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의 미로 – 오필리아의 세 가지 선택
오필리아에게 주어진 세 개의 관문은 단순한 판타지 퀘스트가 아니었다. 첫 번째 과제인 거대한 무화과나무 속 두꺼비와의 대결은 ‘몸 밖으로 빠져나온 공포’와 맞서는 일이었다. 뿌리를 조여 오는 두꺼비를 굴복시켜야만 엄마의 생명과 연결된 나무가 숨 쉴 수 있었고, 동시에 “엄마가 낳을 동생 때문에 나는 곧 투명해질 것”이라는 오필리아의 질투 어린 불안을 토해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두 번째 관문의 ‘눈알 괴물’은 경고의 음식 앞에서 탐욕을 이겨내라는 시험이었지만, 실제로는 배고픔과 위로에 목말랐던 아이가 눈앞의 포도를 집어 들 수밖에 없는 인간적 허기 그 자체였다. 마지막 과제는 더욱 잔혹했다. 공주의 귀환을 위해선 ‘무고한 자의 피’가 필요하다며 동생을 제물로 바치라는 조건이 던져지는데, 오필리아는 왕국의 열쇠보다 갓 태어난 동생의 온기를 택한다. 전쟁은 아이들에게 “살아남기 위해선 누군가를 희생해도 돼”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동화 속 규칙을 거스르며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군가의 안전한 품을 선택하겠다”고 외친다. 어른들의 전쟁이 철저히 강요하는 ‘더 큰 목적을 위한 희생’ 논리를 거부한 최초의 목소리, 그 목소리 덕분에 우리는 판의 미로라는 잔혹 동화 안에서도 인간다움을 확인한다. 오필리아는 피 묻은 문턱 앞에서 돌아서고, 그 순간 잔혹한 퍼즐은 산산조각 난다. 모래시계의 모래는 바닥에 쏟아지지만, 소녀는 자신이 지켜낸 생명을 안고 새벽의 숲으로 뛰어든다. 세 번의 선택 끝에 손에 남은 것은 칼도 열쇠도 아닌 작디작은 아기의 체온이었지만, 그 미미한 온기가 역설적으로 왕국의 문을 여는 핏줄이 된다.
판의 미로 – 세 개의 관문, 세 얼굴의 욕망
세 관문은 각각 식욕·권력욕·자기보존이라는 얼굴을 하고 오필리아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첫 번째 두꺼비는 무화과나무의 양분을 독차지하기 위해 배를 부풀린다. 오래된 뿌리를 틀어막고 숨통을 죄는 그 식탐은 내전으로 굶주린 마을의 그로테스크한 자화상이다. 두 번째 관문, 창백한 괴물은 온갖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도 ‘먹지 않는 것’을 존재 이유로 삼는다. 군홧발이 깔아뭉갠 테이블 위에서 포도 한 알조차 금지하는 규율은, 소녀에게조차 “배고프면 죄가 된다”는 왜곡된 권력의 룰을 강요한다. 비달 대위가 착용한 번쩍이는 시계처럼 괴물의 오쑥한 손바닥 눈동자는 권력 그 자체다. 마지막 관문의 피 의례는 생존 본능을 시험한다. 판은 “네가 왕국을 원한다면 동생의 피 몇 방울이면 충분하다”고 속삭이지만, 그 갈색 눈빛 속에는 ‘타인의 고통을 담보로 한 구원’이라는 모순이 번뜩인다. 흥미로운 점은, 오필리아가 세 욕망 모두를 완벽히 꺾지 못했음에도 결국 문을 통과한다는 사실이다. 두꺼비에게 먹이를 던질 때 그녀는 역겨움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돌을 집어 넣는 과감함을 보인다. 괴물 앞에선 포도 송이를 들었다가 안면이 흙빛으로 질리도록 달아나며, 피 의례 앞에서는 칼을 내려놓는다. ‘완전무결한 순결’이 아니라 실수와 공포, 동요가 뒤섞인 인간다운 결핍이 오히려 진짜 열쇠였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욕망과 공포를 통해 성장한다”는 냉혹한 진실을, 어린 소녀의 떨리는 손끝으로 또렷하게 새긴다. 그러니 피투성이 관문들은 사실 ‘통과하기 위한 장애물’이 아니라, 공주가 되기 위해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마음속 그림자였던 셈이다.
