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여름 시계의 멈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포스터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포스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시계가 멈춘 듯한 여름의 시간

라디오 옆에 놓인 낡은 회중시계, 그리고 끊임없이 그것을 흘깃거리던 열일곱 엘리오의 눈길은 내내 나를 긴장시키곤 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은 ‘이 소년은 무엇을 그토록 기다릴까’라는 물음표와 함께 어느 이탈리아 북부의 숨 막힐 만큼 푸른 여름 속으로 던져진다. 올리버가 등장하기 전, 시간은 엘리오에게 마치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굴욕적인 속도를 강요한다. 낮잠이 끝나고도 해가 중천인데, 체온을 식혀줄 그늘은 아직 멀어 보인다. 그런데 택시에서 하늘색 셔츠 차림으로 키가 훤칠한 미국인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영화 속 모든 시계바늘은 엘리오의 심장 박동과 똑같은 속도로 고동치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연구를 돕기 위해 별장에 머무는 대학원생이라는 소개는 그저 장치일 뿐, 관객이 느끼는 것은 ‘시간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촉각적 실감이다. 하지만 시계가 돌기만 하는 건 아니다. 엘리오가 수영장에서 마르치아와 입맞춤을 나누면서도 팔목시계를 확인하고,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도 시선을 피아노 위 시계로 슬쩍 돌리는 장면들은 오히려 ‘정지’에 가깝다. 첫사랑이 찾아오면 누구나 겪는 아이러니—모든 순간이 벼락같이 빠른데 동시에 고요히 멈춰버리는 체험—을 영화는 시계라는 소도구 하나로 관통한다. 뜨겁게 달궈진 별장 다락방의 먼지 냄새,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 발뒤꿈치에 스치는 흙먼지까지 모두 시간이 남긴 느린 잔향처럼 화면에 머문다. 그렇게 한 여름 내내 흐르던 배터리 없는 시계는 결국 두 사람이 “call me by your name”이라고 속삭이는 순간, 더는 현재도 과거도 아닌 영원으로 바뀐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호숫가에서 수영한 뒤 잔디밭에 누워 숨을 고르던 그 정오, 우리 각자의 기억 속 첫사랑 또한 조용히 시간을 멈추고 있었음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아버지의 명대사와 성장의 순간

영화를 본 뒤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대사는 엘리오 아버지, 페를먼 교수가 벽난로 앞에서 들려준 그 유명한 조언이다. “우리가 느낀 것들을 다 느끼지도 못한 채, 스스로를 무디게 만들지 말아라.” 사랑에 다가갈 때마다 겁에 질려 싹을 잘라버리는 버릇을 가진 우리에게, 중년의 학자는 “상처받더라도 그 감정을 다 누려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 대사는 단순한 조언을 넘어 엘리오를 일순간에 소년에서 청년으로 밀어 올리는 성장의 추동력이다. 영화 내내 지적인 농담과 고고학적 수사를 구사하며 ‘어른’인 척하던 엘리오에게도 사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어쩌면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과연 진짜일까?’라는 의심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은 그 의심을 ‘확신’으로 치환시킨다. 감정을 억제하지 말고, 그 눈부신 고통까지도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엘리오뿐 아니라 스크린 앞 관객에게도 통렬하다. 부모 세대가 자녀에게 건네는 이해와 지지는 흔히 ‘조건부’이거나 ‘교훈적’이기 십상인데, 페를먼 교수는 그 모든 관습을 뛰어넘어 감정의 주권을 아들에게 되돌려 준다. 덕분에 우리는 ‘좋은 부모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명제를 복잡하게 논하기 전에, 우선 내 아이(혹은 내 어린 시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시선의 온기에 대해 생각한다. 엘리오는 그날 이후 결코 이전의 아이가 아니다. 올리버와 함께한 단열된 한 계절이 지나고 나면, 그는 언젠가 삶의 어떤 모퉁이에서 다시 한번 불시에 자신의 심장을 꺼내야 할 것이고, 그때 그는 주저 없이 뛰게 될 것이다. 엘리오에게서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는 다짐이 들리지 않더라도, 그의 깊어진 눈빛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이 장면은 모든 성장영화가 꿈꾸는 이상적인 ‘통과 의례’를 가장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방식으로 구현해 낸, 한 편의 소우주 같은 순간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엔딩 장면이 남긴 불멸의 잔상

