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루엘라 – 패션 반역의 서막
에스텔라가 처음 런던 거리를 전력질주하며 경찰차를 따돌릴 때부터 영화는 관객에게 “이건 단순한 소녀 성장담이 아니다”라고 속삭인다. 스스로를 ‘문제아’라 명명한 아이는 한밤중 백화점 창문을 닦으면서도 머릿속에선 천 폴더짜리 스케치북을 펼쳐 놓는다. 그리고 참다 못해 진열장을 뒤엎고 마네킹에게 제 스카프를 둘러주는 순간, 억눌려 있던 창의성이 파열음과 함께 터져 나온다. 그 장면에서 나는 오래전 미술 시간에 검은 잉크가 종이 위를 순식간에 번지던 기억을 떠올렸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욕망이 허락받지 못한 캔버스를 만났을 때 생기는 반짝임, 바로 그것이 ‘패션 반역의 서막’이다. 영화 속 크루엘라는 자신을 걷어준 잔재주 좋은 소매치기 콤비와 함께 런던 골목을 배경으로 연습게임을 치르다가 바론니스라는 거대 보스전 앞에 서자 주저 없이 레벨업을 시도한다. 그 과정은 범죄와 예술, 생존과 장식 사이에 던져진 롤러코스터 같다. 가짜 명함 한 장, 실드가 되어줄 친구 둘, 그리고 엄마의 유산인 목걸이 하나. 가진 것은 초라하지만 “드레스는 칼보다 날카롭다”는 신념이 캐릭터를 고양시키고 현실을 베어낸다. 나는 바로 그 대목에서 박수를 쳤다. 밑바닥에서 출발한 청춘이 ‘잘 꾸며진 난장판’을 통해 세계를 뒤엎는 서사는 언제나 짜릿하고, 그 짜릿함을 궁극의 비주얼로 흩뿌려 주는 작품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패션쇼장을 급습한 크루엘라의 쓰레기 트럭이 하이패션을 쏟아내는 슬랩스틱은 ‘판을 엎을지언정 스타일은 지킨다’는 선언문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관객석의 나 역시 허름한 청바지에 커피 얼룩을 묻게 놔두었던 지난 아침을 속으로 반성했다. 이렇게 영화는 70년대 런던이라는 도시와 투닥거리며 자기 피부를 찢어 새로운 무늬를 새기는 한 젊은 예술가의 발악을, 대담하고 경쾌한 범죄극으로 치환한다. 이 서막이 없었다면 이후 이어질 모든 광란의 퍼포먼스는 공허했을 것이다. 결국 크루엘라가 창조한 패션 반란은 단순한 의상 쇼가 아니라, ‘이 도시가 정해준 규칙 따윈 구겨 넣어버리겠다’는 선언,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꺼내는 출사표였다.
크루엘라 – 빌런인가 히어로인가
크루엘라를 바라보며 가장 많이 떠오른 질문은 ‘도대체 이 여자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였다. 창문 진열장을 망가뜨리고 달마시안을 납치하고 바론니스를 정신적 지옥으로 몰아넣는 행위만 보면 명백한 빌런이다. 그러나 그녀의 범죄는 권력자가 휘두른 폭력에 대한 응답이자 자신이 빼앗긴 것들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모순을 흑백 머리카락처럼 선명하게 갈라놓지 않는다. 대신 에스텔라와 크루엘라라는 두 이름을 번갈아 들려주며 ‘나쁜 짓을 해야만 살아남는 시대에, 선량함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관객인 나 역시 극장 의자에 몸을 파묻고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건넸다. 과연 나는 인생의 바론니스를 만났을 때 법과 도덕의 틀 안에서만 승부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다 타버리면 그 위에 새로 짓지 뭐’라고 웃으며 성냥을 긋게 될까?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확답을 미루는 대신, 크루엘라가 선택한 방식이 그녀 스스로에겐 해방이자 창조 행위였다는 사실을 집요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남의 디자인을 가로채 온 바론니스가 결국 나방 떼에게 온통 먹혀 버릴 때, 관객은 통쾌함과 동시에 묘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것은 누군가의 패배가 곧 다른 누군가의 생존이 되는 냉혹한 시스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 순간 크루엘라는 ‘히어로도 빌런도 아닌 제3의 존재, 즉 살아남기 위해 틈새를 파고드는 생존 예술가’라는 위치에 자리 잡는다. 그녀의 칼끝은 명백히 타인을 향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끊어내는 도려냄이기도 하다. 나는 이 복잡한 윤리적 퍼즐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완벽한 구원 서사도, 고전적인 몰락 서사도 아닌 회색빛 서사 속에서 관객은 마음껏 동조했다가 멈칫하고, 손뼉 쳤다가 주춤한다. 그리고 그 감정의 리듬은 현실에서 우리가 매일 겪는 윤리적 줄타기와 묘하게 닮아 있다. 결국 ‘빌런인가 히어로인가’라는 질문은 크루엘라에게 던지는 화살이 아니라 관객 자신에게 돌아오는 부메랑이다.
