묵이 내가 쏘아 올린 작지만 날카로운 돌멩이였음을 깨닫는 순간, 목젖 아래가 뜨겁게 저려 왔다. 영화는 말한다. 표현하지 않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그래서 나는 극장을 나서는 발걸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감정을 미뤄 두었지?” 기쁜 일에 박수를 아끼고, 섭섭함엔 애써 웃어넘기며, 고마움은 ‘다음에’로 미루어 둔 채 그저 시간에게 전달을 부탁했던 날들이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마츠코의 이름 아래 축적된 ‘연락 없음’이라는 다섯 글자가, 어쩌면 내 주변 누군가의 노트에도 적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알람처럼 울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새는 늘 사소한 오해와 미루기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잠든 감정을 톡 건드리는 영화 한 편이 우리 일상을 뒤집어 놓지는 못한다. 하지만 사랑을 말하기 망설이는 순간, 침묵 대신 문장을 선택할 용기 정도는 건네줄 수 있다. 나는 결심했다. 내일로 넘기던 말을 오늘 안에 입 밖으로 꺼내 보기로. “괜찮아?” “고마워.” “보고 싶었어.” 그렇게 짧은 세 문장이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할 수도 있다는 걸, 마츠코가 떠난 빈자리가 증명해 주었다. 밤공기가 조금 덜 차갑게 느껴진 이유도 아마 그 결심 덕분이었을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여전히 불완전했지만, 적어도 후회로 얼룩지지는 않았다. 언젠가 내 이름이 적힌 기록이 누군가의 일기장에 남더라도, 그것이 ‘연락 없음’이 아니길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누군가의 기억 속을 걷어차고 나갈 때, 남겨질 마지막 문장이 “사랑받았다”이길 바라며—마츠코가 내게 남긴 울림을 서툴지만 확실한 언어로, 오늘부터 조금씩 살아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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