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데이 – 20년 엇갈린 영원한 사랑연대기

영화 원 데이 포스터
영화 원 데이 포스터

원 데이 – 매년 7월 15일이 남긴 의미

1988년 7월 15일, 유난히 햇빛이 따가웠다는 에든버러 언덕 위에서 첫인사를 나눈 엠마와 덱스터는 “오늘 밤만 친구로 지내자”는 가벼운 약속으로 서로의 인생에 한 줄을 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몰랐다. 졸업장보다 더 무거운 것이 ‘날짜’라는 사실을. 영화는 이후 23년 동안 매년 같은 날을 정밀하게 포착한다. 마치 달력이 아니라 기압계처럼, 7월 15일을 통해 두 사람의 감정 기류가 오르고 내리는 모양을 측정한다. 어느 해에는 여름 공기보다 뜨거운 욕망이 피어오르고, 또 다른 해에는 한랭전선 같은 오해가 끼어들어 아찔한 얼음비를 뿌린다. 이렇듯 7월 15일은 영화 속에서 ‘관성’이 아닌 ‘변수’로 쓰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끊임없이 변하는 인물들의 삶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기준점이자,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얼마나 가까워졌는지—or 멀어졌는지—스스로 확인하는 리트머스지다. 흥미로운 건, 관객인 우리도 극장을 나선 뒤 종종 일기장을 뒤적이며 “내게도 그런 날짜가 있었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첫사랑에게 고백하고도 퇴짜 맞은 날, 뜻밖의 합격소식을 들었던 날, 혹은 심야버스에서 한없이 울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어느새 해가 떠 있었던 날…. 영화는 ‘특정 날짜’가 인간의 기억 시스템에 꽂혀 있는 작은 책갈피라는 걸 재확인시켜 준다. 그러고는 묻는다. “당신은 그 책갈피를 마지막으로 넘겨본 적이 언제인가?” 텅 빈 달력 칸만 메우느라 정신없던 내 일상도,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고유한 기념일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사실이 절실히 느껴진다.

원 데이 – 친구에서 연인으로, 20년의 간극

청춘은 스프링처럼 팽팽한 가능성의 시대지만, 덱스터는 그 탄력을 방탕과 허세로 허비했다. 반면 엠마는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어 멕시코 식당 뒷주방에서 기름 냄새를 뒤집어쓰며 버틴다. 두 사람의 시계는 같은 속도로 흘러가지만, 침의 방향이 정반대다. 그렇게 평행선을 달리던 시간이 20년쯤 지나자, 덱스터가 마침내 ‘속도로 살던 삶’에 제동을 건다. 반면 엠마는 작가로 성공해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달리고 있다. 역전된 그래프는 긴장감을 낳지만, 영화는 여기서 손쉽게 로맨틱한 재회를 성사시키지 않는다. 대신 “삶의 페이스가 어긋났을 때,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맞추는가”라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20년이라는 세월은 엠마에게 자존감을, 덱스터에게는 참회의 시간을 선물했지만, 그만큼 두 사람의 욕망은 복잡해졌다. 엠마는 “그를 사랑하지만, 나 자신도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를 품고 있고, 덱스터는 “그녀를 붙잡고 싶지만, 언젠가는 놓아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영화가 택한 해법은 극적 선언이나 화려한 이벤트가 아니다. 아주 소박한 오후, 파리의 자전거 도로에서 엠마가 덱스터의 허리를 살짝 감싸는 장면—거기에 담긴 온기가 7월 15일의 오랜 간극을 메운다. 친구와 연인의 경계는 거창한 약속보다 순간의 체온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영화는 말없이 보여 준다. 돌아보면 우리 역시 ‘사귀자’는 말 대신, 버스 정류장에서 우산을 씌워주던 손길 하나에 마음이 넘어가곤 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결국 스펙터클이 아니라 미세한 공기를 공유하는 기술이며, 20년을 돌아오더라도 그 시작점은 늘 “잘 지냈어?”라는 평범한 인사인 셈이다.

