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스 – 우주농부의 비밀과 운명서사

이터널스 포스터
이터널스 포스터

이터널스 – “우주 농부”의 비밀과 인류의 가치

우리가 20 층짜리 멀티플렉스의 안락한 좌석에 몸을 파묻고 팝콘을 우물거리는 동안, 스크린 속 이터널스는 7,000 년에 걸친 ‘우주 농사’를 짓고 있었다. 셀레스티얼인 아리셈은 생명을 일궈낼 씨앗을 인류라는 흙 속에 묻어 두고, 수확 시점이 오면 행성 한 알쯤은 과감히 갈아엎어 버리는 냉혹한 농부다. 이터널스는 그 농장을 지키는 허수아비이자 해충 제거제 노릇을 해 왔다. 그런데 영화가 진짜로 묻는 질문은 “거대한 작물―곧 은하의 탄생―을 위해 인간을 희생할 것인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단 하나의 아이가 들고 뛰노는 종이비행기의 가치가, 은하 하나보다 가벼울 수 있느냐”라는 더 본질적인 물음이다. 세르시가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초등학생들에게 ‘늑대와 사자’의 진화를 설명할 때,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답이 담겨 있다. 인류가 스스로 발명한 불완전한 도구들―언어·예술·과학·심지어 실수와 전쟁까지―를 통해 끊임없이 다음 세대에게 의미를 넘겨준다는 사실. 그 느리고 어수선한 진화의 연쇄 속에서, 스프라이트의 홀로그램과 길가메시의 솜씨 좋은 파이, 파스토스가 발명한 증폭기, 드루이그의 냉소 어린 연설 모든 것이 한데 섞여 ‘인간다움’이라는 엄청난 유산을 빚어낸다. 결국 ‘우주 농부’의 시선으로 보면 한낱 거름에 불과한 존재일지 몰라도, 세르시의 손끝에서는 그 거름이 별보다 뜨거운 서사를 피워 올린다. 그래서 영화는 거창한 CGI 폭발이 아니라, 셀레스티얼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 것이니 함부로 수확하지 말라”고 선언하는 순간 가장 눈부시다.

이터널스 – 셀레스티얼을 막은 유니마인드의 기적

영화를 본 뒤 머릿속에 가장 오래 잔향을 남긴 단어는 ‘유니마인드’였다. 파스토스가 손가락 사이에 반짝이는 회로를 엮어 만들던 그 장치는 단순한 과학 장비가 아니었다. 7,000 년 동안 각자 다른 대륙에서, 다른 언어와 기억 속을 헤매던 이터널스의 ‘고독’을 가느다란 은빛 선으로 연결해 주는 일종의 공동체 선언문이었다. 유니마인드를 가동하려면 모든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내어놓아야 한다. “나는 더 이상 단독 저작권자가 아니다”라고 인정하고, 자신의 힘을 내어 준 사람 곁에 서기로 결의해야 한다. 그 과정은 거대한 회의실에서 만장일치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길가메시가 테나의 광기 어린 공포증을 안아 주고, 드루이그가 인간을 조종하던 손을 거두며, 킹고가 촬영장을 뒤로한 채 신과 카메라 사이에 있던 자존심을 접는 식으로 이뤄진다. 직접적인 폭력 장면보다 더 전율한 순간은, 티아무트의 손가락이 태평양을 뚫고 솟아오를 때 세르시·드루이그·마카리가 한 덩어리로 묶여 금빛 띠를 뻗어 나가는 씬이었다. 셀레스티얼이라는 ‘창조신’에게 맞서 인간을 지켜 낸 무기는 초(超)과학·초능력·초강력 레이저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 안에서 기꺼이 번역돼 주겠다’는 다소 촌스러운 연대였다. 결국 유니마인드는 화려한 SF 소품이라기보다, 우리가 매일 SNS·단톡방·학급 PT·시민단체·가족 식탁에서 시행착오로 실험하고 있는 소통의 메타버스다. 영화가 보여 준 그 짧은 기적은, 실은 현실에서 우리가 아직 미완성 상태로 조립 중인 거대한 공생 회로도의 프로토타입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야말로 셀레스티얼보다 한 뼘 더 낭만적인 SF다.

