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긴 어게인 – 뉴욕의 별빛 세레나데 여정

영화 비긴어게인 포스터
영화 비긴어게인 포스터

비긴 어게인 – 뉴욕 거리에서 태어난 음반

낡은 벽돌 골목 끝에서 튀어나오는 택시 경적, 한여름 습도를 머금은 지하철 환풍기 소음, 건물 외벽을 두드리는 간헐적 비의 리듬. 영화는 이런 도시의 배경음을 악보 칸마다 끼워 넣어 진짜 ‘뉴욕판 라이브 앨범’을 만들어 낸다. 그레타와 덴은 값비싼 스튜디오 대신 강변 산책로, 메트로 카드가 찍히는 개찰구 앞, 하늘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옥상으로 이동하며 마이크를 세운다. 파도가 치는 순간처럼 예측 불가인 환경은 때때로 잡음으로, 때때로 우연한 퍼커션으로 튀어나오는데, 그 여백까지도 이 둘은 “이건 도시가 주는 즉흥 세션이야”라고 웃어 넘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한밤중 다리 아래에서 녹음할 때였다. 기타 음이 조용히 파도를 타고 가다가, 먼 곳에서 지나는 선박의 경적이 길게 울려 퍼지는데 그게 마치 브라스 세션처럼 곡을 풍성하게 채우는 것이다. 음악이 물리적인 공간과 결합해 하나의 풍경화를 그려 낸다는 걸, 관객은 장면이 아니라 ‘소리’를 통해 체감한다. 상업 레이블이 주는 고가의 믹싱 보정이 배제된 채, 마이크에 직접 얹힌 도시의 습기와 열기, 길거리의 먼지까지도 전부 트랙에 눌어붙어 있다 보니, 이 음반은 그냥 ‘앨범’이 아니라 2010년대 뉴욕의 공기 샘플러에 가깝다.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듯 “도시는 거대한 악기”라는 말이 과장 같았는데, 이 영화에서는 분명히 현실이 된다. 그레타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 뒤로 들려오는 지하철 철컥거림은 잠시 후 다른 노래에서 드럼의 ‘쉬’ 하는 스네어처럼 변주를 낳는다. 또, 어린 아이가 녹음 중에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 도망치는 바람에 테이크를 다시 가야 했던 순간까지 고스란히 수록되는데, 그조차도 이 앨범이 ‘살아 있다’는 증거로 남는다. 관객으로서 나는 헤드폰을 끼고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음향이 아닌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기시감을 느낀다. 마치 뉴욕이 큼지막한 라이브 하우스가 되어 내 귓가를 두드리는 기분. 결국 ‘비긴 어게인’의 거리 녹음은 ‘저 예산’의 타협이 아니라, 음악과 공간이 만나 탄생한 즉흥 미술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나는 종종 유튜브 창을 열고 뉴욕 길거리 소음이나 밤비 소리를 재생해 놓은 뒤 그레타의 곡을 겹쳐 듣는다. 그러면 화면 없이도 영화 한가운데로 순간 이동하는 작은 마법이 발동한다. 이 영화가 내게 건넨 가장 큰 선물은 결국, 비싼 장비가 아니라 귀를 열고 세상을 녹음하는 법이었다.

비긴 어게인 – 음악이 가족을 다시 잇다

덴의 삶은 한때 ‘그래미 트로피’보다 반짝였지만, 연이은 실패와 술병 속에서 그는 제 스스로 음소거 버튼을 눌러 버린 사람처럼 보인다. 오랜 파트너이자 공동 창업자가 회의실 문을 쾅 닫으며 “당신은 시대에 뒤처졌어”라고 선언하던 날, 덴은 사무실에서 내쫓기고, 딸 바이올렛에게조차 “아빠, 나 챙길 시간 있긴 해?”라는 싸늘한 질문을 듣는다. 그러던 그가 그레타를 만나 뉴욕 곳곳을 누비며 녹음을 시작하면서,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음악적 감각보다 그의 ‘부성(父性)’이다. 녹음 현장에 우연히 놀러 온 바이올렛은 기타 줄 튕기며 장난치다 덴에게 “나도 무대 위에 서 보고 싶어”라고 말한다. 술에 절어 있던 아버지는 잠깐 멈칫하지만, 이내 벨트 대신 기타 스트랩을 조여 주고 “들어봐, 네 음이 도시의 불빛처럼 반짝거릴 거야”라고 격려한다. 그 한 문장에 담긴 진심 덕분인지, 바이올렛은 카메오처럼 깜짝 등장해 노래를 뽐내며 관객에게 순도 100% 웃음을 뿜는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해’는 이때 벌어진다. 무대 조명은 프로조차 긴장시키는 낯선 빛인데도, 아버지와 딸이 마주보며 코드를 맞추는 표정은 그 어떤 스포트라이트보다 따뜻하다. 한편, 그레타 역시 가족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시간에 새로운 가족을 발견한다. 덴의 전 부인 마리안과 마주 앉아 와인잔을 돌리며 “그는 정말로 음악밖에 몰라요”라며 동시에 웃어 버리는데, 그 순간 둘 사이에 묘한 연대감이 생긴다. 음악이 폭발적인 파워로 관계를 회복한다기보다는, 작은 화음처럼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이어 붙인다는 걸 영화는 보여준다. 음악을 통해 ‘실수한 어른’이 ‘상처받은 아이’에게 다가가고, ‘배신당한 여자’가 ‘헤어진 여자’의 마음을 읽는다. 결국 덴과 바이올렛이 함께 만든 데모 트랙은 레이블에서 거절당했지만, 바이올렛은 “나중에 우리 셋이 다시 녹음하자”라며 폴라로이드 사진을 덴의 지갑에 슬쩍 넣어 준다. 텅 빈 지갑에 그 사진 한 장이 들어가는 순간, 덴은 비로소 ‘음악가’이자 ‘아버지’로 새 출발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내가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켠이 포근해지는 이유는, 음 하나가 사람 하나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믿음이 스크린을 넘어 현실로 전달됐기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보고 집에 돌아와 기타 먼지를 털어 내던 날, 나는 줄을 고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혹시 오늘 내 소리가, 누군가의 관계를 다시 묶어 줄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그렇게 일상의 끊어진 실 같은 순간들을 하나둘 꿰매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바느질 세트였다.

