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마데우스 – 신이 내린 웃음과 인간의 질투
모차르트가 비엔나 궁정 한복판에서 터뜨리는 ‘쇠를 긁는 듯한’ 웃음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도발의 서막이다. 그 소리는 단지 경박함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통해 내뿜은 초월적 에너지의 파편처럼 번뜩인다. 한 번 들으면 귓속을 맴돌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그 웃음은 살리에리에게 거대한 충격파로 다가온다. 수년간 기도와 금욕으로 다듬은 자기 세계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음향이자, 자신이 신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드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살리에리가 처음으로 모차르트의 미완성 악보를 들춰 본 순간, 난삽한 수정도 초안도 없이 완벽하게 적힌 음표들은 그에게 경외와 공포를 동시에 안긴다. 그는 음악이 인간의 노동이 아니라 계시임을 깨닫는 동시에, 그 계시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내려졌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친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노력의 윤리’와 ‘재능의 불공정’을 교차 편집한다. 살리에리가 맛보는 절망은 번듯한 성실함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천재성의 성역을 발견한 평범한 재능들의 집단적 자각이다. 관객은 살리에리의 일그러진 표정 속에서 자신이 한때 느꼈던 열등감, 혹은 인정 욕망을 투영하게 되고, 모차르트의 웃음은 그 상처를 콕콕 찔러 대며 철저히 신성화된다. 결국 이 영화가 그려 내는 웃음은 ‘신이 내린 선물’과 ‘인간이 짊어진 저주’가 한데 엉킨 양면적 음표다. 웃음 너머에서 번쩍이는 번개 같은 영감은 우리 모두가 욕망하지만 대부분 거머쥘 수 없는 황금률을 상징하고, 살리에리가 터뜨리는 속삭임 같은 신음은 그 황금률을 마주했을 때 인간이 취할 수밖에 없는 가장 솔직한 감정―질투―를 대변한다.
아마데우스 – 살리에리, 천재의 그림자 속 독백
살리에리는 영화 전반을 통틀어 가장 많은 독백을 가진 인물이다. 그 독백은 화려한 궁정의 벽지나 정교한 성의 스테인드글라스보다 훨씬 정밀하게 그의 내면을 비춘다. 그는 스스로를 ‘중재(中才)의 대변자’라 칭하며, 신에게 “왜 제 귀는 황홀을 듣고도 제 손은 그 황홀을 써내지 못합니까”라고 하소연한다. 여기서 살리에리라는 이름은 특정 인물을 넘어, 재능과 노력 사이에서 길을 잃은 모든 ‘범재’를 상징한다. 영화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애쓴다. 무도회에서 교황청 음계를 인용해 황제를 웃기고, 장엄미사에서는 소프라노의 호흡까지 계산한 완벽한 균형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한 번 들은 곡을 즉석에서 변주하고, 미완성 악보조차 악마적 완성도로 제출하는 순간, 살리에리의 치밀함은 무용지물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모차르트의 첫 공연마다 빠짐없이 찾아가 관객의 환호를 함께 누리며, 동시에 그 환호에 스스로 못을 박는다. 그의 삶은 ‘존경·욕망·경멸·모방’이라는 네 음계가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무한 카논(canon)이다. 살리에리가 결국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대필’해 주는 장면은 그의 파멸이자 구원이 교차하는 클라이맥스다. 손끝에서 쏟아지는 천재의 음표를 받아 적으면서 그는 처음으로 ‘신의 필적’을 직접 경험한다. 동시에 그 순간이 끝나면 더 이상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이 모순적 체험은 살리에리의 자존을 산산이 부수고, 그조차 의식하지 못한 나르시시즘의 잔해만 남긴다. 마침내 정신병원에서 “나는 모든 범재의 수호성인이다”라며 환하게 웃는 노(老) 살리에리의 모습은, 질투와 패배가 오랜 세월 어떻게 인간을 그로테스크한 평화로 이끄는지를 보여 주는 블랙코미디적 종결부다.