이터널스 – 이카리스의 충성, 세르시의 사랑

슈퍼히어로 장르의 클리셰 속에서 ‘배신한 동료’는 흔하지만, 이카리스만큼 애틋한 악역은 드물다. 그의 죄목은 단순하다. ‘창조주’에게 끝까지 충성했다는 것. 그러나 그 충성의 온도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 마치 고대 설형문자 석판에 새겨진 의무처럼 건조하고 비가역적이다. 반면 세르시의 사랑은 끊임없이 기울기를 바꾸며 진화한다. 런던에서 아이들에게 흙 속 화석을 건네줄 때, 바빌론에서 푸른 융단 위에 누워 별을 바라볼 때, 그리고 남자친구 데인에게 ‘사실 나는 우주 로봇’이라고 턱하니 고백할 때조차 그녀는 ‘관계’를 최우선으로 사고한다. 영화 후반, 세르시가 티아무트의 거대한 손바닥 위에서 대지 변환을 시도하고, 이카리스는 울분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막아 서지만 결국 날개를 접은 새처럼 힘을 빼고 내려앉는다. 그 순간 이카리스가 진짜로 꺾인 것은 세르시의 능력이 아니라, 그녀가 품어 온 ‘비폭력적 설득’의 역사다. 이카리스는 태양으로 날아가 그 충성을 소멸시켜 버리지만, 세르시는 남겨진 동료들을 품에 안고 “우리의 시간은 실패와 재시도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고 속삭인다. 두 사람의 대비는 결국 한 편의 윤리적 우화다. 거대한 신념 시스템이 개인의 눈물을 어떻게 부수고, 또 사랑이 그 잔해에서 어떻게 싹을 틔우는지 보여 주는 고백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카오스가 관객의 가슴에 남긴 결론은 의외로 단순하다. 별빛보다 뜨거운 것은, 규율도 숙명도 아닌 ‘서로가 서로를 더 나은 존재로 믿어 주려는 끈질긴 의지’라는 사실.

이터널스 – 셀레스티얼의 거대한 실루엣

엔딩 크레딧이 흐르는 동안 나의 두 눈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셀레스티얼의 거대한 실루엣을 더듬고 있었다. 하지만 귓가를 가장 오래 맴돈 것은 아리셈의 천둥 같은 목소리가 아니라, 파스토스가 아들과 함께 자전거 체인을 고치며 흘린 웃음소리였다. ‘우주 농부’의 계획대로라면 무(無)로 귀결됐을지도 모를 그 소박한 오후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윤리적 진동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극장 밖으로 나오자 늦가을 빗방울이 거리 조명을 따라 점멸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가방 속 레시트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혹시 우리도 셀레스티얼의 씨앗쯤 될까?”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대 서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나와 친구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집까지 걸어가는 15분, 아침 출근길에 버스 기사님과 주고받는 짧은 ‘감사합니다’, 그리고 매일 밤 스스로를 다독이며 내일을 예측 불허의 서사로 남겨 두는 용기였다. 《이터널스》는 ‘코스믹 스케일’이라는 현란한 화려함을 빌려, 실은 우리 모두에게 “오늘 당신 옆사람의 작은 우주부터 지켜 내라”는 소박한 철학을 건넨 영화였다. 스크린이 꺼진 뒤에도 내 마음속 유니마인드는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작동 중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각자가 일상에서 연결해 가는 그 작고 무모한 회로들이 서로 얽혀 결국 셀레스티얼조차 계산하지 못한 또 다른 진화를 써 내려갈지도 모른다. 그 긴 가능성을 품고, 나는 내일도 지구라는 밭에서 징글징글하게 빛날 인간들의 잡초 같은 이야기를 응원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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