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더 헬멧 속 용기의 눈빛
어기가 처음 헬멧을 벗고 교실 문턱을 넘는 장면을 떠올리면, 내 마음속 어딘가가 늘 서늘해진다. 겉보기엔 투명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우주선 같지만, 그 헬멧은 열 살짜리 아이가 세상과 맺은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관객인 나는 그 투명벽을 통해 그의 커다란 눈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거기엔 두려움보다도 “한 발은 앞으로 내딛겠다”는 결연함이 맴돌아 있다. 영화는 이 눈빛을 아주 영리하게 사용한다. 첫날 점심시간, 긴 식탁에서 혼자 떨어져 앉은 어기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대신 헬멧 챙을 살짝 치켜 올려 친구들의 무심·호기심·경멸·연민 섞인 시선을 똑바로 받아낸다. 나는 그 장면에서 ‘용기’라는 단어를 재정의했다. 용기는 거대한 업적을 이루는 힘이 아니라, 일상 속 관객석에서 무대 위로 스스로를 밀어 올리는 미세한 근육의 떨림이라는 것. 어기는 단언한다. “나는 평범하지 않지만, 내 하루를 평범하게 살고 싶어.” 그 바람을 관철하기 위해 그는 27차례의 수술보다도 무서운 ‘친구들의 첫인상’이라는 수술대에 스스로를 눕힌다. 영화는 어기의 눈에 비친 교실 풍경을 간결한 쇼트로 끊어 보여주지만, 그 속에는 미세한 진동이 숨어 있다. 원근감이 과장된 렌즈, 어두운 배경 뒤로 번지는 노란 형광등의 떨림, 그리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카메라 워크—all of these tell us that bravery is never static; it is an ongoing oscillation between wanting to hide and daring to be seen. 그래서 나는 어기의 헬멧을 볼 때마다 문득 내 일상의 작은 방어벽들이 떠오른다. 무심한 표정, 습관처럼 꺼내는 핸드폰, 가볍게 흘리는 농담 같은 것들이 사실은 내 얼굴을 가리는 투명 헬멧이 아닐까? 어기가 헬멧을 벗어 던지기 전 깊게 들이켰던 한 모금의 숨결을 기억하며, 나도 내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살짝 고개를 들어보려 한다. “나는 오늘도 평범하지 않은 방식으로 평범하게 살아볼 거야.” 그 미묘한 다짐이 내 눈동자에 깃든 순간, 투명 헬멧은 금세 김 서린 유리창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
원더 가족과 우정의 성장곡선
원더가 진짜 위대한 지점은 ‘용기 있게 태어난 아이’라는 동화적 서사를 넘어, 그 용기가 가족과 친구의 좌표를 어떻게 뒤흔드는지 집요하게 탐색한다는 데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플린 가족은 사실 동화 속 이상적인 ‘단란한 세 식구’와 거리가 멀다. 엄마 이사벨은 홈스쿨링과 간병 사이에서 자신의 박사 과정을 포기했고, 아빠 네이트는 자조 섞인 농담으로만 가정의 균열을 봉합한다. 무엇보다 누나 비아—주목받기엔 이미 너무 커버린 첫째—는 동생의 수술 스케줄에 맞춰 성장기를 조율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 가족을 ‘고통 분배의 장치’로 소모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 다른 불균형이 교차하며 독특한 성장곡선을 그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기가 학교라는 새 궤도에 진입하자 비아는 가족을 중심으로 도는 위성이기를 멈추고, 자신의 궤도를 찾아 연극부 무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순간 카메라는 비아의 클로즈업을 잡으며 어긋났던 시선을 정면으로 돌려 세운다. “언제나 동생만 바라보라던 카메라여, 이제는 나를 보라.” 숨죽인 첫째의 선언이 그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잭·썸머로 대표되는 우정선 역시 단순한 ‘착한 친구’ 스케치에 머물지 않는다. 잭은 어기의 도움으로 시험을 통과하지만, 헬멧 뒤 얼굴을 여전히 ‘이상한 행성’으로 소비한다. 결국 그는 배신자 낙인이 찍힌 후 비로소 ‘함께 웃기 위해선 함께 울어야 한다’는 상식을 체득한다. 썸머는 좀 다르다. 그녀는 어기를 동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를 엔트로피 높은 교실의 새로운 변인으로 받아들인다. “얘랑 있으면 재미있어. 그래서 난 이 자리에 그대로 있을래.” 그 단순한 이유가 우정을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나는 이 성장곡선을 ‘접속의 직선’이 아니라 ‘굴곡진 곡선’으로 기억한다. 가족은 때로 휘어지고 친구 관계는 요동치지만, 마지막에는 각자 낯선 좌표를 회전한 끝에 가장 단단한 원을 그린다. 원더는 그 원을 ‘친절’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한다. 친절이란 상대를 위한 배려라기보다 서로의 서투름을 견디는 힘이라는 것을, 영화는 굴곡진 그래프로 증명한다.
