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루클린 – 두 바다 사이, 향수병의 궤적
엘리스가 새벽 어스름에 들고 일어난 여행가방은 사실 두 개였다. 하나는 속옷과 모직가디건을 담은 물건의 가방,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가방’이었다. 배가 퀸스타운 항을 떠나자마자 감정의 가방은 거센 바닷바람을 들이마시듯 부풀었다. 밀려오는 파도처럼 고향 냄새가 쉴 새 없이 코끝을 콕콕 찔렀고, 식도 점장 밑에서 주말마다 들었던 모욕들이 역설적으로 따뜻한 기억처럼 떠올랐다. 신부님이 건넨 멀미약조차 입안에서 솜사탕처럼 녹아버릴 만큼, 향수란 병은 호되게 달콤했다. 미국행 배에서 엘리스는 “나는 아일랜드에서 몰려온 빈방 하나짜리 바람”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지만, 그 말속엔 아직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작은 바다’라는 두려움이 숨었다. 브루클린 다리를 처음 건너던 날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코끝을 문질렀던 건, 배안에서 부풀었던 그 감정의 가방을 몰래 접어 넣는 의식 같았다. 토니의 따뜻한 눈빛과 하숙집 수다 속에서 희미해지는 줄 알았던 향수병은, 언니 로즈의 부고 편지를 받는 순간 폭풍 같은 파도로 재차 몸을 덮쳤다. 그리움이란 녀석은 이민자의 등을 떠밀어 배에 태우지만, 동시에 발목을 붙들어 항구로 돌려세우는 모순의 짐이다. 두 바다—대서양과 마음의 바다—사이를 오가며 엘리스는 깨닫는다. 향수병은 완치되지 않는 질환이 아니라, 바다 위에서 인생의 중심을 찾게 하는 ‘나침반’과도 같다는 것을. 잔잔할 땐 잊히지만 폭풍우가 오면 가장 먼저 손이 가는 필수품처럼, 그녀의 향수는 앞으로 나아갈 좌표를 매번 새로 새겨준다.
브루클린 – 소설 원작이 품은 역사적 맥락
콜럼 토빈의 동명 소설은 1950년대 아일랜드 이민을 다룬다는 점에서 ‘개인의 러브스토리’라는 위장을 한 역사서다. 영화 속에서 엘리스가 항구를 떠나는 장면이 고작 몇 분 만에 지나가는 이유는, 관객 대부분이 배 위에 실린 거대한 맥락—식민지 후유증·감자 기근 이후 이어진 빈곤·가톨릭 공동체의 엄격함—을 이미 알고 있다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이지를 펼치면 토빈은 그 신뢰를 친절하게 뒤집는다. 그는 엘리스의 눈으로 “아일랜드를 움직이는 것은 잔혹한 경제지표가 아니라, 일요일 미사가 끝난 뒤 마당에서 나누는 수근거림”이라 말한다. 아일랜드 공동체가 ‘떠나는 사람’과 ‘남은 사람’을 구별하는 방식, 즉 “딸을 미국 보냈다더라”는 읍내 소문 한 줄이 여자의 미래를 결정짓는 현실은 오늘날 이주노동자의 사연과도 겹친다. 토빈은 또 이민 2·3세가 브루클린 골목에 세운 ‘작은 아일랜드’—펍, 교구, 신용협동조합—를 세밀하게 복원한다. 영화에선 잠깐 스쳐 지나가지만, 소설 속 밑그림을 알면 토니의 “브루클린에도 아일랜드 사람이 천지야”라는 대사가 지닌 역설이 선명해진다. 그들은 같은 도시 안에서조차 ‘우리’를 증명하기 위해 다시 섬을 건축한다. 동시에 토빈은 엘리스의 회계 공부와 토니 형제들의 건설회사 꿈을 통해, 1950년대 뉴욕이 이민자의 노동과 언어로 재설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원작은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고향을 떠난 이들의 노동·언어·사랑이 뒤엉켜 새 대륙을 짓는 무대 뒷면까지 비춘다. 엘리스가 두 남자 사이에서 망설이는 서사는 사실 ‘두 역사의 심장 박동’—해외로 확장된 아일랜드와 팽창하는 미국—사이에서 울리는 메트로놈이기도 하다.
