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싱 스트리트 – 불황 속 10대들의 뉴웨이브 생존기
1980년대 중반 아일랜드 더블린, TV에서는 “청년들의 영국 이주 러시”라는 절망적인 뉴스가 반복된다. 아버지의 실직, 어머니의 권태, 형제들의 장래 불안이 골목마다 곰팡이처럼 번지던 그 시절, 싱 스트리트의 아이들은 매일 학교 담벼락 아래에서 “우린 왜 여기 갇혀 있지?”를 되뇌어야 했다. 주인공 코너 또한 예외가 아니다. 중산층이었던 집안은 경기 침체를 버티지 못하고 파산 직전까지 내몰리고, 그로 인해 그는 학비가 저렴한 크리스천 브라더스 스쿨에 반강제로 전학을 가게 된다. 검은 구두 규정을 강요하는 교장, 양복 빛깔까지 간섭하는 수도사 선생, 그리고 복도 끝에서 주먹질을 일삼는 불량배들까지—학교는 더블린의 경제처럼 낡고 폭력적이며 차갑다. 하지만 바로 그 틈에서 라디오를 타고 건너온 듀란듀란과 더 큐어의 ‘뉴웨이브’ 사운드가 코너의 귀를 잡아챈다. 불황은 아이들의 통장을 비웠지만, MTV가 투하한 영국 싱글 차트는 머릿속 상상력을 넘칠 만큼 채워 줬다. “돈도 직업도 미래도 없다면? 대신 밴드를 만들면 되잖아!”라는 무모한 외침이 교실 천장을 뚫고 나오고, 코너·대런·에이먼·엔긱·래리·가리까지 여섯 명은 직접 기타를 개조하고, 엄마 화장대를 털어 아이섀도와 립스틱으로 뉴로맨틱 분장을 시도하며, 악기보다 낡은 창고를 리허설 룸으로 개조한다. 밴드명 ‘Sing Street’—학교 이름을 그대로 차용한 이들의 방벽 없는 선언은, 더블린 10대들이 ‘이주’ 대신 ‘연주’로 불황을 돌파하겠다는 생존전략이자 인디펜던스 독립선언이었다. 17퍼센트 실업률이 기록된 거리 위에서 그들이 손에 쥔 것은 오직 중고 기타, 싸구려 드럼, 그리고 “우린 살아남을 거야”라는 집단 최면뿐. 그렇게 싱 스트리트는 로비 밴드도, 장학금도 아닌 순수한 현실부적(不敵)형 DIY 밴드로 탄생한다.
싱 스트리트 – 첫사랑이 밴드를 만들어 버렸다
코너가 집 담벼락조차 넘어본 적 없는 ‘미션 스쿨 찐루저’에서 단 하룻밤 만에 “프런트맨”으로 환골탈태한 출발점은 다름 아닌 ‘첫사랑 엔진’이다. 교문 건너편 우편함 옆—햇빛마저 영화 조명처럼 비추던 그 순간, 모델 지망생 라피나가 담배를 물고 등장한다. 보라색 아이섀도와 검정 볼드 립, 그리고 “런던으로 뜰 거야”라는 비행계획은 15세 소년의 심장을 단 한 방에 관통시킨다. 문제는 그녀에게 “밴드 뮤직비디오에 출연하지 않을래?”라고 거짓 섭외를 해 버렸다는 것. 가슴은 뛰지만 밴드는커녕 기타 줄 하나 만져본 적 없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창작의 급행열차를 끊어 준다. 집에서 ‘뮤직 카세트계 구루’로 은둔하던 형 브렌던이 내어 준 듀란듀란 LP는 노트 대신 가슴팍에 꽂히고, 잠을 설친 채 새벽 3시에 써 내려간 첫 자작곡 「The Riddle of Model」은 말 그대로 ‘수수께끼 모델’ 라피나를 향한 랩소디다. 지난 밤까지 ‘틀린 문법 일기장’에 머물던 코너의 영어 단어들이 갑자기 운율과 후렴구를 갖추고, 에이먼의 다락방은 순식간에 레코딩 스튜디오로 변신한다. 이 곡과 함께 찍은 VHS 뮤직비디오에는 벽지와 렌즈플레어, 과장된 슬로모션, 미완성 의상이 난무하지만, 라피나가 코너를 바라보는 0.1초의 눈빛은 세계 최고 레이블의 화려한 카메라도 잡아내지 못할 ‘진짜’ 에너지다. 사랑이란, 미숙함도 콘셉트로 승화시키는 반칙 같은 촉매제. 그렇게 “아직 코드는 서툴러도 마음만은 완전 연소”라는 고백이 이어지며, 밴드는 첫사랑형 엔진음을 배경삼아 학교 강당·공원·주차장을 무대로 노래 제목만큼이나 간질간질한 ‘셋 리스트’를 늘려 간다. 라피나의 붉은 재킷과 코너의 하얀 니트, 비눗방울처럼 터지는 신시사이저의 알맹이 속에서 싱 스트리트는 점점 더 선명한 색채를 띄고, 관객도 그 설렘의 데시벨을 체감한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첫사랑은 통과의례”라는 클리셰 대신 “첫사랑은 밴드를 만든다”라는 신선한 등식을 제시한다. 그 상대가 짝사랑이든, 이루겠다고 따라 나선 사람이든, 어쨌든 그 떨림이 없었다면 노랫말도, 뮤직비디오도, 학기말 공연 포스터도 존재하지 못했다. ‘좋아한다’라는 감정은 결국 창작을 현실로 소환하는 가장 순수한 마그네슘이니까.
