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 환상 동물의 축제 속 불편한 진실
영화가 막을 올리면 가장 먼저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거대한 트렁크 속 미니어처 정원, 파리 하늘을 가르는 유니콘 마차, 그리고 서커스 천막에서 날뛰는 신비한 동물들이다. 반짝이는 꼬리를 흔들며 카메라 앞을 가로지르는 리플러가 귀여움을 폭격하는 순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 이 시리즈가 돌아왔구나’ 하고 환호한다. 그러나 환호 뒤에는 금세 묘한 불편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전작에서 뉴트가 동물과 교감하며 도시를 뒤집어 놓던 유쾌한 난장판은 이번 편에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환상 동물은 본편 스토리와 별개로 쇼케이스처럼 진열될 뿐이다. 마치 벼룩시장 한복판에 진귀한 약초를 늘어놓고는 값은 흥정조차 하지 않은 채 ‘보는 맛이면 됐지?’라며 뛰쳐나가는 장사꾼을 만난 기분이다. 뉴트의 손짓 하나에 동물이 고개를 끄덕이고, 관객도 함께 웃을 수 있던 그 ‘교감’의 순간은 시종일관 삭제되고, 스토리는 인간 정치 드라마가 뜨겁게 시동을 건다. 물론 동물이 토템처럼 자리 잡고 세계관을 넓혀 주는 순간도 분명 있다. 멸종 직전이라던 자우가 은근슬쩍 다자녀(?)를 뽐내며 등장한다거나, 중국 전설 속 짐승 조가오를 모티브로 한 조우우가 중력조차 무시하는 위용을 과시할 때, 판타지 산소 통로는 잠깐 열린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귀엽고 경이로운 생물은 죄다 ‘스토리를 위한 속성 아이템’으로 급히 소환되었다가 퇴장한다. 여기에는 ‘동물 보호자’ 뉴트가 왜 극의 중심에 서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이 빠져 있다. 결국 우리는 “환상 동물”이라는 간판이 걸린 축제에서 진짜 축제가 아닌, 동물의 탈을 쓴 정치 브리핑을 듣는 기분을 맛본다. 나 역시 처음엔 꽤 들떠 있었다. 극장 조명이 꺼지고 첫 장면에서 자우의 금빛 갈기가 스크린을 가를 때 팝콘을 들고 “그래, 이런 황홀한 동물들로 두 시간을 채워 주겠지” 하고 기대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뒤 내 손에 남은 것은 바삭함이 사라진 팝콘 반 봉지와 ‘뉴트는 왜 굳이 뉴트여야 했을까’라는 철 지난 낙엽 같은 질문뿐이었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 덤블도어·그린델왈드 두 천재의 파멸적 케미
해리포터 본편에서는 ‘흑과 백’으로 나뉜 거대한 전쟁 뒤편에만 희미하게 서술되던 두 인물의 과거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주드 로가 연기한 젊은 덤블도어는 고풍스러운 코트를 펄럭이며 “나는 아직 교장도 아니고, 세상의 모든 책임을 떠안기엔 조금 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눈빛을 쏘아 댄다. 반대로 조니 뎁의 그린델왈드는 백발과 오드아이라는 물리적 이질감으로 ‘마법계의 예언적 괴물’처럼 화면을 쓸고 간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딘가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를 닮았다. 금지된 피를 섞어 만든 불멸의 피, 함께한 어린 시절의 서재, 서로의 거울이 되어 주었던 열정. 하지만 머리카락 한 올, 주문 한 줄 차이로 둘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다.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호그와트 지붕 위에서 반짝이던 두 사람의 ‘혈맹’ 플래시백이다. 장면은 짧지만, 그 짧음이 오히려 둘의 관계를 더 애달프게 견인한다. 마법 세계에서조차 ‘깨질 수 없는 맹세’는 가장 짙은 사슬이다. 덤블도어는 어린 시절 자신이 직접 엮어 넣은 족쇄 덕분에 스스로 싸움에 뛰어들 권한을 잃었고, 그린델왈드는 그 사슬을 이용해 덤블도어를 조롱한다. 관객은 흑백 논리를 거부한 두 천재의 균열을 바라보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가 이 흥미로운 갈등을 깊이 파고들기보다 ‘다음 편으로 넘겨요’라는 듯 아슬하게 멈춘다는 것이다. 서로 향한 연민, 질투, 허무, 열망이 겹겹이 덧입혀져야 할 대사들은 짧은 아이컨택과 “우리는 한때 같은 꿈을 꾸었잖아” 정도로 축약된다. 나는 극장을 나서며 두 배우의 호흡이 그보다 더 길고 뜨거웠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그랬다면 혹시 우리가 그린델왈드의 사상에 흔들리는 청중의 심리를 더 납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니 뎁 특유의 ‘속삭이는 악’과 주드 로가 품은 ‘품위 있게 망설이는 선’이 부딪힐 때, 스크린은 분명 전율했으니까. 안타깝게도 134분의 러닝타임은 이들의 위험한 화학 작용을 충분히 증류하지 못했고, 우리는 뜨겁게 끓다 만 약탕기를 안고 극장을 나서는 신세가 됐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 롤링 월드 확장의 기회와 한계
