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랭크 – 인형탈 뒤 천재의 딜레마
프랭크가 쓰고 있는 거대한 종이 마슈마로 머리는, 처음엔 슬랩스틱 같은 기괴함으로 관객을 자극한다. 하지만 영화가 조금씩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수록 그 거대한 가면은 코미디 소품이 아니라 생존 장치로 변모한다. 그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멜로디와 소음, 그리고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불안 사이에서 매일 전쟁을 치른다. 가면은 그 소음을 절연해 주는 방음벽이자, 세상과의 직접 충돌을 늦춰 주는 완충재다. 존이 “도대체 왜 그걸 쓰고 있죠?”라고 집요하게 물을 때마다 프랭크는 웃으며 “표정은 지금 해맑은데 눈물이 난다”라는 식의 역설적 농담을 던진다. 이는 “나는 당신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나를 설명할 수 없다”라는 간접적 선언이다.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프랭크는 메트로놈 대신 냉장고 모터 소리를 리듬 삼고, 가사 한 줄을 완성하기 위해 숲속에서 다람쥐가 낸 발자국 소리를 샘플링한다. 그의 창작법은 언뜻 천재의 실험처럼 보이지만, 실은 주변의 모든 자극을 과잉 수신하는 두뇌를 달래기 위한 ‘의식’에 가깝다. 그는 세상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통과하지 못하고 반드시 기이한 곡선으로 굴절시켜야만 순응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랭크에게 음악은 자아 표현이자 동시에 자아 보존이다. 냉정하게 말해 그의 음정은 때때로 삐걱거리고, 가사는 때로 괴상하지만, 그 결과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치열한 승리다. 존이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프랭크를 ‘불행한 천재’라는 서사에 욱여넣으려 할 때, 프랭크는 처음으로 가면 속에서 진짜 울음을 터뜨린다. 그 울음은 “천재냐 아니냐”라는 외부 규정이 아니라, “나는 나를 어떻게든 살려 내고 싶다”는 내적 필사의 사인이다. 우리는 이 씁쓸한 딜레마를 통해 천재성과 병리 사이를 섣불리 도식화하려는 관객 자신의 호기심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들여다보게 된다.
프랭크 – 밴드에 녹아들지 못한 관찰자
존의 첫 등장은 흡사 다큐멘터리 객원 리포터 같다. 그는 케이블 타이를 두른 마이크처럼 밴드의 현장을 집요하게 포착하며 “나는 지금 대단한 실험음악 집단과 협업 중”이라고 SNS에 실시간 중계한다. 하지만 ‘관찰자’로 시작한 그는 곧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피아노 코드 몇 개로 뚝딱 만든 팝스러운 멜로디를 들려주며 “이 정도면 대중도 좋아할 텐데?”라는 눈빛을 보내지만, 클라라와 나나 등 기존 멤버들은 격렬히 고개를 젓는다.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팝 그 자체가 아니라, 존이 끼어드는 방식이다. 밴드는 1도 화음을 맞추기 전부터 이미 ‘마음의 화성’을 나눠 가진 오래된 연인들처럼 호흡한다. 찌그러진 합숙집에서 프랭크가 “오늘은 냉장고를 베이스로 쓰자”라고 말하면, 클라라는 추가 설명 없이 연주를 시작하고, 바라크는 즉석에서 음향 간섭을 계산해준다. 그들은 악보 대신 서로의 눈빛으로 콘덕팅한다. 반면 존은 그 무언의 약속을 읽지 못하고 “이 곡은 몇 마디짜리야? BPM은?”을 묻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해하지 못한 세계를 ‘틀렸다’고 단정짓는 그의 태도다. 유튜브에 연습 영상을 올려 조회 수가 늘어날수록 그는 ‘내가 이 밴드를 성장시켰다’는 착각에 빠지고, 동료들의 시선은 “얘가 왜 이렇게 들떠 있지?”라는 거리감으로 돌아선다. 결국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 무대에서 존은, 프랭크가 귀로 쫓아낸 세계의 소음을 자신의 키보드로 다시 끌어오고 만다. 그 순간 밴드는 뇌파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이어폰을 나눠 끼다 볼륨 때문에 싸우는 커플처럼 산산이 깨진다. 이 장면은 예술 커뮤니티가 ‘함께 꾸는 꿈’이 아니라 ‘서로 다른 악몽의 동거’일 수도 있음을 날 선 유머로 폭로한다.