아마데우스 – 모차르트 진혼곡에 담긴 죽음의 예언
비 오는 새벽, 까만 망토를 두른 익명의 사내가 찾아와 주문한 ‘레퀴엠(진혼곡)’은 영화적 장치이자 모차르트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는 서사적 메타포다. 역사적으로 레퀴엠은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이 의뢰했으나, 영화는 그 의뢰인을 살리에리가 보낸 ‘죽음의 사신’으로 변주한다. 이때부터 레퀴엠은 단순한 의전용 미사가 아니다. 악보에 새겨지는 각 절(節)은 모차르트의 심장 박동과 동기화되고, 한 소절이 완성될 때마다 그의 생명은 조금씩 스러져 간다. 영화는 이를 시청각적으로 압축한다. ‘디에스 이레(Dies Irae, 진노의 날)’ 코러스를 작곡하는 장면에서는 기괴한 반음계 진행과 팀파니 굉음이 겹쳐지며, 모차르트의 청신경이 스스로를 찢는 듯한 고통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침대에 누워 헛헛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는 “악센트를 한 박자 늦춰야 영혼이 떠오르는 순간이 보인다”고 중얼거리는데, 이 대사는 그 자신이 느끼는 죽음의 스케줄을 고백하는 셈이다. 레퀴엠 대필 장면은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종교’와 ‘음악’, ‘삶’과 ‘죽음’의 네 갈래 실을 동시에 꼬아 삼위일체적 직조를 완성하는 순간이다. 두 사람이 밤새 교차로 부르는 선율은 마치 살아 있는 파이프오르간처럼 맥박치고, 새벽의 희뿌연 빛이 스튜디오를 적실 때 레퀴엠은 완성 직전에 멈춰 버린다. 모차르트가 눈을 감는 순간, ‘라크리모사(Lacrimosa, 애가)’는 8마디에서 끊긴다. 미완의 레퀴엠은 역설적으로 더욱 완벽한 예언이 된다. 그 공백은 모차르트가 남긴 유일한 침묵이며, 천재가 극도로 응축된 음악적 언어로 “여기서부터는 당신들이 채워 넣으라”는 당부이자 도전장이다. 결과적으로 영화 속 진혼곡은 음악사적 걸작이면서, 천재가 자기 죽음을 스스로 작곡한 ‘자필 유언’으로 격상된다.
아마데우스 – 우리에게 던지는 난처한 질문
상영관 불이 켜진 뒤에도 내 귓가에는 여전히 모차르트의 ‘콘페우투스(Confutatis, 영혼의 심판)’가 잔향처럼 맴돌았다. 살리에리가 뱉은 “나는 중재(中才)의 신부요, 범재들의 대변자다”라는 선언은, 사실 모차르트를 찬양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난처한 질문이었다. “당신은 타인의 탁월함 앞에서 어떤 감정을 선택할 것인가?” 영화는 노력의 윤리로 포장된 문화가 얼마나 손쉽게 질투와 배타성에 무릎 꿇는지를 고해성사처럼 고백한다. 동시에 모차르트의 천재성도 마냥 낭만적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술과 빚, 불안과 공황이 뒤섞인 혼란 속에서 태어나고, 그 대가로 35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치른다. 즉, 영화는 성공담이나 추문이 아니라 ‘재능과 인간성의 교환비’에 대해서 묻는다. 스크린 밖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SNS 타임라인에 떠다니는 ‘누구는 삼개월 만에 대기업 합격’, ‘누구는 20대에 억대 수익’ 같은 기사 제목에 자연스레 살리에리의 초라한 그림자를 얹어 보았다. 질투가 목울대를 간질일 때마다, 살리에리가 정신병원 복도에서 휘파람을 불며 “모든 범재들이여, 내가 너희를 용서하노라”고 외치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 장면은, 실패와 열등감이 꼭 악(惡)만은 아니라는, 어두우면서도 어딘가 유머러스한 깨달음을 전한다. 덕분에 나는 오늘도 평범한 악보 위에 삐뚤빼뚤한 음표를 얹어 본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지만, 적어도 내 삶의 레퀴엠은 내가 쓰고 있다는 주권을 확인하기 위해. 영화 《아마데우스》는 그렇게, 천재를 바라보는 범재의 심장을 해부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일상적 심포니를 다시 조율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