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지 오브 세븐틴, 진짜 사춘기 탐험기

영화 더엣지오브세븐틴 포스터
영화 더엣지오브세븐틴 포스터

에지 오브 세븐틴: 어른도 공감한 사춘기 혼돈

고등학교라는 작은 생태계에서 우리는 모두 한 번쯤 ‘나는 왜 이렇게 특별하지 않을까’라는 막막함에 빠진다. **‘에지 오브 세븐틴’**은 그 혼돈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헤일리 스테인펠드가 연기한 ‘나딘’의 시선을 통해 고스란히 펼쳐 놓는다. 친구와 형제가 연인이 되었다는 소소해 보이는 사건이 삽시간에 세계 멸망급 위기로 확장되는 과정은, 열일곱이라면 누구나 거쳐 가는 ‘과잉 해석’의 전형이다. 감독 켈리 프레먼 크레이그는 플래시백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나딘’이 왜 그렇게 비뚤어졌는지, 또 왜 스스로를 구석에 몰아넣는지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관객은 나딘이 던지는 독설에 팍팍 웃다가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끼어드는 상실감과 외로움에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해도, 사실은 내 마음속 조명이 꺼졌을 뿐”**이라는 메시지다. 이 영화는 교실 구석에 숨어 도시락을 까먹던 소년·소녀뿐 아니라, 이제 어른이 되어 회사를 전쟁터라 부르는 우리에게도 속삭인다. ‘내가 겪은 폭풍은 사실 모두의 통과의례였어’라는 깨달음은 낯 뜨거우면서도 묘하게 위로가 된다. 울퉁불퉁한 10대의 감정 곡선을 어른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이 영화의 힘이, 바로 ‘공감’이라는 두 글자에 응축되어 있다.

에지 오브 세븐틴: 10대 말투 그대로 담은 대사

요즘 작품들이 10대 캐릭터의 입에 ‘너무 착한’ 말을 씌워 실소를 자아내곤 하지만, **‘에지 오브 세븐틴’**은 달라서 반갑다. “선생님, 저 오늘 자살하려고요.”라며 교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간 나딘에게 우디 해럴슨이 덤덤히 읽어 내려가는 ‘가짜 유서’ 장면은 시작부터 대차다. F-폭탄과 비속어, 뼈를 때리는 비아냥이 난무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현실감을 부여한다. 관객은 교실 뒤편 책걸상에 달라붙어 있던 여드름만큼이나 생생한 사운드를 듣는다. 더 중요한 건, 그 대사들이 단순히 ‘센 맛’ 노이즈 마케팅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딘과 친구 크리스타가 던지는 투박한 한마디, 형 다리언이 터뜨리는 짤막한 한숨, 그리고 선생 브루너가 되돌려주는 메마른 농담까지―모두가 캐릭터의 내면과 사건의 맥락을 정확히 밀어붙인다. 이 때문에 영화는 자극적 어휘를 쏟아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교실 썰전’을 듣다 보면, 고등학교의 공기가 어땠는지, 쉬는 시간 복도에 어떤 냄새가 섞여 있었는지까지 떠오른다. 언어는 시대의 거울이다. ‘에지 오브 세븐틴’은 스마트폰 세대 10대가 실제로 구사하는 리듬과 억양을 포착해 관객의 뇌리에 각인시킨다. 그 덕에 30대, 40대, 50대 관객도 “아, 나도 저런 말투로 부모님 속을 뒤집어 놨었지”라고 쓴웃음을 짓는다. 대사가 지나치게 리얼해 순간 귀를 의심해도, 우리는 곧장 그 리얼리티 덕분에 영화 속 세상을 믿어 버린다.

에지 오브 세븐틴: 시대를 초월한 공감 코드

‘트루 그릿’의 신예가 어느새 성숙한 배우로 거듭났음을 확인시켜 주는 이 영화는, 세대·성별을 뛰어넘어 **‘성장통은 모두에게 같은 색으로 멍든다’**는 진리를 일깨운다. 소셜미디어가 일상을 지배하고, 영상 통화가 일상에 녹아든 2010년대 배경이지만, 그 속에 흐르는 감정의 물결은 ‘졸업’(1967)이나 ‘페리스의 해방일지’(1986)와 맥을 같이한다. 나딘은 자신을 ‘특별한 외톨이’로 규정하며 스스로를 벽 안에 가둔다. 하지만 영화는 주변 인물들의 미세한 균열을 통해 ‘모두가 각자의 비극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차근차근 보여 준다. 엄마는 완벽해 보이려 애쓰지만 사실 누구보다 불안하고, 형 다리언은 인기 만점 스타지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누구보다 깊은 상처를 숨기고 있다. 나딘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볼 여유를 얻는 순간, 관객도 ‘나만 힘든 게 아니었네’라는 근원적 안도감을 느낀다. 이런 서사는 팬데믹 이후 고립감을 경험한 현대인에게 더욱 와닿는다. 영화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거창하지 않다. “일단 나가서 네가 싫어하는 세상과 한 걸음 부딪혀 봐”라는 선생님의 조언처럼, 한 발 내디디면 풍경이 바뀐다는 소박한 진리다. 때문에 이 작품은 10대 관객에게는 ‘지금 내 인생도 언젠가 웃으며 회상할 에피소드’라는 희망을, 성인 관객에게는 ‘그때의 나를 토닥일 유효기간 없는 위로’를 선물한다.

에지 오브 세븐틴: 내 열일곱살은 어땠는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길, 교복 치마 자락 대신 구겨진 셔츠 소매를 잡아당기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열일곱 살의 나는 늘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누군가가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면 뒷걸음질 치며 손을 놓아 버렸고, 내가 서툰 순간엔 모든 사람을 원망했다. **‘에지 오브 세븐틴’**은 그런 나를 불러 세워 “결국 사람을 구하는 건 사과 한 마디와 어설픈 손짓 한 번”이라고 일깨운다. 나딘이 오만과 후회 사이를 오가며 뱉어 낸 수많은 독설은, 사실 내 입술에 맺혀 있던 말의 그림자였다. 오랜 시간 묵혀 둔 부끄러움이 화면 속에서 살아 꿈틀대자, 나는 지나간 날들을 향해 속으로 ‘미안했다’고 중얼거렸다. 동시에 이 영화는 ‘후회의 끝은 다시 시작’이라는 가벼운 발걸음을 제시한다. 나딘이 빗속을 달려 가로등 아래서 친구에게 작은 미소를 건네듯, 우리도 관계의 끈을 다시 매만질 기회를 얻는다. 그래서 극장 불이 켜진 뒤, 나는 휴대폰 메신저 창을 열어 옛 친구에게 짧은 안부를 남겼다. “잘 지내? 예전엔 미안했어.”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 어깨가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영화는 끝났지만, 열일곱의 나와 마흔의 내가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이해한 순간이었다. 결국 성장 영화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악수하는 의식일지 모른다. **‘에지 오브 세븐틴’**은 그 의식을 눈부신 대낮으로 끌어올려, 누구에게나 남아 있는 ‘미완성의 소년·소녀’에게 빗속을 뚫고 달려갈 용기를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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