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더풀 라이프 – 기억과 망각의 경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를 처음 본 날, 나는 영화관에서 나오는 순간까지도 계속 목덜미를 간질이는 낯선 바람을 느꼈다. 그때 깨달았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가장 행복한 기억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기억을 둘러싼 수많은 망각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구나. 영화 속 사후 세계의 직원들은 인터뷰용 카메라를 들고 매일같이 새 손님을 맞는다. “당신의 인생에서 단 한 장면만 가져갈 수 있다면?”라는 물음 앞에서 사람들은 어쩌면 행복보다 고통을 먼저 떠올린다. 그 고통의 자리엔 늘 ‘잊힘’이 있다. 어릴 적 눈꽃을 바라보며 혼자 눈덩이를 굴리던 소년 모치즈키 역시, 53년의 긴 림보를 버티는 동안 사실 기억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망각이 두려워 선택을 미뤘던 셈이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어느 페이지에서 멈칫하고는 차마 넘기지 못하는 우리처럼 말이다. 그 주저함 속에는, 하나를 품는 순간 나머지를 어둠 속에 흘려보내야 한다는 비애가 깊이 스며 있다. 그래서 영화는 반달·보름달·그림달 같은 ‘가짜 하늘’을 오가며, 기억과 망각이 뒤엉킨 인간 내면을 은유한다. 달빛은 언제나 똑같이 푸르지만, 올려다보는 각도와 마음결에 따라 새벽녘엔 절망을, 황혼녘엔 구원을 비춘다. 기억의 달을 바라보는 일이란 결국 우리 안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일이 아닐까? 망각이라는 그늘이 있어야 빛은 더 밝게 눈에 들어온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나는 불 꺼진 극장 통로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초록색 비상등조차 달빛처럼 반가웠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잊고 살았던, 아주 작지만 소중한 현재의 빛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원더풀 라이프 – 단 하나의 추억을 고르다
“하나만 고른다”는 행위는 사소한 듯 보여도 실은 인생 전체를 반추하는 대공사다. 영화 속 의뢰인들은 처음엔 “행복했던 순간이 별로 없는데요”라며 입술을 굳게 다문다. 그러나 카메라 앞에 앉아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면, 어느새 기억의 주도권을 스스로 잡고 삶을 재편집한다. 누군가는 아버지 어깨 위에서 봤던 불꽃놀이, 누군가는 여름 장대비 속 차창에 맺힌 물방울, 또 누군가는 이른 아침 전철 창문에 비친 연인의 졸린 눈. 그렇게 자신에게 가장 ‘설명하고 싶은’ 장면을 고르는 순간, 그 장면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형이 된다. 선택이 끝나자마자 스태프들은 허름한 체육관에 벤치를 들여놓고, 도로 위에 분무기로 눈을 뿌리며, 달빛 대신 벌브 조명을 매단다. 세트 한가운데선 아마추어 출연자와 전문 배우가 뒤섞여 리허설을 반복한다. 어딘가 어설프고 심지어 투박한 그 풍경이, 이상하리만치 따뜻하다. 우리는 언제나 ‘완벽한 재현’을 꿈꾸지만, 결과적으로 마음을 울리는 건 결핍을 인정한 채 온 힘을 다해 불완전을 사랑하려는 태도다. 단 하나의 추억을 고른다는 것은, 잘 찍힌 사진 한 장을 얻는 일이 아니라 마음속에 낭비 없이 불을 밝히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선택을 마친 뒤 의뢰인들은 극장 스크린 앞 의자에 앉아 저마다의 영화를 본다. 다들 눈가에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품는다. 관객인 우리 역시 그 모습을 바라보며 거울을 보는 듯한 기묘한 울림을 느낀다. 그 순간, 스크린은 단순한 직사각형이 아니라 우리 기억의 방 안쪽 벽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영화가 끝나도 장면은 계속 재생된다는 것을.
원더풀 라이프 – 영화가 된 사랑의 흔적
내게 가장 벅찬 대목은 연로한 와타나베가 선택한 기억이다. 그는 뜨겁지도 격렬하지도 않은, 그저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벤치 위의 침묵을 골랐다. 스무 살 초입의 약혼녀 교코와 마지막으로 나눈 짧은 정적. 그 시간에는 미처 몰랐던 절실함이 40년 뒤에야 진가를 드러냈다. 흥미로운 건, 교코가 훗날 스스로 선택한 기억 역시 동일한 벤치라는 점이다. 두 사람의 선택은 서로에 대한 ‘교차편집’이 된다. 아내에게 미안함만 남았다고 여긴 남편과, 남편에게 충분히 사랑받았다고 고백하는 아내의 시점이 한 프레임에 포개질 때, 벤치는 단순한 소품이 아닌 관계의 증언대가 된다. 영화는 사랑을 장밋빛 환상으로 꾸미지 않는다. 오히려 이 벤치가 보여주듯, 사랑이란 긴 시간 동안 묵묵히 튼살처럼 남는 흔적이라는 사실을 들려준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떠나버린 이도, 이룰 수 없는 짝사랑을 품은 채 세상을 등진 이도, 결국에는 자신이 남긴 자국으로 타인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래서 나는 가짜 달빛 아래 서로를 향해 눈길을 보내는 모치즈키와 시오리를 보면, ‘사랑이란 무엇을 주고받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기억으로 남겠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끝난 직후, 관객석의 노크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환청이 스며드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터. 사랑은 늘 완성형이 아니라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편지이기에, 우리는 끝없이 그 결말을 상상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상상의 공간을 빛으로 채워주는 매개가 바로 영화다.
원더풀 라이프 – 인생을 영화화해보다
상영이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의자에 몸이 붙은 듯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엔 “내가 림보에 불려 간다면 무슨 장면을 고를까?”라는 질문이 맴돌았다. 맨 먼저 떠오른 건 거창한 성공이나 화려한 축하 무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겨울 새벽, 첫 전철을 타려고 종로의 이른 공기를 들이마시던 순간. 아직 해가 뜨지 않아 도시는 회색이었고, 내 숨만 하얗게 피어올랐다. 그때 품었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설렘. 오래된 전구 아래서 모치즈키가 반달을 올려다볼 때 느꼈을 희미한 쾌감이 내 기억 속에도 살고 있었다. 인생을 스스로 영화화한다는 것은 결국, 그 설렘을 잊지 않기 위한 의식인지도 모른다. 오늘 밤 노트를 펴고 열 줄짜리 시나리오를 써 보았다. 1. 겨울 풀냄새, 2. 초록 비상등, 3. 첫차의 떨림… 언젠가 누군가 내게 “단 하나를 고르라” 주문한다면, 이 불완전한 목차를 들고 조명 밑에 앉을 것이다. 망각이 덮어두었던 장면을 다시 빛 속으로 호출하고, 흔들리는 트롤리카메라가 나를 따라다니듯 기억을 이어 붙일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짧은 필름이 어쩌면 내 다음 생의 티켓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원더풀 라이프〉**는 내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이미 충분히 극적이다. 다만 그 극을 자각하는 순간이 조금 늦을 뿐.”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온 지금, 나는 내일 아침 지하철 창밖을 더 오래 바라볼 작정이다. 언젠가 떠날 림보의 의자에 앉아 이 시간을 떠올릴 때, 회색 새벽도 분명 달빛처럼 반짝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