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 진실을 밝히는 탐사여정

영화 스포트라이트 포스터
영화 스포트라이트 포스터

스포트라이트 – 펜과 수첩이 파낸 성역의 균열

보스턴 글로브의 허름한 편집국, 낡은 철제 캐비닛을 가득 채운 과거 기사 스크랩 사이에서 ‘스포트라이트’ 팀은 언제나처럼 조용히 출발한다. 펜 끝과 종이 냄새가 섞인 공기가 이들에겐 탐험대가 휴대하는 산소통 못지않다. 작은 수첩에 빼곡히 적히는 메모 한 줄, 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인 전화번호가 자칫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성역이라 불리던 거대 기관의 균열을 비집는 거래처다. 영화는 사제복의 흰 깃마저 거룩함 너머의 어두운 얼룩으로 바꿔 버린다. 신부 한 명의 추악한 범죄가 아닌, 제도와 공동체 전체가 짜 맞춘 거대한 담합 구조임을 드러낼 때, 관객은 “이 작은 메모장이 정말로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동시에 묘한 전율을 느낀다. 마티 배런이 취재 명령을 내리자마자 도시 곳곳에서 서류는 사라지고, 법원 창구는 이유 없이 문을 걸어 잠근다. 그러나 취재팀은 포기하지 않는다. 기자 로비는 오랜 친구에게, 사샤는 성추행 생존자에게, 마이크는 변호사에게, 벤은 기록 사본이 묻힌 낡은 서고에 한 발씩 다가간다. 모두가 시선 돌린 틈새에서 ‘펜과 수첩’이야말로 가장 날카로운 송곳이 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집요하게 반복한다. 이들의 한 획 한 획이 모여 결국 면책특권이라는 두꺼운 콘크리트에 점점 더 큰 균열을 만든다. 그 균열은 오래된 성화(聖畵) 위에 기어이 금사슬처럼 번져 나가고, 마침내 꺾어질 수 없을 것 같던 고귀한 기둥이 스스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를 관객에게 들려준다.

스포트라이트 – 기자들의 집착, 진실의 장벽을 깨다

탐사보도가 품는 집착은 때로 광기에 가깝다. ‘법정 문건이 봉인되어 있다’는 말에 마이크 레젠데스는 즉시 도심 반대편 법원으로 차를 돌린다. 철문은 열리지 않고, 서기(書記)는 고개를 내젓지만 그의 눈빛엔 오히려 불길한 불꽃이 켜진다. “닫혀 있으면 더 열어야지”라는 무언의 독백. 로비 로빈슨은 자신이 수십 년 전 지나쳤던 제보 편지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숨을 삼킨다. “그때 내가 묻어 버린 건, 편지가 아니라 사람의 삶이었구나.” 영화는 이 집착의 무게를 감상용 드라마가 아니라, 자기반성과 공동체적 책임이라는 두 축으로 꽉 붙잡는다. 취재팀은 오로지 ‘사실’만을 향해 달리지만, 사실 너머에는 피해자의 파편화된 기억, 신앙 공동체가 부여한 죄책감, 도시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교회 자본 같은 보이지 않는 장벽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그 장벽이 워낙 높고 두꺼워 정부·사법·경찰 모두 머뭇거리지만, 기자들은 오히려 장벽의 높이를 척도 삼아 집착의 강도를 끌어올린다. 새벽까지 매달려 교구 명부에서 ‘병가·전출·치료’ 같은 은어를 일일이 색연필로 표시하고, 수십 년 치 전화번호부에서 같은 주소를 공유한 신부 이름을 엑셀로 정리한다. 관객이 보는 건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다. 13명, 30명, 87명… 통계가 늘어날수록 기자들의 창백한 얼굴에도 ‘우리가 정말 마주치고 있는 괴물의 실체’가 분명해지는 공포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 공포는 곧 분노로, 분노는 다시 활자로 전환된다. 활자는 활력(活力)과 동의어가 되어 도시를 흔든다. 진실의 장벽은 결국 이 집요한 과정 자체—즉 ‘보도 준비’라는 이름의 기다림과 검증—에 서서히 부식되어 간다. “다른 언론이 먼저 쓰기 전에…” 하고 다급하게 말하던 순간을 넘어, “시스템 전체를 겨눌 정확한 탄환이 나올 때까지”를 선택한 스포트라이트 팀의 집착은 그래서 더욱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스포트라이트 –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쏘아 올린 불꽃

