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 – 시간의 궤적을 거슬러 안아 주는 영화

영화 컨택트 포스터
영화 컨택트 포스터

컨택트 – 시간의 고리를 잇다

테드 창의 원작에서 시작된 루이스 박사의 여정은 영화로 옮겨오며 “미래를 기억한다”는 역설적 명제를 한층 더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우리는 보통 시간을 일직선의 레일처럼 생각한다. 과거는 발아래서 멀어지고 현재는 찰나로 스쳐 가며 미래는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 속에 숨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헤타포드가 건네준 동그란 문장은 이 관습을 산산이 깨뜨린다. 처음 안개 너머 그들의 글씨를 보았을 때, 그 원형들은 마치 태초부터 우주에 새겨졌던 시간의 지도 같았다. 출발점과 도착점이 동시에 존재하고, 표면 위를 돌다 보면 어느새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고리. 루이스가 그 문자를 “읽는다”기보다 “얻어낸다”는 느낌을 준 이유는 그게 곧 그녀의 두뇌 속 시간 감각을 재편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 언어가 줄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만 의미가 생긴다면, 헤타포드어는 모든 의미가 한순간에 피어나 한 번에 만개한다. 그래서 영화 속 루이스는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사건을 끊임없이 넘나든다. 그 움직임은 순행(順行)도, 역행(逆行)도 아닌 “동시행(同時行)”이다. 그녀가 놀랍게도 딸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기꺼이 아이를 품에 안기로 결정하는 순간, 시간은 더 이상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는 폭군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완성해 가는 거대한 이야기책이 된다. 현재에서 출발한 선택이 미래를 만들고, 미래에서 건너온 기억이 현재를 견인하며, 과거에 남긴 상처는 그녀를 다시 앞으로 밀어낸다. 영화는 그 복잡한 연쇄를 담담히 보여 주면서 묻는다. “만약 너도 시간의 고리를 손에 쥘 수 있다면, 매 순간을 어떻게 살아내겠니?” 우리가 루이스에게 깊이 몰입하는 순간은, 그녀가 시간의 낯선 질서를 받아들이되, 결국 인간답게 떨리는 선택을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운명이 빗겨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택한다. 그 사랑이 불가피한 상실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아도, 우리는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영화는 그 간단하고도 거대한 진실을, 동그란 문장의 영원한 회전 속에 새겨 놓는다.

컨택트 – 과학이 된 운명, 운명이 된 과학

루이스가 마침내 헤타포드의 언어 체계를 해독했을 때, 군幕 뒤에 숨은 세계 각국의 장성들은 “무기(Weapon)냐 선물(Tool)이냐”라는 섬뜩한 번역어에 매달린다. 여기에는 인류가 과학을 바라보는 오래된 습관이 그대로 묻어난다. 과학은 언제나 “쓸모”와 “위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 왔기 때문이다. 핵분열이 발전소의 터빈을 돌리기도, 히로시마의 하늘을 갈라놓기도 했던 역사가 그 증거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날카로운 역설은 그 과학적 성취가 결국 운명론으로 귀결된다는 데 있다. 헤타포드어는 페르마의 최단 시간 원리, 해밀턴의 최소 작용 원리를 언어화한 체계다. 즉, 물리학이 마침내 도달한 “우주는 최적의 경로를 스스로 찾는다”는 인식이 문자로 구현된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헤타포드어를 배우는 순간, 과학은 더 이상 세상을 예측·조작하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이미 완성된 고리를 읽어 내려가는 낭독법”이 된다. 루이스는 자기 연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과학자의 메모리엄이 아닌 예언자의 비전 속에 서 있었다. 아이를 얻고 잃을 운명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는, 그녀가 순수한 호기심으로 출발한 연구 끝에서 “나는 이미 답이 쓰여 있는 페이지를 차례로 펼치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과학과 운명은 거울처럼 포개진다. 우리는 연구를 통해 자연 법칙을 ‘발견’한다고 믿지만, 실은 법칙이 우리 안으로 걸어 들어와 “이 페이지도 읽어 보렴” 하고 속삭이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과학의 논리와 운명의 시(詩)가 대립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헤타포드가 3,000년 뒤의 위기를 대비해 지식을 전수하는 일은, 일종의 장대한 피드백 루프다. 우리가 미래에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과거(=현재)의 우리를 먼저 구원했기 때문이다. 가장 진보한 과학적 통찰이 가장 오래된 운명론적 세계관과 손을 맞잡는 순간, 인류는 새삼스레 겸허함을 배운다. “모른다”는 고백이 진정한 지식의 시작이라면, “피할 수 없다”는 수긍은 어쩌면 진정한 자유의 서막일지도 모른다.