판의 미로 – 마법과 희생이 교차하는 엔딩
엔딩은 두 세계가 섞여 흐릿해진 경계 위에서 극적으로 맞물린다. 비달 대위의 총구에서 뿜어진 화약 냄새가 밤공기를 가르자, 오필리아의 피는 거울 물결처럼 미로 바닥에 번진다. 물 위의 달빛 같은 핏방울은 마지막 관문 대신 스스로의 목숨을 올리는 비극적인 ‘자기 헌혈 의식’이 된다. 판타지 시점에서 보면, 그녀는 동생을 살리고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무고한 피는 흘릴 수 없다”는 왕국의 오래된 법을 완수한다. 현실 시점에서 보면, 아이는 야만의 폭력에 무참히 스러진 또 하나의 민간인 희생자다. 그러나 영화는 둘 사이 어느 쪽도 버리지 않는다. 피가 스며든 돌판 위에서 하늘로 치솟는 황금빛 계단이 열리고, 망각 속에 갇힌 공주를 기다리던 왕과 왕비가 “지혜로운 선택이었다”고 환영한다. 동시에 비달이 품 안의 시계를 꺼내며 “아들은 지켜라”라는 마지막 당부를 내뱉는 장면은, 현실이 결코 동화로 덮이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오필리아의 죽음 이후에도 총성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트럭빛 사이렌은 또 다른 비명을 싣고 달릴 것이다. 그럼에도 델 토로가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낭만적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는 ‘순진한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를 고발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의 윤리를 끝까지 지킨 개인’에게 한 줌의 구원은 허락한다. 마지막 캡션처럼 “오필리아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문장은, 가혹한 현실을 마주한 관객에게 주어진 마지막 위로이자 질문이다. 정말로 그녀는 행복해졌을까? 행복해졌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폭력 앞에서 순백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되묻게 된다.
판의 미로를 다시 보고..
〈판의 미로〉를 다시 꺼낸 날, 나는 스스로를 속이는 작은 관행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하지 않으면 뒤처질 거야”라는 두려움에 떠밀려 억지 웃음을 지은 순간, 타인의 고충을 ‘그럴 수도 있지’라며 빠르게 소비해 버린 순간, 불합리한 규칙 앞에서 “애써봤자 달라질 게 있나”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린 순간…. 오필리아가 미로 속에서 칼을 움켜쥐던 떨림이 내 손끝에도 번졌다. 그녀처럼 용감해지고 싶었지만, 내 일상에서 두꺼비가 삼킨 뿌리를 흔들 만큼 강단 있게 행동한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영화가 끝나자 잠시 화면이 검어졌다가, 지하궁전의 붉은 융단 대신 컴퓨터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화면 한가운데 떠 있는 여러 개의 폴더가 문득 관문처럼 보였다. 불평만 늘어놓으며 미뤄 둔 과제가 있을 때마다 나는 포도송이를 만지작거리는 어린 소녀처럼 망설여 왔던 것 같다. 결국 블로그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했으며,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솔직히 적어 보기. 그리고 다짐한다. 앞으로 현실이 괴물처럼 문 앞에 앉아 있어도, 최소한 내 손으로 만든 규칙만큼은 내가 부순다는 핑계로 휘두르지 않겠다고. 세상이 부당할수록, 내 식탁 한가운데에 놓인 포도는 더욱 유혹적이겠지만, 그 열매를 따야 할 때와 내려놓아야 할 때를 스스로 결정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다. 오필리아가 증명했듯, 진짜 마법은 금지된 과일을 참는 데 있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내 피를 조금 내줄 수 있는 용기에 있다. 그러니 미로가 또다시 펼쳐지더라도 이번엔 조금 덜 떨리는 손으로, 그러나 훨씬 단호한 걸음으로 관문 앞에 설 준비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