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운드 오브 메탈 – 리스 아메드의 7개월간 드럼 고행기
리스 아메드는 이 작품에서 ‘몸으로 때우는’ 차원을 훌쩍 넘어, 아예 몸을 뜯어고치는 경험을 자처했다. 그는 캐스팅이 확정되자마자 하루 세 시간씩 드럼 앞에 붙어 살았다. 처음엔 스틱을 쥔 손이 엉거주춤해 여드름 난 중학생처럼 들썩였지만, 한 달쯤 지나서는 킥드럼 페달을 맨발로 밟아도 일정한 박자가 나올 만큼 땀을 부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나리오엔 “청력 상실 이후, 귀마개와 고요를 의도적으로 체험하는 연습”이란 메소드 지시가 있었다. 그는 울타리 없는 공원에 가 노트북과 휴대폰을 끄고, 차가운 바람 소리가 귀를 할퀴는 순간까지 휑한 침묵을 감내했다. 야외 드럼 세션 당시엔 실제 농인(청각장애인) 세션 강사 옆에서 수어(ASL)를 따라 하느라 리듬과 손짓을 동시에 맞추는 묘기를 부렸다. 준비 기간 7개월, 촬영은 고작 한 달 남짓. 영화를 보고 나면 ‘드럼은 어차피 립싱크겠지’라는 합리적 의심이 무너진다. 카메라가 초근접해도 손목 각도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 스네어 위 모래 알갱이까지 튀어 오르는 속주에도 표정이 흐트러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드럼이 아니라 **“균열 난 삶”**을 내리쳤고, 관객은 그 진동을 고스란히 가슴에서 받는다. 개인적으로는 연주 장면마다 아메드의 쇄골이 불규칙하게 솟구치는 걸 보며, 드럼이라는 악기가 사실상 ‘제2의 심장’임을 깨달았다. 악보 초보가 이 정도 레벨업을 하려면 밴드 연습실 월세만도 빠듯할 텐데, 그는 시간을 돈처럼 쓰는 대신 시간을 몸속에 저축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의 드럼은 소리 없이 울리지만, 연습실 바닥에 스며든 그 210일치 땀냄새는 스크린 밖까지 따라온다.
사운드 오브 메탈 – “우리는 고치는 게 아니다” 청각장애의 재정의
영화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장애 서사’를 뜯어낸 자리마다 ‘새로운 언어’를 심어 놓았다는 데 있다. 루벤이 처음 농인 공동체에 들어섰을 때, 지도자 조는 “여긴 고치는 곳이 아니라 배우는 곳”이라며 못 박는다. 그 한마디로 영화는 ‘결함→치유’ 공식을 파기하고, ‘다름→획득’의 서사를 꺼내 든다. 실제 농인 배우와 CODA(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배우들이 대다수 등장해, 수어가 장식품이 아니라 생활 언어임을 입증한다. 식당에서 수어로 농담이 오가고, 유치원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탁탁’ 책상을 두드려 주의를 끈다. 나는 그 장면들이 마치 이중 노출 사진처럼 느껴졌다. ‘소리’가 카메라의 첫 노출이라면, ‘진동·시선·촉감’은 두 번째 노출이다. 두 레이어가 겹치자, 세상은 더 두꺼워졌다. 루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내가 알던 세계의 붕괴다. 그러나 영화는 곧바로 복구 공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폐허 위에 새로운 문법을 세운다. “고요 속에도 리듬이 있다”는 조의 말은, 관객에게도 들리지 않는 음악을 상상하게 한다. 그 순간, 청각장애는 병명이 아니라 다른 주파수에 맞춘 존재 방식으로 자리 바꿈한다. 이 시선 덕분에 영화는 장애 서사를 소비하는 대신, ‘감각의 다양성’을 함께 체험하는 장으로 변모한다. 나 역시 자막 없이는 외국 영화를 못 보는 ‘언어 장애’ 비슷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수어 수업 장면을 보며 깨달았다. 부족함은 꽉 막힌 벽이 아니라, 다른 창문을 찾아 나서는 모험지도라는 사실을.
