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지울 수 없는 우리

영화 이터널 선샤인 포스터
영화 이터널 선샤인 포스터

이터널 선샤인 – 기억삭제라는 파란 약속

클레멘타인이 머리를 파란색으로 염색하고 라쿠나(Lacuna) 사의 코발트빛 서류봉투에 사인을 남기던 순간, 그녀는 단순히 ‘전 남친의 흔적’을 지워 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그 파란 약속서는 감정의 제로화를 향한 선언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지울 수 없는 순간’을 버튼 한 번으로 삭제할 수 있다면, 과연 우리는 더 건강해질까? 영화는 이 질문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라쿠나사는 분실물 보관소처럼 조엘의 낡은 스웨터, 찢긴 엽서, 거칠게 접힌 편지들을 수거해 간다. 회사 직원들은 밝은 전구 아래서 초고속 스캐너로 기억 지도를 작성하며, 그 장면은 어딘가 현대인의 데이터 백업 절차와 닮았다. ‘킬 스위치’만 누르면 눈물, 후회, 향수까지 싹 사라질 거라는 이 매혹적인 프로세스는 사실 조엘과 클레멘타인에게 ‘안전장치’를 부여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 관계의 자연사를 가로막는 위협이 된다. 기억은 고통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고통을 감싸 주는 진통제이기도 하다. “아프니까 잊어 버리자”는 그들의 파란 약속은 역설적으로 상실의 통증을 연장시키는 마취제다. 라쿠나의 기계를 통과하지 않았다면 조엘은 몬톡행 기차를 타지도, 얼어붙은 호수 한복판에 누워 하늘에 균열을 그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기억을 잘라낸 자리에는 공백이 아닌 ‘본능’이 스며든다. 삭제 의뢰서를 낸 순간부터 두 사람은 이미 다시 끌려갈 준비를 끝내 버린 셈이다. 결국 파란 약속이 가리킨 곳은 완벽한 백지장이 아니라, 더 깊은 수정을 요구하는 미완성 원고였다.

이터널 선샤인 – 잘려나간 필름 속 첫사랑

조엘의 의식 하드드라이브를 뒤져 보면, 클레멘타인의 얼굴은 무수한 스틸 컷으로 흩어져 있다. 다정하던 찰스강의 별빛, 새벽 3시 술 냄새가 섞여 있던 그녀의 숨결, 벼룩시장에서 던져진 독설의 파열음까지. 작업자 스탠과 패트릭이 메모리를 ‘가위질’할 때, 우리는 한 편의 러브스토리가 어떻게 실시간으로 디졸브(dissolve)되는지를 목격한다. 흥미로운 건 삭제 순서다. 라쿠나는 가장 최근의 상처부터 지우기 시작해 연애 초창기의 황홀로 거꾸로 내려간다. 덕분에 관객은 만남→연애→파국이라는 전형적 구조 대신 ‘파국→연애→만남’의 반(反)연대기를 따라간다. 이 잘려나간 필름들은 클레멘타인의 머리색과 함께 조엘의 신경회로를 물 들인다. 빨강이었던 그녀가 오렌지로, 다시 파랑으로 바뀔수록 필름은 뜨거운 오버 익스포저에서 차디찬 암청색 그레인으로 변주된다. 삭제가 진행될수록 조엘은 영화 속 엑스트라처럼 관망하다가, 어느 순간 편집실로 뛰어들어 필름 릴을 빼앗아 달아난다. 그는 기억의 파편을 한데 붙여 ‘자체 감독판’을 만들려 하지만, 이미 컷은 크게 잘려 나간 상태. 그러자 조엘이 시도한 방법은 뜻밖에도 “주 장면을 외부로 밀반출” 하는 일이다. 어린 시절 크랩스 게임판 속, 비 오는 주차장, 낡은 부엌 등 그녀와 무관했던 기억 공간으로 도피시키는 ‘루프홀 편집’이 그것이다. 가혹한 애프터 이펙트(After Effect)로 왜곡된 추억들은 결국 완전히 증발해 버리지만, 필름의 긁힌 잔상처럼 남은 잉크 자국이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만든다. 첫사랑의 원본은 유실됐어도, 스크래치 한 줄기만으로도 재생 버튼은 눌러진다—이것이 ‘잘려나간 필름’이 가진 집요함이다.

