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버 더 문 – 달빛에 스민 상실과 성장의 서사
‘오버 더 문’이 관객에게 먼저 내미는 감정의 초콜릿은 상실이다. 영화는 단출한 한복 깃처럼 얌전한 오프닝으로 시작하지만, 곧장 눈밭에 묻힌 발자국처럼 선연한 이별의 흔적을 남긴다. 페이페이가 엄마를 잃고도 “달에 가면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올 거야”라는 단단한 신념을 품는 순간, 우리는 어린 소녀가 껴안은 거대한 구멍을 목격한다. 그 구멍은 우주로 쏘아 올린 로켓처럼 거칠게 확대되지만, 동시에 달토끼의 고운 솜털처럼 섬세하게 흔들린다. 이야기 속 두 주인공―현생의 페이페이와 달의 창아―는 서로 다른 차원에서 같은 무게의 상실을 끌어안고 있다. 한 사람은 눈물겨운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과학과 모험을 택하고, 다른 한 사람은 영원한 전설 속에 머무르며 시간을 정지시킨다.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가 ‘성장’을 슬픔의 반대말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페이페이는 로켓 조립 과정에서 ‘안정적 추력’을 계산하지만, 정작 마음의 추력은 주변인들과의 충돌 속에서 비로소 맞춰진다. 동생이 될지도 모를 짱구머리 ‘친’의 “노 바운더리!” 외침, 고비의 느닷없는 랩송, 떠나보낸 어머니의 레시피로 빚어낸 달콤한 월병이 차곡차곡 소녀의 마음을 채운다. 창아 역시 페이페이의 질주를 거울 삼아 “나는 전설의 끝에서, 이제야 첫걸음을 떼는구나”를 깨닫는다. 달빛 아래 놓인 두 슬픔은 결국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며 길을 만들고, 관객은 그 길 끝에서 상실이 결코 빈칸으로 남지 않음을 확인한다. 영화가 말하는 성장은 ‘잊음’이 아니다. 상실 위에 새로운 발판을 놓고, 그 위에서 다시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다. 그래서 엔딩의 중추절 만찬 장면은 단순한 화해가 아니다. 빈자리를 인정하면서도, 새 의자를 들여놓아 모두가 등을 기대어 앉을 수 있는 ‘확장된 식탁’의 선언이다.
오버 더 문 – 중국 신화와 K-팝이 만난 순간
처음 예고편을 봤을 때, 전통 설화와 형광 네온빛 댄스 배틀이 한 스크린에 공존한다는 사실이 솔직히 낯설었다. “달 토끼가 EDM 비트를 탄다고?”라는 반신반의가 있었지만, 정작 본편은 그 간극을 **‘문화 믹스의 흥취’**로 뒤집어 버린다. 핵심은 각 요소를 단순히 병치하지 않고, 서사의 필요에 맞춰 유기적으로 ‘합주’ 시킨다는 점이다. 창아가 부르는 ‘울트라 루미너리’는 전통 악기 대신 신시사이저 리프와 킥 드럼으로 폭발하지만, 가사 속엔 “옥토끼가 찧어낸 달빛의 가루”처럼 고전적 이미지가 반짝인다. 반대로 페이페이가 지구에서 불러올리는 ‘로켓 투 더 문’은 뮤지컬 발라드 형식을 갖추었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과학용어와 수학 공식은 현대적 야망의 상징이다. 즉, 영화는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이 서로를 교차 조명하도록 설계해 두 문화권 관객 모두에게 신선한 공명을 선사한다. 특히 달 세계 루나라시티의 디자인은 SF 팬에게 “트론?”을 연상시키는 광채를 내뿜으면서도, 도교적 구름 무늬와 공중누각의 실루엣을 곳곳에 배치해 전통 신화를 시각적 DNA로 꾹꾹 눌러 담는다. 이런 하이브리드 미학은 ‘정체성의 연결고리’를 찾는 21세기 글로벌 세대를 정조준한다. 언어와 감각이 뒤섞인 시대, 전통은 박물관 유물로 남지 않고 새로운 리믹스의 재료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버 더 문’은 K-팝의 세계화 전략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셈이다. 창아가 아이돌 스타처럼 무대를 장악하는 순간, 아이는 달콤한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고, 어른은 “저 장면에 설화의 맥락이 이렇게 녹아들었네”라며 미소 짓는다. 두 층위의 감상이 동시에 유효하다는 점, 그것이 이 작품이 남기는 가장 현대적인 후광이다.