사운드 오브 메탈 – 드럼 비트로 박동을 대신하다
사운드 오브 메탈은 사실상 ‘소리의 자서전’이다. 오프닝의 메탈 공연은 압축된 역대급 볼륨으로 관객을 강제 입장시킨다. 베이스 주파수가 가슴팍을 때릴 때, 루벤의 심장도 스네어와 박자를 맞춘다. 그런데 불현듯 고음이 꺾이고, 잔향이 진흙처럼 뭉개진다. 그때부터 사운드 트랙은 두 개의 층으로 분리된다. 하나는 무대 위 실제 사운드, 다른 하나는 루벤의 내부 청각이다. 물속에서 듣는 듯한 둔탁함, 마치 오래된 진공관 라디오의 잡음 같은 웅웅거림이 교차할 때마다, 우리는 ‘귀’ 말고 다른 감각으로 리듬을 찾아야 한다. 영화 중반, 공동체 아이들과 드럼을 칠 때 구조는 더 확실해진다. 아이들이 책상 표면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면, 루벤은 그 진동을 턱뼈와 손목으로 읽어낸다. ‘쿵–짝’ 대신 ‘덜컹–떨림’으로 번역된 리듬이다. 이 순간 드럼은 심장이 되지만, 박동의 단위가 ‘소리’가 아니라 ‘촉감’으로 바뀐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을 보며, 예전에 지하 클럽에서 스피커 바로 앞에 서 있다가 내 심장이 베이스에 맞춰 덜컹이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음악을 **‘듣는다’기보다 ‘몸으로 저장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영화가 말하는 것도 같다. 소리는 귀에만 머무르지 않고, 피부·뼈·근육 곳곳에 각인된다고. 그래서 루벤이 코클리아 이식 수술 후 기계음에 괴로워할 때, 관객 또한 가청 주파수가 찢기는 고통을 몸으로 느낀다. 드럼 비트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불규칙하지만 분명한 생존의 맥박이다. 그 맥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루벤이 ‘음악가’에서 ‘존재 그 자체’로 변모하는 경로를 함께 걸은 셈이 된다.
사운드 오브 메탈 – 한동안은 음악이 없어도 되리라
상영이 끝나고 극장 불이 켜지는 순간, 이상하게도 아무 음악도 틀고 싶지 않았다. 보통은 엔딩 크레딧이 흐르면 자동으로 재생 목록부터 뒤지곤 했지만, 그날만큼은 이어폰을 꺼내려다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을 때마다 구두 굽이 콘크리트와 맞부딪히는 ‘딱, 딱’ 하는 소리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플랫폼에 서자 스크린도어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바삭한 종잇장처럼 귀를 스쳤고, 전동차가 들어올 땐 그 바람마저 내 귓불을 솔솔 간질였다. 평소라면 신경도 안 썼을 잡음들이 어느새 리듬이 되어 나를 감싸고 있었다.영화는 “세상이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강요했지만, 동시에 “그래도 삶은 연주된다”는 위로를 건넸다. 마지막 장면에서 루벤이 도시의 소음을 스스로 ‘끄는’ 순간, 화면 속 적막이 내 고막 안쪽까지 번져 차분히 눌어붙었다. 알 수 없는 해방감이랄까? 그 적막이 낯설어 무섭기보다 오히려 편안했다. 우리는 때때로 소리를 잃어야만 비로소 들리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누군가의 미세한 숨소리든, 긴 하루를 버티는 내 심장 박동이든, 혹은 몰래 품어 둔 작은 꿈의 목소리든 말이다.집으로 돌아오는 길,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는 ‘딸깍’ 소리까지 세어 보았다. 희미하게 내쉬는 숨이 겨울 공기와 부딪혀 하얗게 피어오르는 기척도 들리는 듯했다. 그때 깨달았다. ‘청각’이란 단순히 귀로 받아들이는 파동이 아니라, 내 존재를 세상과 연결하는 감각의 파이프라는 사실을. 파이프가 막힐 수도 있지만, 그 순간 다른 연결 고리가 자라난다. 피부는 떨림으로, 눈은 미세한 진동으로, 마음은 기억된 음표로 세상을 다시 번역해 낸다.2025년이라는 숫자가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날에도, 나는 가끔 고요를 켜고 내 안의 박동에 귀 기울일 작정이다. 소음을 걷어 낸 자리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 ‘쿵-쿵’ 규칙적으로 뛰는 리듬이 남아 있을 테니까.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두려움이 밀려올 때면, 드럼 스틱 대신 두 주먹으로도 새로운 연주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세상이 무대이고, 공기는 악보이며, 침묵 또한 하나의 음표라는 사실을 이 영화가 가르쳐 주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