원 데이 – 엠마·덱스터의 엇갈림이 주는 교훈

영화 속 가장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아이러니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늘 상대방이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엠마가 야간 버스 안에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였지?”라며 울음을 삼킬 때, 덱스터는 런던 밤거리에서 별 생각 없이 샴페인을 들이켰다. 반대로 덱스터가 방송국에서 쫓겨나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엠마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터뷰 요청에 시달린다. 이런 엇갈림은 단순한 운명의 장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자기 삶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서툼에서 비롯된 결과다. 덱스터는 타인의 시선을 과다섭취한 나머지 자기 판단 근육이 약해졌고, 엠마는 자기 증명에 집착한 나머지 타인의 손길을 의심하는 습관이 생겼다. 두 사람 모두 ‘나’를 놓치니, ‘우리’도 놓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영화는 그 파국을 2006년 파리의 자전거 사고라는 형태로 극대화한다. 엠마를 잃은 뒤 덱스터는 중력 없는 공간에 홀로 던져진 듯 휘청인다. 그리고 아버지의 조용한 조언—“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네가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뿐이다”—을 통해 비로소 성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는다. 사랑은 타이밍이지만, 성숙은 선택이라는 점이다. 덱스터가 엠마를 읽고 눈물로 세월을 말렸다고 해서, 그 시간이 성장으로 자동 환산되는 건 아니다. 그는 스스로 딸을 돌보고, 카페를 운영하며, 엠마가 빚어 놓은 ‘더 나은 자신’에 필사적으로 닿으려 애쓴다. 엇갈림이 남긴 상처를 새살로 메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살을 재생시키는 건 결국 우리의 의지다. 관객으로서 나는 스크린을 보며 문득 내 지난 사랑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 수많은 엇갈림은 모두 실패가 아니라, 아직 덜 자란 두 사람이 서로를 놓아준 하나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원 데이 – 작은 기념일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귀에 먼저 박힌 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아니라 극장 천장에서 희미하게 떨어지던 에어컨 바람 소리였다. 한여름의 열기를 식혀 주는 그 미세한 바람이, 엠마가 마지막으로 내뿜은 숨결 같아 가슴이 저릿했다. 나는 오랫동안 ‘단 하루’에 집착하지 못한 채, 미래 설계와 어제의 후회 사이를 분주히 왕복하며 살아왔다. 영화는 그런 내게 아주 사적인 과제를 던졌다. “당신에게도 7월 15일이 있느냐”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달력을 펼쳐 보았다. 아무렇게나 찍어 둔 일정, 영수증처럼 붙어 있는 회식 약속, 알람 대신 미뤄둔 숙제 같은 메모들이 줄줄이 보였다. 그 사이에 단 하나도, ‘나만을 위한 기념일’은 없었다. 엠마와 덱스터처럼 매년 돌아볼 수 있는 좌표가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작은 결심을 했다. 5월의 어느 평일을 골라 ‘나를 위한 날’이라고 이름 붙이기로. 그날은 칼퇴근 후 가장 좋아하는 동네 서점에 들러 아무 페이지나 펼쳐지는 책을 사고, 맛있는 김밥을 포장해 한강 벤치에 앉아 읽을 생각이다. 누군가 곁에 있으면 더 좋겠지만, 혼자라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날짜를 기억하고, 그날의 공기를 마음껏 마시는 행위 자체다. 원 데이는 우리에게 “사랑이든 우정이든 결국 기억 속에서 살아남는 건 특정한 ‘때’와 ‘장소’”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그 좌표를 소중히 품어야만, 언젠가 소중한 사람이 떠났을 때도 우리는 삶을 이어 갈 힘을 얻는다. 엠마가 남긴 빈자리 위에서 덱스터가 다시 일어섰듯, 나도 언젠가는 그 작은 기념일 위에서 서툰 인생을 다시 맞출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달력 속 ‘원 데이’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게.”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