이터널 선샤인 – 기억 VS 본능, 바닷가의 선택

발렌타인데이 새벽, 조엘은 눈을 뜨자마자 알 수 없는 허전함에 휩싸여 있다. 삭제된 기억들은 고통을 없앴지만 방향 감각도 함께 앗아가 버렸다. 그는 낯선 충동에 이끌려 출근길을 포기하고 몬톡행 기차를 탄다. 산뜻한 털모자를 눌러쓴 그의 옆자리에, 오렌지색 후드를 쓴 클레멘타인이 “지금 내 머리색이 뭔 줄 아시나요?”라며 불쑥 말을 건넨다.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처음 만났지만, 카페에서도, 플랫폼에서도, 심지어 파도 위 하얀 포말 속에서도 서로를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라 느낀다. 이때 작동하는 것이 바로 ‘본능’이다. 기억이 지워지자 자석처럼 남은 건 촉(觸)이다. 과학자들이 조엘 뇌에서 삭제 버튼을 눌렀어도 정서적 피부말단, 후각, 미세한 근육기억까지 초기화할 기술은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조엘은 자신의 일기장을 보고 “2년 만에 다시 쓰다니”라고 착각하고, 클레멘타인은 오렌지색 머리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면서도 ‘탄저린’이라는 호명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가슴이 쪼여 온다. 영화가 묻는다: “우리는 기억으로 사랑하나, 아니면 본능으로 사랑하나?” 바닷가 장면은 그 시험대다. 조엘은 “이 관계도 결국 끝날 거야”라는 테이프 속 예언을 들었음에도 클레멘타인이 파도 끝을 향해 뛰면 뒤따라간다. 본능은 기억의 회로보다 깊은 층위에 깔린 서브루틴이다. 삭제를 피해 살아남은 이 본능이 시간의 선로를 다시 연결하고, 얼음 위 단둘이 누울 수 있는 용기를 건네준다. 그래서 그들의 대사는 ‘괜찮아(OK)’ 한마디면 충분했다. 기억의 잉크가 모두 말라버린 상황에서도 본능은 새로운 무늬를 새긴다. 어쩌면 사랑이란, 완벽히 잊고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종류의 불멸일지 모른다.

이터널 선샤인 – 기억이란 뭘까?

처음 이터널 선샤인을 봤을 때, 나는 헤어진 지 몇 달 되지 않은 상태였다. “기억이란 것을 지울 수 있다면?”이라는 영화의 가설이 그때의 나에게는 거의 구원의 기술처럼 들렸다. 그러나 스크린이 끝날 무렵, 내 마음은 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조엘이 모든 추억이 빨려나가는 와중에도 ‘한 장면만 남기고 싶다’고 절규할 때,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정말 지우고 싶은 것은 추억 그 자체가 아니라, 추억을 견뎌야 하는 무력감일 뿐이라는 것을. 사랑을 덮어놓고 잊어버리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랑이 남긴 공백과 함께 숨 쉬는 훈련이었다. 영화 속 클레멘타인이 파란색으로 칠한 머리는 내게 ‘상실의 염색약’ 같은 것이었다. 나 또한 관계가 끝날 때마다 무언가 극단적인 변화를 주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파란 약속서를 찢어발기듯, 시간은 결국 감정을 퇴색시키고, 남은 건 비어 있는 페이지였다. 그 페이지에 다시 글자를 쓰기 시작할 때, 나는 조엘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괜찮아, 또 끝날 거야”라는 체념과 “그래도 해 보자”는 고집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결국 펜을 들어 새 장을 편다. _이터널 선샤인_은 나에게 ‘사랑의 성공’이 아니라 ‘사랑의 반복’을 이야기했다. 그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성숙이라면, 나는 아직 영문법을 배우는 초등학생일 것이다. 그래도 좋다. 삭제가 불가능하다면, 편집이라도 해 보자. 슬픔의 컷을 조금만 짧게, 기쁨의 롱테이크를 몇 초 더 늘려 놓자. 그리고 언젠가 필름 릴을 돌리다 보면, 파란 머리의 클레멘타인이 아닌, 내 일상 속 작은 기적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것이다. 그때 나는 깨끗한 태양 아래 서서 이렇게 중얼거릴 것 같다. “Spotless Mind는 없지만, Eternal Sunshine은 여기 있다.”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구석이 따뜻해지는 이유다. 사랑은 지울 수 없기에, 여전히 다시 써 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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