벽난로 불길이 타닥대는 소리, 반투명한 눈물, 그리고 수프얀 스티븐스의 목소리가 겨울 어스름을 가득 채우는 엔딩 시퀀스는 ‘영화는 시간이 멈춘 그림’이라는 말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크레마의 눈 내리는 겨울, 가족은 모두 성탄절 준비로 분주하지만 카메라는 엘리오의 얼굴에만 초점을 맞춘다. 스크린 속 엘리오는, 스크린 밖 우리의 시선 한가운데서 네 분 남짓—그러나 체감상 영원을—불꽃을 응시한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그 긴 침묵이 어색해 목이 타들었고, 두 번째는 그 차가운 공기 사이로 피어오르는 불빛에 함께 녹아내렸으며, 세 번째 관람부터는 오히려 ‘꺼지지 못하는 불’의 위로를 느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은 이 영화가, 마지막 장면에서야 관객에게 사랑을 정의해 주는 셈이다. 그것은 잔혹하게도 아름다워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름을 부르며 눈물짓게 만든다. 엔딩 직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올리버의 “나 결혼해”라는 짧은 통보는 엘리오의 심장을 찢는 칼날이지만,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받아들임과 축복, 그리고 자신이 겪어 낸 모든 감정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난다. 불길이 이윽고 잦아들 때, 카메라는 슬며시 눈높이를 낮춰 우리와 엘리오의 시선을 맞춘다. 그 순간 관객은 벽을 사이에 둔 이방인이 아니라, 여름의 비밀을 공유한 단 한 명의 동료가 된다. 결국 영화가 말하려던 것은 ‘사랑이 이루어졌냐 아니냐’가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어떤 존재로 변화시켰는가’라는 질문이었음을, 엔딩은 뜨거운 침묵으로 웅변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영화가 건네 준 선물

불이 켜졌을 때, 내 손목시계 초침 소리가 낯설 만큼 선명하게 들렸다. 두 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 동안 나는 엘리오의 시계처럼 멈춰 있었던 셈이다. 첫사랑의 달콤함도, 끝자락의 쓰라림도 이미 오래전에 겪어 봤건만, 왜 그의 눈물을 보며 내 뺨까지 뜨거워졌을까 곱씹다가 문득 깨달았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법, 상처를 최소화하는 법, 기대치를 낮추고 체면을 지키는 법에는 익숙해졌지만, 정작 ‘심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연습은 잊고 살았다. 영화가 들려준 메시지는 거창하지 않다. “지금 느껴지는 그 온도를 속수무책으로 껴안아라.” 좋아함과 두려움, 설렘과 불안, 기쁨과 고통이 한데 뒤엉켜야 비로소 사랑이라는 이름을 얻는다는 진리는, 슬프게도 나이를 먹는다고 자동으로 얻어지는 지혜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첫사랑 영화이되, 동시에 첫사랑을 통과해 온 모든 이들의 영화다. 누군가는 끝내 부르지 못한 이름을 떠올릴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직 시작하지 못한 사랑을 위해 손목시계를 풀어 놓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한때 너무 뜨거워 두려웠던 기억들을 다시 만져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중에’라고 말하다 흘려보낸 수많은 가능성에도, ‘지금’이라고 선언하면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극장을 나서는 길, 겨울 공기에 볼이 얼얼했지만 마음 한편은 묘하게 따뜻했다. 어쩌면 이 영화가 건넨 가장 큰 선물은, 시계뿐 아니라 내 안의 두근거림마저 다시 태엽을 감아 준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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