브루클린 – 배에서 다리까지, 이동의 미학
영화는 ‘이동’이라는 단어를 무대 전환이 아닌 감정의 파노라마로 쓴다. 첫 장면의 스콜린 항구는 푸른 안개 속에 잠겨 있어 ‘미지’가 아닌 ‘미결’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배 갑판에서 카메라는 흔들림을 숨기지 않는다. 파도가 치면 엘리스의 몸도, 관객의 시선도 함께 기울어져 우리는 물리적으로 “떠나는 사람”의 어지럼을 체험한다. 컷이 바뀌어 브루클린 다리가 화면 중앙에 들어올 때, 렌즈는 이동을 멈추고 다리를 응시한다. 그 정지엔 의미가 있다. 배가 상징한 ‘어쩔 수 없는 이동’의 시간을 지나, 다리는 ‘선택 가능한 이동’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엘리스가 다리 위 전차 창문 너머로 맨해튼 스카이라인을 처음 보는 순간, 저 멀리 수많은 미지의 궤적이 직선으로 뻗어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눈빛을 바꾼다. 카메라는 곧장 백화점 에스컬레이터의 누그러진 속도로 전환되는데, 이 또한 이동이다. 다리 위에서 열린 가능성은 에스컬레이터의 규칙적인 리듬 속에서 ‘일상’으로 수렴된다. 영화 후반, 엘리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 플랫폼에 서 있을 때, 그녀는 다시 한 번 이동의 시작점에 선다. 하지만 이번 카메라는 더 이상 덜컥거리지 않는다. 렌즈가 삼각대를 박은 듯 안정적인 이유는, 이동 자체가 공포가 아니라 주체적 결정으로 바뀌었음을 시각적으로 말하기 위함이다. 마지막 장면, 브루클린 다리를 다시 건너며 엘리스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우리는 알아차린다. 배에서 시작된 ‘운명의 이동’이 다리에서 ‘자기선택의 이동’으로 완성됐음을. 이동은 장소의 변화가 아니라, 관점을 재배치하는 미학적 과정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이렇게 증명한다.
브루클린 – 다리를 넘어온다는 것
영화가 끝났을 때, 내 귀엔 아직도 대서양 물결이 철썩이는 소리가 남아 있었다. 엘리스처럼 먼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본 경험은 없지만, 나 역시 새 학기 첫날 교실 문 앞에서, 혹은 퇴사 후 낯선 회사를 향해 지하철을 갈아탈 때 마음속 배를 띄운 적이 있다. 그때마다 ‘고향’과 ‘미래’라는 두 섬이 동시에 손짓했고 나는 늘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영화는 그 순간들이 결코 선형적인 직선이 아니었음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앞으로만 가는 것 같지만 사실 끊임없이 뒤돌아보며, 과거의 풍경을 현재의 거울에 비춰 방향을 잡는다. 엘리스가 토니의 손을 잡고서도, 짐의 따뜻한 시선을 느끼며 흔들렸듯 나 또한 새로운 선택마다 잠깐씩 과거에 머물렀다. 그 ‘머뭇거림’이 부끄러워 마음속 편집을 거듭했는데, 영화는 속삭인다. “머뭇거림은 방향 감각을 잃은 게 아니라, 나침반을 조정 중인 증거”라고. 그래서 나는 이제 ‘이민자의 이야기’를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번역한다. 누구나 삶의 어느 지점에선 익숙한 자리에서 짐을 꾸리고, 두려움과 설렘을 한 가방에 넣은 채 떠난다. 비록 물리적 국경을 넘지 않았어도, 우리는 사랑 때문에, 일 때문에, 혹은 꿈 때문에 매일 작은 브루클린 다리를 건넌다. 그리고 건널 때마다 향수병이라는 바람은 의자 밑에서 가볍게 부는 법. 대단히 아프지도,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지만, 그 바람이 있어 우리는 돌아갈 곳과 나아갈 곳을 동시에 느낀다. 극장을 나서며 문득 휴대폰 속 오래된 가족 단체 채팅방을 열어 “오늘은 조금 그리워서요”라는 짧은 안부를 보냈다. 여전히 바다는 깊고 다리는 길지만, 내 선택이 내 삶의 주소가 된다는 확신이, 바람처럼 가볍게 마음에 닻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