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뷰피풀라이 – ‘로스트 보이즈’의 기적 같은 생존기
수단 남부의 붉은 흙길을 맨발로 달려야 했던 아이들이 있었다. 내전은 그들의 이름을 빼앗고, 어머니의 품을 빼앗고,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내일이라는 시간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폭격 소리와 총성, 그리고 남겨진 시신들 사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북쪽으로, 때로는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기나긴 행렬을 세상은 ‘로스트 보이즈(Lost Boys)’라 불렀다. 영화가 보여 주는 어린 시절의 그들은, 불타는 초가집과 건조한 사바나를 배경으로 먼지를 뒤집어쓴 채 걸어간다. 가끔은 길가에 쓰러져 죽어 가는 동료를 두고 갈 수밖에 없는 잔혹한 선택을 해야 했고, 때로는 근처 강가에 숨어 악어와 물을 나눠 마셔야 했다. 그들이 국경을 넘겨 케냐의 카쿠마 난민 캠프에 도착하기까지 약 1,600킬로미터, 걸린 시간은 무려 수년이었다. 의지할 것은 서로의 어깨뿐인 이 가난한 유랑단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혈연이나 종교보다도 강했던 ‘공동체적 본능’ 덕분이었다. 누군가 넘어지면 가장 어린 아이가 물통을 들어 입술에 적셔 주고, 어떤 밤엔 맹수들이 울부짖으면 서로 팔짱을 껴 원형을 이루어 공포를 견뎠다. 영화는 바로 이 원초적 연대를 기념비처럼 세워 둔 뒤,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모든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당신은 낯선 어린이를 위해 물 한 모금 운반할 수 있는가?” 7,000킬로미터 밖 극장 좌석에 앉은 나조차 그 질문 앞에서 침을 삼키며 고개를 떨궜다. 눈앞 스크린에 비친 사막의 열기와 밤하늘의 별빛이 뚜렷해질수록, 우리는 점차 깨닫는다. 이 아이들의 생존기는 통계 속 난민 숫자가 아니라, 인간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빛나는 ‘존엄성’의 서사이며, 동시에 우리가 잊은 공동체 윤리를 반사시키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뷰피풀라이 – 가족을 위해 건넌 국경, 운명의 선택
카쿠마 캠프에 정착한 순간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유엔 난민기구의 심사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한 장이 인생의 향방을 갈랐다. 영화 속 마미르, 예레미야, 폴, 그리고 막내 여동생 아비탈은 “미국행 비행기에 탈 수 있다”는 통지를 받지만, 좌석은 세 장뿐이었다. 남은 한 사람을 누구로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잔인한 복권. 형제들은 가장 나이가 어린 아비탈이 안전해야 한다고 믿었고, 결국 폴·예레미야·마미르(미국 이름 ‘시어 도르·제롬·맘메르’)만 캔자스로 향한다. 공항 유리 벽 사이에 서성이는 아비탈의 등 뒤로, 캠프의 모래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지만 그녀는 끝까지 눈물을 삼킨다. “괜찮아, 오빠.” 그 짧은 위로가 언니나 어머니의 자리에 선 열세 살 소녀의 어른스러움이었다. 감독은 이별 장면을 과도한 음악이나 슬로모션 없이 담담하게 그린다. 오히려 관객이 정적 속 숨소리를 듣게끔 만들며, 국경이 가족을 찢어낼 때 떠밀려야 하는 ‘운명의 선택’을 한 땀 한 땀 새긴다. 이후 영화는 시차 8시간, 거리 12,000킬로미터를 뛰어넘어 캔자스시티의 삭막한 겨울 풍경으로 곧장 전환된다. 형제들은 전구 밝기조차 생소한 아파트에 도착해 첫날 밤을 맞지만, 빈 냉장고와 회색 카펫 사이에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아비탈의 얼굴이다. 그리움은 곧 책임감으로 번지고, 책임감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폴이 YMCA 전화기를 붙들고 매일같이 난민 복지센터에 문의하는 이유, 예레미야가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이주 서류가 빨리 통과되길 기도하는 이유, 맘메르가 야간 정비 일까지 찾아 나서는 이유 모두 ‘가족 재결합’이라는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정착(success)과 돌봄(care)이 반드시 충돌해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스스로 살아남기에도 팍팍한 이들은 결국 남은 식비·교통비를 잘라 내며 아비탈 송환 비용을 마련한다. 그리고 관객은 깨닫는다. 진정한 국경은 지도 위 선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나 자신의 안락을 조금씩 잘라낼 수 있는가’라는 마음속 경계임을.