비긴 어게인 – 다시 꿈꾸게 하는 순간들

처음 기타를 잡았을 때 손끝이 얼얼하던 기억, 첫 녹음 파일에서 내 목소리가 어색해 웃음이 터졌던 순간, 공연장 조명이 꺼졌는데도 귀가가 아깝다며 마지막 곡을 흥얼거리던 새벽 지하철. ‘비긴 어게인’은 그런 개인적인 회상들을 죄다 소환해 “한 번 더 해 볼래?”라고 묻는다. 그레타는 사랑, 작업실, 미래 설계까지 전부 데이브에게 걸었지만, 그 탑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그때 그녀가 선택한 건 자조 섞인 체념이 아니라, 노트북에 남아 있던 미완성 코드 진행이었다. 편곡도, 믹싱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데모이지만, 덴은 그 한 조각을 듣고 “이건 네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증거”라며 꺼내 보라고 재촉한다. 그레타가 이어폰을 반쯤 빼고, 도시의 소음과 데모 트랙을 한꺼번에 들려주던 장면은 내게 일종의 ‘꿈 호출 벨’ 같은 신호였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설계도가 아니라, 조용히 되살아나는 심장 박동이라는 사실 말이다. 더불어 영화가 택한 ‘배급사 없이 음원을 온라인에 무료 공개한다’는 결말은 통쾌함을 넘어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건 커다란 플랫폼이나 수익 구조를 거부하려는 어떤 거창한 선언이 아니다. 그보다는 “내 노래를 누군가가 길 잃은 밤에 발견해서 위로받길 바란다”라는 작고 사적인 소망 같았다. 실제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 나는 스마트폰 스트리밍 앱을 켜고 새로운 인디 뮤지션들을 찾아 헤맸다. 내 플레이리스트 속 작은 점멸들이 합쳐져 다시 꿈꾸게 하는 별자리로 이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꿈은 비용이 든다”라는 말이 흔하지만, 영화는 살짝 다른 답을 건넨다. “꿈은 이미 네 안에서 숨 쉬고 있어. 필요한 건 밖으로 꺼낼 용기뿐”이라고. 그래서 이 영화를 본 뒤, 나는 오래 미뤄 둔 글쓰기 프로젝트를 다시 열었다. 노트북 커서를 깜빡이게 만든 힘은 거창한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그레타가 흘린 땀 한 방울, 덴이 건넨 낡은 헤드폰, 뉴욕의 정체 모를 바람소리였다. 다시 꿈꾸는 일은 결국 영화 속 주인공들만의 특권이 아니었다. 관객석에 앉았던 우리 역시 스크린을 통과해, 각자의 무대로 호출된 셈이다. 그리고 거기서 흘러나온 첫 음, 첫 문장, 첫 붓질은 예상보다 작고 소박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 반짝거렸다.

비긴 어게인 – 끝나지만 끝나지 않음

나는 가끔 ‘삶’이라는 곡을 거꾸로 재생해 보면 어떨까 상상한다. 처음엔 후렴구처럼 화려했지만 점점 단순해지는 구조, 예상치 못한 위치에서 등장하는 일렉 기타 픽 슬립, 버벅대는 박자––그 모든 기이한 소리들이 되레 또렷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비긴 어게인’은 그런 거꾸로 재생 놀이를 실제로 체험하게 하는 영화였다. 덴과 그레타는 실패와 배신, 미완성과 후회를 먼저 맛보고, 그 뒤에야 첫걸음을 떼듯 새벽녘 골목에서 녹음을 시작한다. 나는 그 순서를 보며 “아, 내 흔들리는 삶도 사실은 인트로가 꽤 길었을 뿐이구나” 하고 웃었다. 그리고 영화 속 “Lost Stars” 가사가 새삼 다르게 들렸다. 젊음의 낭비를 한탄한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우리가 별빛임을 잊지 말라는 속삭임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스크린을 내려다보며 나는 묘하게 안도했다. 별은 길을 잃어도 빛을 잃진 않으니까. 결국 길 찾기의 핵심은 광도가 아니라 방향성, 다시 말해 ‘어디쯤에 서고 싶은가’라는 의지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휴대폰 메모장에 짧은 글귀를 적었다. “무대가 아니어도, 마이크가 없어도, 내 일상은 이미 한 곡의 노래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버스 엔진음도, 정류장 안내 방송도 나를 위한 백업 보컬처럼 뒤에서 화음을 얹어 줬다. 예전엔 소음으로만 느꼈던 도시의 숨결이, 이제는 삶의 재생 버튼을 누르는 카운트다운으로 들린다. 그래서일까, 요즘 아침마다 창문을 여는 버릇이 생겼다. 차들이 덜컹거리는 저음, 아파트 단지에서 울려 퍼지는 아이들 웃음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빵집의 오븐 알람음까지 전부 하루를 시작하는 오프닝 트랙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린다. “오늘도 다시, 비긴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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