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모든 계절 – 텃밭이 가르쳐 준 삶의 리듬
텃밭에는 시계가 없다. 봄에 씨를 틔운 완두콩이 팔뚝만큼 자랄 때까지 흙은 아무 말 없이 기다리기만 한다. 영화 속 톰과 제리 부부가 매일같이 고무장갑을 끼고 땅을 뒤적이는 것도, 호박 덩굴 사이에 고개를 내민 송충이를 살포시 다른 잎으로 옮기는 것도 결국 그 침묵의 시간을 몸으로 헤아리는 과정이었다. 나는 화면 너머의 두 사람이 호미 대신 손가락으로 흙을 파고 씨앗을 묻을 때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삶의 리듬’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사실은 이처럼 단순무식한 동작의 반복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봄의 텃밭은 기대로 가득 차 있다. 움츠린 종자들이 겨우내 축적한 에너지를 한꺼번에 폭발시키듯 싹을 틔우는 순간, 어떤 불안도 그 앞에서 작아진다. 여름은 다르다. 하루 아침에 ‘정글’로 변해 버린 밭에서 인간은 오히려 방해꾼에 가깝다. 해충을 털어 주다 보면 까끌까끌한 잎사귀가 팔뚝을 긁고, 굵은 비가 쏟아지면 갈퀴로 냇물 길을 내야 한다. 영화는 이 수고로움을 징벌이 아니라 축복으로 보여 준다. 가을이 되면 그 모든 노동이 알알이 달콤한 수확으로 돌아오고, 겨울의 텅 빈 고랑에는 지난 계절의 노고가 낙엽처럼 누런 웃음으로 덮인다. 텃밭은 실패에도 후하다. 모종을 잘못 심어 도마도 줄기가 시들어도, 다음 해엔 다시 씨를 뿌리면 그만이다. 톰과 제리는 그 순환을 30년 넘게 반복하며 “조금 늦어도 괜찮다”는 교훈을 체득했다. 계절마다 스스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운 셈이다. 그런 텃밭이 우리에게 내민 메시지는 단순하다. 땅이 허락하는 속도를 넘어설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이라는 흙에 손을 묻힌 사람만이 ‘내일’이라는 씨앗을 만질 자격이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끝난 뒤 베란다 한켠 화분 속 흙을 긁적여 보았다. 잘못 치다 말아 삐죽 올라온 허브 뿌리가 어쩐지 나를 닮아 있었다. 나는 작은 손톱으로 뿌리를 다시 묻고 살짝 다독였다. 아무래도 올해는 물을 조금 덜 주어야 할까, 아니면 햇빛을 더 보여 줘야 할까. 그 순간 마음속에서도 분침이 ‘틱’ 하고 한 칸 움직였다. 텃밭이 가르쳐 준 리듬은 그렇게 하루를, 나아가 내 인생을 조금씩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게 했다.
세상의 모든 계절 – 계절이 바뀌어도 변치 않는 식탁
톰과 제리의 식탁을 처음 본 순간, 나는 그 너그러움에 압도되었다. 손수 키운 감자로 끓인 스프, 손바닥만 한 호밀빵 위에 치즈를 얹어 오븐에서 살짝 구운 토스트, 그리고 제리가 텃밭에서 금방 따온 루콜라에 발사믹을 뿌려 낸 샐러드까지. 음식 하나하나가 요란한 장식 대신 정직한 향으로 시청각을 깨웠다. 재미있는 건 메뉴보다 자리 배치였다. 부부는 언제나 식탁의 긴 쪽에 나란히 앉는다. 맞은편이 아니라 옆자리. 삶의 모퉁이에 각자 들어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싶은 사람들의 선택이다. 계절이 바뀌면 재료가 달라지지만 자리 배치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여름 스튜에 들어가는 토마토가 늦가을 당근으로 바뀌고, 겨울 파이는 봄 파르페로 갈아타도 둘의 어깨가 맞닿는 위치는 그대로다. 식탁은 두 사람이 세상과 맺는 조용한 계약서 같았다. 켄이 불쑥 찾아와 와인 잔을 비울 때도, 메리가 자신과는 상극인 젊음과 사랑을 질투하며 술잔에 독설을 타할 때도, 첫 숟가락을 뜨기 전 제리가 나지막히 묻는다. “괜찮겠니?” 그 짧은 문장이 대화를 요리한다. 부부의 식탁이 보여 주는 가장 큰 비결은 화려한 레시피가 아니라 ‘함께 먹을 사람’이라는 양념이었다. 음식물은 위장에서 소화되지만 밥상머리의 안온함은 심장에서 녹아든다. 문득 고향 엄마의 밥상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반찬 투정을 했던 날도 결국 빈 그릇만 남았던 저녁시간, 바쁜 막내동생이 스마트폰을 보며 밥을 휘휘 비웠던 추석 다음 날 아침. 식탁이라는 작은 평면 위에서 우리는 각자의 속도와 온도를 잠시 맞춘다. 영화 속 식탁도 그랬다. 계절 따라 달라지기는커녕, 자리를 지키는 사람의 존재가 음식을 ‘의미’로 바꿔 준다. 그래서인가. 객석에서 돌아와 늦은 저녁을 차릴 때, 나는 아주 사소한 결심을 했다. 냉장고 속 남은 카레를 그냥 데우지 않고, 작은 그릇에 피클을 얹어 옆으로 곁들였다. 그리고 모처럼 의자를 맞대었다. 혼자 먹더라도 식탁을 지켜 보자는 고집이 새삼스러운 의식처럼 느껴졌다. 계절이 지나도 변치 않는 가치, 영화가 내게 던진 두 번째 레시피는 ‘누구와 맛을 나누는가’였다.