프랭크 – 음악과 정신질환, 예술의 경계
영화는 끝내 “프랭크는 무엇을 앓고 있는가?”를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스크린은 그의 피아노 건반 위를 롱테이크로 훑으며, 누군가의 정신적 굴곡이 음계라는 형태로 번역되는 과정을 시청각적 체험으로 제공한다. 현대사회가 예술가의 “비정상성”을 소비하는 방식 또한 통렬하게 묘사된다. 프랭크의 라이브 영상을 본 유튜브 댓글에는 “와 진짜 돌아이네ㅋㅋ”, “약빨고 썼냐?” 같은 조롱이 동시에 달리고, 인디 음악 포럼에서는 “이 정도면 외상 후 스트레스인가?”라며 원격 진단이 오간다. 영화는 이런 ‘온라인 정신의학 놀이’를 가만히 비추면서, 대중이 불가해한 예술성을 정신질환으로 환원시킬 때 얼마나 손쉽게 공포와 호기심을 정당화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감독은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정신질환을 천재성의 증거로 미화하지도 않는다. 프랭크의 창작 과정에는 영감의 전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밤새 이어지는 공황발작과 식은땀, 그리고 “내가 사라지면 멤버들도 사라질까?” 같은 원초적 공포가 얽혀 있다. 음악을 완성하는 것이 곧 자기 파괴의 알리바이가 되어 버리는 기이한 역학. 이때 존의 개입은 불행히도 ‘구원’이 아닌 ‘폭로’로 작동한다. 그는 미디어에 노출시키면 프랭크가 인정받을 것이라 믿지만, 프랭크에게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는 자신이 만들어 낸 작은 우주가 순식간에 붕괴되는 현상과 같다. 결국 가면은 산산이 부서지고, 프랭크는 빛보다 어두운 구석으로 달아나며 속삭인다. “내 안의 소리는 이미 너무 큰데, 더는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 영화가 던지는 이 질문은 관객의 귓가에 오래 남으며, 예술과 병리 사이에 선 인간을 함부로 규정하려는 욕망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환기한다.
프랭크 – 먹먹한 가슴
엔딩 크레딧이 흐르고 극장 불이 켜졌을 때, 머리가 아닌 가슴이 먼저 먹먹했다. 나는 프랭크의 깨진 가면 조각이 흩어진 바닥을 떠올리며,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재능 있으니까 괜찮겠지”, “예술가는 원래 좀 이상해” 같은 말들이 누군가의 생존 장치를 얼마나 가볍게 흠집 내는지 반성했다. 동시에 존의 쓸쓸한 뒷모습도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는 밴드에 들어가 ‘멋진 음악가’가 되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어쩌면 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예술은 결과물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태어나며, 그 관계를 구성하는 첫 번째 요소는 재능이 아니라 ‘존중’이라는 사실. 영화관을 나서는 길, 나는 이어폰을 끼고 있던 버릇대로 음악을 틀려다 멈췄다. 프랭크라면 지금 어떤 소리를 녹음했을까 상상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버스 정류장 앞 배수로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옆 사람 핸드폰 스피커에서 새어 나온 잡음, 늦은 밤 바람에 흔들리는 간판의 삐걱임…. 그 모든 것이 한밤의 합주로 들렸다. “음악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연주 중이며,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프랭크가 가면 속에서 속삭였을 법한 교훈이 내 밤공기를 스쳤다. 집에 돌아와 오래 열어두었던 SNS에 짧게 썼다. “오늘 들은 소리: 바람, 물, 낡은 간판, 그리고 숨. 그걸 그냥 들었다.” 좋아요는 몇 개 달리지 않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프랭크의 고독과 심연이 내 안에서 조용히 공명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 울림만으로도 충분히, 오래도록 음악처럼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