오버 더 문 – 궈페이 의상으로 완성한 ‘창아 룩’
애니메이션이 패션 필름일 수 있을까? ‘오버 더 문’을 보고 나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극 중 창아는 등장할 때마다 마치 인터스텔라 런웨이를 걷듯 의상을 갈아입는다. 중국 하이패션의 대모 궈페이가 디자인한 이 ‘창아 룩’은 단순한 눈요기를 넘어 캐릭터의 심리 곡선을 시각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예컨대 초반 공연 장면에서 그녀가 입은 금사 자수의 해태 무늬 케이프는 ‘불멸의 여신’이라는 자신의 신화를 과시한다. 그러나 연인을 다시 떠나보낸 뒤 고독의 방으로 숨을 때, 그녀는 화려함을 모두 지워낸 백옥색 상의를 선택한다. 긴 소매에 힘없이 흘러내린 비단 주름은 ‘무한한 시간을 견디는 슬픔’ 자체다. 흥미로운 건 창아의 의상이 페이페이의 감정과도 은근한 맞춤법을 이룬다는 점이다. 페이페이가 꿈을 품고 달로 솟구칠 땐 창아 역시 붉은 봉황깃 드레스를 입어 뜨거운 에너지를 방출하고, 두 인물이 함몰된 상실 속에서 손을 맞잡을 땐 흰색 계열로 톤을 통일해 ‘공명’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컬러 시나리오는 무대 위 조명에 의해 증폭되어, 관객의 눈동자에 ‘감정의 그라데이션’을 직접 그려 넣는다. 또한 궈페이는 전통 한푸 실루엣을 유지하되 어깨선·허리선을 과감히 변주하고, 금실·유리 비즈·LED 패브릭 같은 현대 소재를 결합해 ‘신화와 사이버 글램’이 공존하는 실루엣을 완성했다. 덕분에 우리는 한 컷만 보아도 ‘창아=우주적 디바’라는 인상을 즉각적으로 읽어낸다. 패션이 캐릭터를 입체화하고, 캐릭터가 패션을 서사로 승화시키는 상호 증폭의 미학이 이 작품의 또 다른 백미다.
오버 더 문 – 빈자리를 둘러싼 체온
스크린을 끄고 나서 가장 오래 귀에 남은 건 화려한 노래도, 알록달록한 달도 아닌 ‘빈자리를 둘러싼 체온’이었다. 사랑했던 이를 잃은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페이페이가 달사진을 증거 삼아 아빠의 마음을 되돌리려는 장면에서 숨이 턱 막혔을 것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세상을 먼저 떠난 외할머니를 되살리고 싶어 동네 약수터에서 “마시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문까지 믿었으니까. 영화는 그런 기억을 조용히 불러와 “그때의 너를 이해해”라고 등을 다독인다. 더 인상 깊었던 건 ‘상실 서사’가 슬픔의 소비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은 페이페이가 달에서 돌아온 뒤 ‘새 가족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대신 같은 자리, 같은 테이블, 같은 만두찜통 앞에 달라진 구도가 들어온다. 누군가는 옆자리에 앉고, 누군가는 자리를 비웠지만, 그 공백 덕분에 또 다른 온기가 스며들 공간이 생겼다. 어쩌면 상실을 겪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야” 같은 교과서적 위로가 아니라, 함께 빈자리를 바라봐 줄 사람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 친이 벽을 박차고 외치는 “노 바운더리!”는 그래서 단순한 개그가 아니다. 마음의 벽, 가족의 벽, 과거와 현재의 벽을 허물고 서로로 향하는 호출이다. ‘오버 더 문’은 나에게도 그런 호출을 건넸다. 그립다면 그리워하되, 두려워 말고 문을 열어 두라는 초대장. 여전히 달빛에 비추면 아린 자국이 있지만, 그 자국이 있어야 새살이 돋듯 새로운 이야기가 자란다. 그러니 오늘 밤 달을 올려다본다면, 부디 잃어버린 이름을 조용히 불러 보고, 곁에 있는 이름을 다정히 불러 보자. 상실과 성장은 서로의 뒷면이 아니라, 같은 동전의 앞뒤라는 깨달음이, 달보다 환한 빛으로 오래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