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르세폴리스 – 검은 선으로 그린 이란 현대사
1979년의 이란은 교과서 한쪽 귀퉁이에나 존재하는 먼 나라의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마르잔 사트라피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는 흑백의 간결한 선 몇 줄만으로도 복잡한 현대사를 생생히 복원한다. 영화가 택한 첫 번째 전략은 “어른의 해설을 아이의 시선으로 탈바꿈시키기”다. 마르잔의 아버지가 벽에 슬라이드를 비추며 팔레비 왕조, 영국·미국의 석유 이해관계, 이슬람 혁명, 그리고 곧이어 들이닥칠 전쟁의 계보를 설명할 때 스크린은 마치 학교 칠판처럼 보인다. 검은 배경 위에 하얀 분필선이 자리 잡고, 삐뚤빼뚤한 화살표가 시간의 흐름을 대신한다. 복잡한 국제정치도 소녀의 상상력 속에서는 노래 부르는 왕, 뚱뚱한 석유 상인, 검은 두건을 쓴 혁명가 같은 만화적 캐릭터로 바뀐다. 덕분에 관객은 “역사”라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실제로는 개인의 일상, 식탁 메뉴, 길거리 구호, 심지어 학교에서 주는 사탕 한 봉지까지도 바꿔 놓는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혁명이 성공했을 때 마르잔이 친구들과 함께 공책을 찢어머리에 두르고 승리의 춤을 추던 장면은 순수한 해방감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품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장면—학교에서 남녀가 분리되고, 체육 시간에 히잡을 쓰고 뛰어야 하며, 서구적 음악이나 옷차림이 금지되는 현실—은 “혁명 후의 삶”이 이전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역설을 보여 준다. 영화는 한 가정이 겪어야 했던 희생, 망명, 상실을 줄곧 ‘집’이라는 공간에 대비시킨다. 구식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록 음악이 끊기고, 창문마다 폭격을 막기 위한 검은 천이 달리며, 저녁마다 외출금지령이 내려져 불 꺼진 거리를 내려다보는 가족의 실루엣이 화면을 채운다. 이 모든 변화를 통해 우리는 “정치”가 결코 먼 곳의 담론이 아니며, 언제든 가정 안으로 밀려드는 쓰나미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페르세폴리스 – 마르잔의 ‘허세’가 주는 성장통
마르잔은 스스로를 ‘혁명가의 피를 이은 소녀’라 믿는다. 그래서 그는 늘 과장된 제스처와 허세 섞인 대사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든다. 10살짜리 아이가 욕실에서 “나는 체 게바라다!” 외치며 샴푸 거품을 헬멧처럼 뒤집어쓰는 장면은 귀엽고 우스꽝스럽지만 동시에 씁쓸하다. 그가 열광하던 삼촌 안우시는 결국 반정부 투쟁으로 체포·처형된다. 장례식이 끝난 뒤 마르잔은 사람들 앞에서 삼촌이 남긴 열혈투사의 유언을 읊어 보이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베개를 껴안고 오열한다. 허세는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거대한 상실을 견디게 해 주는 갑옷인 셈이다. 빈 유학길에 오른 뒤에도 그의 허세는 계속된다. 기숙사 친구들에게 이란전쟁의 ‘전격적 영웅담’을 늘어놓다가 현실적인 질문을 받으면 얼버무리고, 파티에서 만난 남학생에게 자신을 니체와 디오니소스를 동시 소환하는 급진적 예술가라 소개한다. 그러나 허세는 언제나 껍데기가 얇다. 숙소로 돌아와 혼자 침대에 엎드려 귓가를 때리는 기숙사 종소리를 들을 때, 그는 체온을 나눌 가족도, 함께 웃어 줄 친구도 없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그 외로움은 자신이 ‘근사해 보이기 위해’ 꾸며 낸 이야기들보다 훨씬 리얼하다. 급기야 그는 거리에서 마주친 홈리스에게까지 “우리 할아버지는 혁명 영웅”이라는 말을 늘어놓지만, 그 순간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는다. 허세는 자존감의 쉴드였지만 동시에 자기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다. 영화는 이 허세가 깨지는 순간, 마르잔이 진짜로 성장한다고 말한다. 가장 처절한 실패—연애의 배신, 가족의 질책, 자국에서조차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는 경험—을 겪고 난 뒤에야 그는 허세 대신 ‘솔직함’을 선택한다. 고국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그는 히잡 속에서 눈동자만 내놓은 채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번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보자.” 바로 그 결심이 이후 파리행 기차표를 스스로 끊을 수 있는 용기로 이어진다. 허세는 벗겨졌고, 남은 것은 실패의 흉터와 투명한 눈빛뿐이다.