크루엘라 – 글램록이 흐르는 런던의 밤
‘글램록이 흐르는 런던의 밤’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스톤즈의 베이스 라인과 함께 광택이 번쩍이는 가죽 재킷, 스팽글이 박힌 미니드레스, 그리고 네온사인처럼 번쩍이는 노란 머리카락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70년대 펑크 클럽 앞에 줄 선 젊은이들 사이를 에스텔라가 질주할 때, 배경음으로 흐르는 곡은 ‘These Boots Are Made for Walkin’’. 그 순간 관객은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도 런던 소호 뒷골목의 담배 냄새와 젖은 돌길 느낌을 동시에 맡는다. 나는 특히 크루엘라가 쓰레기 트럭으로 무도회장에 난입하는 장면에서, 마치 데이비드 보위가 무대 위에서 인간과 외계인의 경계를 해체하던 퍼포먼스를 연상했다. 바론니스의 고급스러운 실크 드레스가 클래식 오케스트라라면, 크루엘라의 분리수거 봉투 재킷은 볼륨을 끝까지 올린 기타 솔로다. 그리고 이 기타 솔로는 기꺼이 불협화음을 선택함으로써 무도회의 귀를 아찔하게 뒤흔든다. 패션과 음악, 조명과 세트, 카메라 움직임까지 하나의 거대한 콘서트처럼 싱크가 맞춰지는 시퀀스의 쾌감은 극장에서만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특권처럼 느껴졌다. 영화는 세련된 복고성으로 관객을 유혹하되, 회상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매시업을 시도한다. 남작부인의 전통적인 ‘뉴 룩’ 실루엣과 크루엘라의 해체주의적 드레스가 한 프레임 안에서 충돌할 때, 나는 런던 템즈 강변의 오래된 창고 벽에 스프레이로 그려진 그래피티 위에 누군가 다시금 오일 파스텔로 그림을 덧칠하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이렇듯 영화는 과거의 미감을 빌려와 현재적 에너지로 리믹스하고, 그 에너지는 관객의 귀에 눈에 피부에 물결처럼 퍼진다. 나 역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의자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이어폰으로는 결코 재현되지 않을 음압과 색채의 파도 때문에, 몸이 마치 한밤의 클럽 플로어처럼 뜨겁게 달궈져 있었기 때문이다.
크루엘라 – 내가 갖고 있는 반반 머리는 무엇일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평범한 블랙 코트 안에 숨겨 놓은 나만의 ‘반반 머리’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을 드러낼 용기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 크루엘라가 결국 말하고 싶었던 건 ‘대담하게 살아라’라는 교훈보다도 ‘너 안에 이미 존재하는 광기를 부끄러워하지 마라’였던 것 같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바론니스를 마주한다. 사내 메신저의 익명 피드백, 부모님의 기대치, 내가 스스로에게 씌운 안전벨트. 그때마다 조금씩 에스텔라는 움츠러들고 크루엘라는 속삭인다. “창문을 깨뜨려. 그리고 네 식대로 다시 배치해.” 영화관 불이 켜진 뒤에도 그 목소리는 귓가에 머물렀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오래된 셔츠 하나를 꺼내 과감히 등판을 잘라내고, 나비 스탠실을 찍어 보았다. 물론 누군가 보면 ‘옷을 망쳤다’고 할 테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 역시 런던 골목 한복판에서 스팽글 드레스를 휘날리며 웃고 있는 듯했다. 좋은 영화는 스토리를 넘어서 감정을 행동으로 번역해 준다. 크루엘라는 그 점에서 꽤나 영리한 연금술사다. 머리색을 반으로 가르고 세상을 흑백으로 분할하는 대신, 흑과 백 사이 무수한 회색을 질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영화의 첫 장면을 떠올려 본다. 비에 젖은 거리, 붉은 가로등, 어린 에스텔라가 삼킨 눈물. 그 빛과 어둠이 섞이면서 태어난 것이 크루엘라라면, 우리 역시 각자의 밤에서 무언가를 길러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다음 번 퇴근길에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롤링 스톤스를 최대 볼륨으로 틀어 보자. 템즈가 아니라 한강이라도 상관없다. 도시의 불빛이 물결에 흔들릴 때, 당신 안의 크루엘라가 살며시 눈을 뜰지도 모른다. 그때 필요한 것은 대단한 재능도, 거창한 복수 상대도 아니다. 그냥 세상이 마련해 둔 진열장을 살짝 어긋나게 배치하는 용기, 그리고 그 틈으로 흘러나오는 당신만의 색깔이다. 영화가 트윅멘트를 남기며 끝난 것처럼, 우리 삶에도 다음 편이 준비되어 있음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