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 거리에서 피어난 사랑과 노래들

영화 원스 포스터
영화 원스 포스터

원스 – 거리 버스킹이 만든 기적의 서곡

더블린의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오는 골목, 한 손엔 낡은 캠코더, 다른 손엔 오래된 기타를 든 존 카니 감독이 우리를 초대한다. 15만 달러라는 믿기 힘든 예산은 오히려 영화의 날것에 가까운 생동감을 부풀리는 산소가 되었다. 사람들의 동선을 통제하지 못한 거리 촬영, 상점 유리창에 비친 카메라맨의 그림자, 소음이 그대로 섞여버린 앰비언트 사운드—all of these가 의도치 않은 ‘현실의 노이즈’로 남아 작품과 관객 사이 벽을 허문다. 버스킹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남자의 목소리는 그 거리의 노이즈를 품은 채 흘러나오고, 스크린 밖 관객에게 “너도 이 자리에서 듣고 있지?”라고 속삭이며 즉시성을 부여한다. 낡은 기타 지판 위에 깊게 패인 흠집은 주인공의 지난 상처이자 앞으로 들려줄 노래의 비밀지도이고, 핸드헬드 특유의 흔들림은 두 사람의 불안한 미래를 예고하는 심장 박동이다. 수천 번 지나갔을 법한 평범한 보행자 신호등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멜로디는, 거창한 세트나 조명 없이도 한 도시의 공기를 음악으로 번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니 《원스》의 첫 몇 분은 곧 ‘창작은 거짓말을 꾸미는 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숨결을 찾는 과정’이라는 선언문이다. 익명의 관객이었던 우리는 그 선언에 서명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엔딩 크레딧이 흐를 때까지 이어질 ‘함께 걷기’에 자연스레 동참한다.

원스 – ‘Falling Slowly’가 울린 순간

재즈바도 아니고 녹음 부스도 아닌, 낮엔 손님 없는 악기점 한가운데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 앞. 남자는 주머니에서 숟가락보다 작은 카포를 꺼내 기타 헤드에 끼우고, 여자는 검은 건반 위 오랜 먼지를 손등으로 털어낸다. 그리고 느린 코드 진행 위에 맞추어 ‘Falling Slowly’가 싹이 튼다. 두 사람은 악보 대신 서로의 눈짓을 보며 박자를 맞추고, 감독은 롱테이크를 선택해 호흡 하나, 미소 한 줄도 자르지 않는다. 노래가 중반을 넘어설 때쯤, 카메라는 두 얼굴 사이의 미세한 떨림—긴장, 설렘, 망설임—을 포착하는데, 마치 우리도 건반 위에 손가락을 얹은 듯 손끝이 따뜻해진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스튜디오 버전이 아니라, 숨소리·기타 줄 잡음·피아노 페달 삑삑거림이 그대로 묻어나는 라이브 녹음이어서 더 치명적이다. 이 장면이 정적(靜的)임에도 폭발적인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만 가능했던 뉘앙스를 고스란히 기록하기 때문이다. 곡이 끝난 뒤 두 사람이 동시에 꺾어 올리는 입꼬리는 “우리 방금 마법을 만들었어”라는 무언의 확신이고, 관객이 느끼는 전율은 그 확신에 동참한 증명서다. 결국 이 장면 하나로 영화는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쥐었고, 우리에겐 평생 재생목록에서 삭제할 수 없는 4분 30초짜리 추억을 남겼다.

원스 – 음악으로만 통하는 플라토닉 사랑

《원스》가 특별한 것은 ‘사랑할까, 말까’의 흔한 서스펜스 대신 ‘사랑을 노래로 번역하면 무엇이 남는가’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지난 연인을 잊지 못한 채 런던행 버스를 꿈꾸고, 여자는 남편과 떨어져 딸을 키우며 체코어 억양을 웃음으로 숨긴다. 두 사람의 대화는 기타 코드와 피아노 화음이라는 번역기를 통과해야만 완성된다. 그래서 고백 대신 세션, 포옹 대신 녹음 버튼, 이별 대신 CD 굽기가 배치된다. ‘플라토닉’이라 부르면 어쩐지 정적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육체적 스킨십보다 더 높은 온도의 감정이 오간다. 악보 위에서만 허락된 키스, 가사 행간에 숨겨 넣은 “나도 사실은…” 같은 마음, 스튜디오 헤드폰을 나눠 끼며 공유하는 초근접 호흡이 그렇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의 무게도 잊지 않는다. 여자가 체코어로 “사랑해”를 속삭였을 때 남자가 그 뜻을 몰라버리는 장면은, 언어·국적·가정이라는 장벽을 시각화한다. 결국 그들은 서로의 삶을 고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의 꿈과 상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음악이라는 임시 거처에 잠시 머문 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플라토닉이라서 덜 뜨거운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소유욕이 빠졌기에 더 맑고 선명하다.

원스 – 끝나지 않은 위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나는 종종 재생을 멈추지 않고 화면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가만히 둔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확인하고 누군가는 물을 마시겠지만, 내 귓가엔 아직도 ‘Falling Slowly’의 마지막 코드가 울린다. 아마도 《원스》가 건넨 가장 큰 선물은 ‘삶이란 완벽하지 않아도 곡을 완주할 수 있다’는 격려일 것이다. 사랑은 모호한 형태로 스쳐 갈 수 있고, 꿈은 늘 현실에 져서 뒤차선으로 밀려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낡은 거리든 노래 한 곡 숨겨져 있고, 그 노래를 들어 줄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순간은 완벽하다. 영화 속 남자가 여인에게 피아노를 선물했듯,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를 선물할 수 있다면 이미 ‘한 곡’ 완성한 셈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어폰을 꽂고 출근길 지하철을 ‘나만의 더블린 거리’로 변주한다. 어제보다 조금 덜 흔들리고, 조금 더 크게 호흡하며. 음악이 끝나더라도, 인생이라는 롱테이크는 계속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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