세상의 모든 계절 – 노년이 들려준 시간의 예의
영화의 마지막 계절, 겨울. 흰 서리가 정원을 덮고 텃밭 고랑은 잠에 든다. 톰과 제리는 여전히 따뜻한 주전자 옆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있다. 이 노부부가 내게 가르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예의’였다. 젊은 날의 사랑은 순간의 온도로 타올라 쉽게 번득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감정이라는 불은 스스로 작아져야 오래 간다. 그 대신 장작을 갈아 주듯 상대에게 말 걸기, 웃음 건네기, 티 끓이기 같은 작은 시동을 끊임없이 걸어야 불씨가 살아남는다. 톰은 자신의 형 로니의 쓸쓸한 노년을 바라보며 한숨짓지만, 당장 따끔한 조언 대신 겨울 구두 한 켤레를 내민다. 추위부터 막고 보자는 무언의 배려. 제리는 메리가 눈시울을 붉히며 “나도 당신들처럼 살고 싶었어”라고 고백하자 한숨 대신 뜨거운 차를 건넨다. 책임을 묻지 않고 위로부터 건네는 사람들. 나는 두 사람이 보여 준 ‘시간의 예의’를 따라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빠른 답변이 오지 않는 문자, 부담스러운 부탁 전화, 더딘 성장 앞에서 들끓는 조바심을 잠시 내려놓았다. 매일 저녁 집 현관 앞 화분에 물을 주며 속삭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괜찮아. 내일 또 보면 돼.” 그 문장은 톰과 제리가 내 귀에 속삭인 인사 같았다. 시간에게 예의를 지킨다는 것은 상대의 호흡에 맞춰 걷는 일이다. 스물의 시간을 사는 친구에게는 스물의 리듬으로, 쉰의 시간을 살고 있는 부모에게는 쉰의 박자로. 톰과 제리가 남긴 겨울빛 교훈 덕분에, 나는 늦겨울의 찬 공기마저 온전히 호흡하게 되었다. 노년은 끝이 아니라 다른 속도의 삶, 그리고 다른 아름다움의 시작이었다.
세상의 모든 계절 – 내 지난 계절
엔딩 크레딧이 천천히 올라갈 때, 나는 영화관 벽이 아니라 내 지난 계절들을 스크린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고시원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스물셋의 겨울, 야근 뒤 김밥 한 줄을 나눠 먹던 동료와 웃던 서른의 봄, 그리고 사랑이 끝나버린 마흔의 늦여름. 그 모든 날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허무와 함께 손을 흔들었지만 영화는 다정하게 끄덕였다. “아니, 남았어. 너의 사계절로.” 톰과 제리 부부의 잔잔한 일상은 격정도 반전도 없었지만, 그래서 더 긴 파문으로 내 마음에 흘러들었다. 나는 지금도 자주 서두른다. SNS로 남의 속도를 엿보며 뒤처질까 조바심내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자꾸 새로운 씨앗만 덮어 쓴다. 그러나 발밑의 땅을 정말 돌본 기억은 드물었다. 영화는 속삭였다. “흙을 만져 봐. 뿌리가 있다는 걸 깨달으면 불안은 줄어든단다.” 상영관을 나서던 그 밤, 찬바람이 볼을 스쳤다. 나는 꽉 여민 코트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어머니께 짧은 문자를 보냈다. “텃밭 무 봄에 파종했어? 주말에 내려가면 도와줄게.” 전송 버튼을 누르자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세상의 모든 계절은 결국 돌아온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내가 아직 사랑할 줄 모르는 나 자신도 그 순환 속에서 조금씩 씩 웃을 것이다. 영화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그래서 더 단순했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태도, 그리고 그 태도의 첫 걸음은 ‘지금 여기’를 정성스레 돌보는 일이라는 것. 내일 아침, 텀블러에 커피를 채워 출근하듯, 그렇게 나는 또 한 페이지의 계절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