컨택트 – 이제 우리의 언어를 묻는다

한글 자모를 ‘ㄱ, ㄴ, ㄷ…’ 순서로 외우며 자란 우리에게 헤타포드의 잉크 원은 충격적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퍼져 나가는 먹빛 곡선이 “이게 문장이다”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묻는다. “어디서부터 읽어야 하지?” 하지만 그 당혹감은 곧 부끄러움으로 바뀐다. 고작 7천여 개 단어를 얽어 하루를 말하고 쓰는 인간 언어가 우주 전체를 담아낼 그릇이라고 믿어 온 건 아닐까? 사피어-워프 가설이 옳든 그르든, 최소한 영화는 우리에게 “당신의 인식은 당신의 어휘량만큼만 확장된다”는 불편한 거울을 들이민다. 루이스가 어린 시절의 추억과 장래의 장례식을 한 호흡에 떠올릴 수 있었던 건, 헤타포드어가 시간 개념 자체를 ‘분절’이 아닌 ‘포용’으로 체계화했기 때문이다. 동그란 문장에는 동사 변화가 없다. 과거 완료도, 미래 진행도 없다. 모든 행위와 상태가 한눈에 담긴다. 관객이 이 문장을 처음 목격할 때 느끼는 시각적 카타르시스는 사실 언어철학적 경종이다. 우리 언어의 선형(線形) 구조가 무심코 폐기해 버린 수많은 가능성—동시다발적 정서, 복합적 시제, 다차원적 관계—가 원형 안에 녹아 있다. 그러자 익숙한 의문이 솟아오른다. “외계인과 소통할 ‘공통 언어’는 결국 수학뿐일까?” 루이스의 대답은 ‘아니오’다. 가장 고차원적인 과학법칙을 녹여낸 헤타포드어 역시 근본적으로는 ‘감정’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예감하되 기꺼이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 타인의 두려움에 공감하며 손을 내미는 다정함이 그 문자에 실려 있다. 언어는 그래서 단순한 정보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건너가는 윤리적 태도다. 영화가 끝난 뒤, 우리는 말한다. “우리가 속사포 뉴스 클릭과 혐오 댓글로 점철된 언어를 하루 만개 찍어내는 동안, 과연 어느 문장으로 서로를 구원했을까?” 헤타포드가 떠난 빈 하늘은 거울처럼 우리 혀를 비춘다. 이제 남은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어떤 언어로 내일을 만들 것인가.”

컨택트 – 끝을 알고도 맞이하는 것

상영이 끝나고 불이 켜진 뒤에도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이 떠나간 객석엔 잔향처럼 물비린내가 남아 있었고, 나는 그 습기를 기다랗게 들이마셨다. “시간이 고리라면, 나는 어디쯤 서 있을까?”—문득 허무와 안도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열두 살 한나의 죽음을 예측할 힘이 내겐 없지만, 내 하루 역시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만큼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선택이다. 빤히 보이는 상실 때문에 아예 사랑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상실을 포함해서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루이스는 두말없이 후자를 택했고, 그 결심이야말로 영화가 남긴 가장 강력한 교훈이었다. 귀가 길, 나는 집 앞 은행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푸른 잎이 무성했지만 머지않아 노랗게 물들 것이다. 그 과정 전체를 미리 안다 해도—낙엽이 쓸려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알게 된다 해도—나는 오늘 그 잎사귀들을 애써 외면하지 않을 거다. 오히려 더 오래 바라보고, 더 자주 손을 흔들어 줄 것이다. 영화 속 헤타포드 문장처럼, 사랑도 시작과 끝이 딱 맞물린 원이라면, 언젠가 헤어질 것을 알기에 더욱 진하게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루이스의 속삭임이 귓가를 떠돈다. “despite knowing the journey and where it leads….” 그렇다. 여정을 알고, 종착지를 알면서도 우리는 기꺼이 걸음을 내딛는다. 그것이 인간이 시간을 살아내는 방식, 그리고 결국 시간을 품에 안아 주는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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