J.K. 롤링이 직접 각본을 쓰며 ‘마법 세계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언했을 때, 팬덤은 환호했다. 뉴욕, 파리, 베를린, 리우데자네이루까지 이어질 5부작 청사진은 “호그와트 담장 너머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증명이 될 터였다. 하지만 두 번째 영화에서 느껴지는 팽팽한 장벽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세계관을 확장한다는 건 ‘새로운 장소와 설정을 늘어놓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 장소와 설정을 관통하는 생명줄이 필요한데, 이번 영화는 굵은 동맥 대신 가는 모세혈관만 여기저기 얽어 놓은 모양새다. 파리의 마법 정부, 세르크 아르카누스, 니콜라스 플라멜의 안전 가옥, 그리고 2차 대전을 예언하는 해골 물담배까지, 하나하나 떼어놓으면 색다르고 신선하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가 주제 의식으로 연결되지 못하니, 관객은 각각의 이스터에그를 줍느라 바쁜 “고난도 보물찾기”에 내던져진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캐릭터가 세계관 확장의 ‘관점’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뉴트는 여전히 동물을 사랑하지만, ‘동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파리 사회를 해석하지 않는다. 티나는 오러이지만 오러답게 미스터리를 풀어 주지도 못한다. 퀸니는 머릿속을 읽는 능력을 갖췄으나, 그 능력이 정치나 이념 갈등을 체험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발전하지 못한다. 결국 플롯은 “A 지역에 가서 힌트 찾기 → B 지역으로 이동” 방식의 RPG 퀘스트처럼 흘러간다. 나는 상영 도중 이런 상상을 해봤다. 만약 뉴트가 오브스큐리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리 하층민과 함께 생활하며 ‘마법과 정치가 만나는 진흙탕’을 동물 시선으로 관찰했다면 어땠을까? 혹은 퀸니가 사랑법과 차별법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기는 고민을 직접 브리핑하기보단,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프랑스인들의 편견을 관객에게 실시간으로 들려줬다면? 그랬다면 롤링 월드의 확장은 ‘배경지식을 늘어놓는 세계 구축’이 아니라 ‘인물과 경험을 확장하는 서사 모험’으로 체감됐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번 영화는 팬들의 데이터베이스에 항목 하나를 추가해 준 대신, ‘이야기의 숨결’을 나눠주기를 잊어 버렸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 씁쓸한 공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조명이 켜졌을 때, 나는 빈 좌석 사이로 흐르던 팝콘 냄새 대신 이상하리만큼 씁쓸한 공기를 맡았다. 두 시간 넘게 이어진 스펙터클과 화려한 미술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켠은 허전했다. ‘신비한 동물’이라는 매혹적 약속은 동전의 앞면이었다. 뒤집어 본 뒷면에는 복잡한 정치 드라마, 급히 떼어낸 스핀오프 떡밥, 그리고 다음 편을 위한 거대한 쉼표가 새겨져 있었다. 환상 동물을 사랑해 마지않는 팬으로서 나는 다음과 같은 다짐을 내 마음에 세겨 두었다. “새 시리즈에 열광하되, 그 열광이 나를 눈멀게 놔두진 말자.” 기차역 플랫폼에서 첫 호그와트 급행을 탔던 십대 시절처럼 무조건적인 믿음을 주기엔, 이제 우리는 적잖은 영화적 경험치를 쌓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기대를 접을 필요는 없다. 롤링 월드가 가진 서사의 잠재력은 여전히 방대하고,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관계가 품은 서늘한 드라마는 앞으로도 깊어질 여지가 충분하다. 언젠가 뉴트가 정말로 동물적 시선으로 세계를 재정의해 주길, 퀸니가 사랑과 자아의 균열을 섬세하게 풀어내길, 크레덴스가 ‘누구의 혈통’이 아닌 ‘자신의 서사’를 갖게 되길 바란다. 그러니 한숨 돌리고, 그래도 다시 트렁크를 열어 보자. 혹시 모르지 않은가. 다음 편에서, 아직 이름조차 모르는 신비한 생물이 날개를 퍼덕이며 우리를 더 깊고 낯선 이야기 속으로 데려가 줄지도. 마법이란, 때로는 작가와 관객 모두가 같은 정도의 모험심을 품을 때 완성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