원더 비이성을 넘어 기적을 믿다
극 중 라이트 간호사와 애나를 통해 ‘이성과 비이성’의 대립을 그렸다는 비평이 떠오른다. 원더 역시 겉으론 과학적 사실, 즉 유전 질환과 조기 성형수술의 결과를 묘사하지만, 그 이면에는 ‘기적’이라는 비이성적 단어를 서슴없이 불러낸다. 어기가 매일 학교에 가는 반복된 루틴—버스 정류장, 복도, 점심 식당—은 명백히 현실이지만, 그 현실을 통과해 돌아오는 변화는 쉽게 공식화할 수 없다. 줄리안 무리의 괴롭힘이 절정에 달한 날, 어기는 뒤뜰에서 혼자 울다 문득 별을 올려다본다. 씬은 크랭크 인·아웃 없이 고정 롱테이크로 이어지는데, 들뜬 BGM 대신 바람 소리와 먼 개 짖는 소리만이 허공을 채운다. 어기의 울음이 멎는 순간, 카메라는 전망을 살짝 틀어 어깨 너머로 박물관 포스터를 비춘다: “여기엔 보이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과학과 통계로 설명할 수 없는 작은 기적이 비로소 숨을 쉬는 순간이다. 잭에게 사과받고, 썸머와 눈인사를 나누며, 그리고 학년말 어워드에서 ‘친절상’을 받을 때까지—기적은 거창한 스펙터클 대신 잔잔한 미풍처럼 어기의 주변을 휘감는다. 나는 영화를 보며 오랫동안 마음에 새겨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구절을 떠올렸다. “기적은 준비된 눈에만 보인다.” 어기의 눈은 처음엔 방어로 가득했지만, 하루하루 들숨과 날숨으로 닦여 어느새 준비된 창문이 된다. 관객인 나 역시 기적을 목격하려면 그 창문을 닮아야 한다. ‘기적’이라는 단어를 어휘에서 지워버린 채 현실만을 측량해 왔던 나는, 원더를 통해 다시금 비이성적 상상력의 필요를 확인한다. 회의주의가 세련된 미덕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작은 기적을 기꺼이 믿는 태도가 오히려 가장 이성적인 생존 전략 아닐까? 기적을 믿는다는 건 결국, 세상이 아직 다 쓰이지 않은 이야기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 책장 한 귀퉁이에, 내일 아침의 작은 친절이 삽화처럼 실릴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도.
원더 나의 첫 출근날이 떠올랐다
엔드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극장 조명이 켜지지 않아 한동안 어두운 객석에 앉아 있었다. 스크린이 보여 준 건 분명 어린이 성장담이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나의 첫 출근날’이 떠올랐다. 새로운 사무실, 새로운 상사, 그리고 낯가림으로 얼어붙은 내 표정. 당시에 나는 보이지 않는 헬멧을 쓰고 있었고, 용기를 낸다는 건 메일 한 통에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를 적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원더는 그 낡은 기억을 새삼 끄집어내며 속삭인다. “용기는 그렇게 시작해도 충분했어.” 영화는 나에게 친절과 상상의 연습장을 건네주었다. 내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문이 열리는 순간 어떤 얼굴로 세상을 맞을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한다. 투명 헬멧을 벗고 고개를 들고, 낯선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살짝 웃어 볼 것. 혹시 상대가 외면하더라도 상관없다. 어기가 보여 준 건 결과가 아닌 태도였으니까. 그런 태도가 하루, 일주일, 한 달씩 쌓이면 ‘친절상’ 같은 메달이 없어도 내 삶은 이미 기적의 통계 안에 진입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적은 결국 ‘평범한 내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변화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완성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극장을 나서는 길, 유리문에 비친 내 얼굴을 흘끗 봤다. 헬멧 없이도 제법 단단해 보였다. 원더가 남긴 가장 큰 선물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한 톤 더 따뜻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된 바로 그 눈빛. 이제 그 눈빛으로 내 주변 사람들도 비출 차례다. 누군가의 오늘을 조금 덜 외롭게 만들어 줄 작은 기적을,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