페르세폴리스 – 흑백 애니메이션이 전하는 강렬한 감정
흑백은 제한이 아니라 해방이다. 페르세폴리스는 놀라우리만치 단순한 선과 면만으로 인물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검은 배경 위에 희고 뚜렷한 실루엣이 떠오를 때, 관객은 색의 정보 없이도 장면의 온도를 즉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폭격 사이렌이 울리며 도시 전체가 암전되는 순간, 화면은 완전한 흑으로 잠기고 휘날리는 파편과 불꽃만이 하얗게 번쩍인다. 색을 잃었기에 빛이 더욱 눈부시고, 어둠이 한층 더 깊다. 이는 곧 “모든 것이 두 갈래로 나뉘는” 혁명기의 백색·흑색 구도를 은유한다. 한편, 코믹한 장면은 동화책처럼 부드럽다. 어린 마르잔이 가방 가득 헤비메탈 카세트테이프를 숨기고 시장 골목을 종종걸음으로 빠져나올 때, 그의 발밑에는 투박한 선으로 그린 고양이들이 졸졸 따라오고, 배경의 시장 상인들은 단순화된 실루엣으로만 표현된다. 복잡한 디테일을 덜어낸 공간 덕분에 관객은 오로지 “들킬까 봐 터질 듯 뛰는 심장”에 집중하게 된다. 또한 작품은 2D 애니메이션 특유의 ‘평면성’을 능동적으로 활용한다. 전투 장면에서 탱크, 전투기, 군인이 모두 종이 인형극처럼 좌우로 슬라이드되며 지나가는데, 이는 실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압도적 공포를 전달한다. 우리는 술래잡기하듯 등장하는 전투기의 검은 그림자가 도시를 삼키는 모습을 보며, 아이의 눈높이에서 경험하는 “전쟁의 그림자”를 깨닫는다. 결국 색을 없앴기에 관객은 ‘선 하나의 변화’만으로도 인물의 감정 변주를 읽어 낸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삼촌의 미소, 눈썹 앞머리가 흔들리는 어머니의 불안, 그리고 아무 표정 없이 그대로 얼어붙은 마르잔의 얼굴까지—죄책감과 분노, 해방감과 희망이 흑백 화면 위에서 명징하게 호흡한다.
페르세폴리스 – 내 사춘기를 돌아보며
페르세폴리스를 처음 본 날, 나는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극장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자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낯선 나라의 거친 정치사, 히잡을 둘러싼 끝없는 논쟁, 유럽 유학길의 고독—모두 나와는 멀다고 생각해 왔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스크린 속 소녀의 얼굴은 내 사춘기와 겹쳐 보였다. “나는 특별해야 해”라며 허세를 부리던 모습, 서툰 연애에 허둥지둥하던 기억, 가족에게 도망치듯 내뱉은 거짓말—all black and white. 결국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성장통’의 통증 강도는 비슷하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렸다. 영화는 화려한 색채도, 기교 넘치는 3D 그래픽도 없었다. 하지만 검은 선 두어 개만으로도, 나는 이란 골목에서 울려 퍼진 반정부 구호와 파리 하늘을 가른 항공기 소음을 동시에 들었다. 흑백은 모자란 것이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을 초대하는 빈 캔버스였다. 나는 마르잔처럼 내 안의 허세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고, 또 마르잔처럼 언젠가는 과거를 웃으며 추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삶은 결국, 허세를 벗기고 남은 진짜 얼굴로 서는 용기의 연속이니까. 그리고 그 용기는, 때로는 가족의 잔소리로, 때로는 친구의 뒷모습으로, 때로는 한 편의 흑백 만화로 찾아온다. 관객이 극장을 나서는 순간, 마르잔이 손에 꼭 쥐어 준 작은 선물은 바로 그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검은 목탄 한 자루다. 세상의 색을 직접 그려 보라는 뜻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