필 사비아노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인 듯 거칠었다. “우린 피해자가 아니에요, 생존자예요.” 그의 말 한 줄이 스포트라이트 팀의 취재 방향을 바꾼다. 사건의 주어가 교회도, 추기경도 아닌 ‘아이들’이라는 사실. 영화는 생존자들이 입을 떼는 그 순간을 기적처럼 다룬다.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내밀한 상처, 신부의 부드러운 손끝이 순식간에 폭력으로 돌변하던 숨막히는 공간, 어머니에게 털어놓으려다 “신부님은 그런 분이 아니셔”라는 한마디에 굳어 버린 입술…. 이 증언들은 그저 과거 회개의 고백이 아니다. 백여 명 신부 명단을 향해 타오르는 촛불이며, 동시에 수십 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사회 감각을 녹이는 불씨다. 영화는 카메라를 피해자의 얼굴에 오래 머문다. 울음을 참느라 턱을 떨고, 손가락으로 커피잔을 학대하듯 두드리는 작은 움직임까지 놓치지 않는다. 관객은 그 불규칙한 진동에서 ‘말해지지 못한 시간’을 듣는다. 취재팀도 마찬가지다. 사샤 파이퍼는 녹취기를 꾹 멈춘 뒤, 인터뷰이를 건네다 준 손수건 위에 자신의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 이 공감의 물방울은 불꽃을 더 큰 화염으로 키운다. 언론이 정말 해야 할 일은 ‘대변’이 아니라 ‘확성’이라는 진실—이미 존재하던 목소리를 세상에 울려 퍼지게 만드는 역할—을 영화는 잊지 않는다. 기사 게재일 아침, 로비의 사무실 전화기가 폭포처럼 울린다. 화면엔 고작 몇 줄의 활자지만, 그 뒤편에는 ‘이제는 말을 해도 된다는 확신’을 얻은 수백, 수천의 생존자 숨결이 겹쳐진다. 피해자 목소리가 일으킨 불꽃은 이렇게 도시 전체를 밝히는 성화(聖火)가 된다.

스포트라이트 – 미디어란 무엇일까?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불빛이 마치 스포트라이트 팀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던 조명 같았다. “사실이 사람을 구한다”는 명제를 귀로만 듣다, 눈으로 확인한 밤이었다. 동시에 씁쓸함도 피할 수 없었다. 가톨릭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어디에나 존재할 ‘성역’과 ‘침묵 카르텔’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기자가 아닌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귀 기울이기’와 ‘기억하기’일 것이다. 생존자들이 던진 증언, 기자들의 집착이 일궈낸 자료 더미, 그리고 결국 활자로 찍혀 나온 진실—이 모든 것이 다시 묻히지 않도록 꾸준히 들여다보는 일. 언젠가 나 또한 누군가의 고백을 들을 순간이 온다면, 스포트라이트 팀처럼 멈칫하지 않고 펜을 꺼낼 수 있을까, 아니면 눈을 돌릴까. 영화는 그 질문을 관객 각자의 마음 한복판에 콕 박아 두고 퇴장한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출근길 지하철에서, 나는 무심코 신문 한 구석의 작은 탐사기사에 시선을 멈췄다. 어쩌면 스포트라이트란 거창한 팀이 아니라도, A4 한 장짜리 진실에서부터 세상이 바뀌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언론을 향한 불신과 뉴미디어의 소음 속에서도 ‘귀 기울이고 기록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역시 아직은 절망을 미뤄 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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