싱 스트리트 – 교장·폭력배를 디스하는 브라운슈즈 송
“검정 구두가 아니라면 맨발로 다니게!” 교장 브랙스터의 폭압적 한마디로 시작된 ‘갈색 구두 몰수 사건’은 싱 스트리트가 첫 디스곡을 쓰게 만든 결정적 캐치프레이즈다. 가난 때문에 새 구두를 살 수 없었던 코너는 진흙 묻은 갈색 로퍼를 신은 채 운동장에 서 있고, 교장은 군대식 규율로 모욕감을 준다. 그러나 이 분노는 곧바로 기타 리프가 되고, 베이스 슬랩이 되고, 드럼 하이햇이 된다. 밴드멤버들은 학교 지하 빈 교실에 포터블 레코더를 세워 놓고 「Brown Shoes」를 4트랙 데모로 녹음한다. 가사 첫 줄—“검은 법칙 아래 숨 막혀 버린 갈색 자유”—는 교장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이자, 폭력배들의 주먹질을 ‘꼰대 톤’으로 욕보이는 영리한 패러디다. 당일 점심시간, 코너는 용기를 내어 쿼드(중정) 스테이지에서 이 곡을 라이브로 부른다. 찌그러진 스피커에서 울리는 음량은 빈약하지만, “I’m wearing brown shoes/But I’m dancing in my blues”라는 후렴이 반복될수록 폭력배들의 조롱은 오히려 기운을 잃고, 급기야 한쪽 구석에서 눈치를 보던 동급생들이 두 발을 굴려 박자를 맞춘다. 여기서 영화는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규제와 폭력으로 쌓은 벽은 음악 한 곡, 가사 두 줄로도 뒤흔들 수 있다.” 실제로 ‘브라운슈즈 송’ 이후 교장의 권위는 조금씩 균열이 가고, 교실 복도에서 벌어지는 왕따 문화 역시 눈에 띄게 수그러든다. 코너는 이 승리를 “락 비둘기”처럼 전파하기 위해 학기말 디스코 파티 무대에 오를 때, 교장을 향해 ‘춤사위 리벤지’를 선사한다. 무대 뒤편 스크린에는 갈색 구두가 춤추는 애니메이션이 반복되고, 학생들은 검은 교칙 대신 알록달록 네온 조명을 따라 몸을 튼다. 결국 “브라운슈즈”는 싱 스트리트가 세운 두 번째 방어선이자, 음악이 가진 사회·제도 비판 기능의 체험 교과서다. 작은 노래 한 곡이 주머니 돈보다 강한 무기가 되는 순간, 코너 일행은 ‘스쿨 독립 투쟁기’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관객도 깨닫게 된다. 1980년대든 2020년대든, “디스할 게 있으면 일단 곡부터 쓰라”는 불변의 밴드 전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싱 스트리트 – 스무 살의 여름이 떠오르다
극장 불이 켜지고 엔드크레딧에 ‘Drive It Like You Stole It’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자연스레 스무 살 여름을 추억했다. 4.5평 자취방에서 친구 셋과 기타 앰프 하나를 번갈아 꽂으며 “우리도 공연 한번 해볼까?”라고 장난쳤던 그 저녁. 기술도, 예산도, 심지어 목적도 뚜렷하지 않았지만 단 한 가지—“나 지금 심장이 엄청 뛰어”—라는 감각만은 확실했다. 싱 스트리트는 그 잊힌 심장 박동을 귀에 확 붙여 준 영화였다. 코너처럼 우리도 숱한 ‘브라운 구두 규정’에 막혀 왔다. 학점 컷, 스펙, 불황, 코로나, 2030세대 주거난… 리스트를 쓰다 보면 노트 한 장이 모자랄 지경이다. 하지만 존 카니 감독은 냉소 대신 기타 피크를 쥐여준다. “조건 맞출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가진 장난감으로 일단 노래를 붙여 보라”는 당부처럼.
물론 영화가 제시하는 도피적 로망—보트 타고 런던으로 도주하기—가 현실 해답일 리는 없다. 그러나 코너와 라피나가 새벽바다를 가르며 맞는 폭풍우는 오히려 솔직하다. 미래는 늘 흔들리고, 젖고, 파도에 엎어질 가능성을 품고 있다. 중요한 건 옆자리에 누가 있고, 배 밑바닥에 어떤 노래가 실려 있느냐다. “첫사랑·음악·형제애·디스곡”이라는 네 줄짜리 화음만으로도, 싱 스트리트는 불황의 섬에서 런던의 별빛까지 항해 가능한 보트가 되었다.
나는 상영관을 나오는 길에 오래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중고 기타를 떠올렸다. 먼지를 털고 줄을 갈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혹시 모르잖나. 내 갈색 구두 디스곡이, 다음엔 누군가의 심장을 울릴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