뷰피풀라이 – 리스 위더스푼의 따뜻한 조력 서사
캔자스 공항 도착 48시간째, 형제들은 사회 복지 서비스 센터의 ‘취업 담당자’ 캐리(리스 위더스푼)를 만난다.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배우의 등장이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보여 주는 서툰 인간미 덕분에 영화의 온도가 달라진다. 캐리는 초기엔 전형적인 ‘일 처리 담당자’다. 빡빡한 업무 루틴, 불친절한 매뉴얼, 한숨 섞인 “Sorry, system’s down” 같은 대사까지, 관객은 쉽게 예측 가능한 캐릭터를 떠올린다. 그러나 영화는 그녀를 ‘백인 구세주’ 서사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캐리가 형제들에게 받아 적어 준 미국식 이름표가 각자의 정체성을 지운다는 점, 집 계약서 한 줄 때문에 동생과 생이별하는 현실을 방치하게 만든다는 점 등을 통해, 제도적 무감각의 아이러니를 날카롭게 비춘다. 그럼에도 캐리의 진가는 ‘틀린 뒤에 배우는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발휘된다. 캠프 출신 청년들이 폐수 처리장 야간근무·패스트푸드점 주방에 배정될 때, 그녀는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라는 습관적 판단을 되묻는다. 대신 체인점 사장을 설득해 ‘요리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게 하고, 지역 공립도서관 사서를 찾아가 “무료 회화 동아리”를 개설한다. 시스템 틈새에 숨어 있던 자원을 퍼 올려, 최소한의 안전망을 넘어서는 ‘적정한 성장선’을 설계해 준 것이다. 캐리가 “당신들은 내 클라이언트가 아니라, 내 친구”라고 선언하는 장면에서 형제들은 한참 만에 활짝 웃는다. 그리고 관객 역시 깨닫는다. 도움을 준다는 행위는 시혜가 아니라 ‘우리가 같은 시대를 공유한다’는 선언이어야 하며, 도움을 받는다는 행위 또한 수동적이 아니라 ‘서로를 확장시킨다’는 능동적 사건임을.
뷰피풀라이 – 작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적게 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극장 안은 숙연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 앞에서의 무력감이 아니라, 작은 약속을 되새기게 하는 조용한 결의에 가까웠다. 내 마음에는 ‘굿 라이’라는 역설적 문장이 오래 맴돌았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출생 연도를 조작하고, 입국 심사대에서 직업란을 허위 기재하며, 마침내 동생의 재입국을 위해 “우리는 친척이 아니다”라는 거짓말까지 감수했던 형제들의 스토리. 그 거짓이야말로 가장 선한 진실을 옹호했다. 인간이 만든 관료주의와 국경선이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동시에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면, 그 거짓말이야말로 묵직한 정의감의 다른 형태였다. 영화를 본 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휴대폰 메모장을 꺼냈다. ‘국경을 넘나드는 여행’이란 탭 아래, 내가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를 적었다. ① 새벽 두 시에도 전기가 들어오는 아파트, ② 여권만 있으면 어디든 떠날 수 있다는 안도감, ③ 기본 의료보험 카드. 그리고 그 옆에 오늘부터 실천할 작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붙여 넣었다. ① 지역 난민 센터 한국어 자원봉사 신청하기, ② 해외 분쟁 관련 뉴스 하루 한 번은 원문으로 읽기, ③ 이웃에게 “필요하면 통역 도와줄게” 먼저 말하기. 스크린 속 폴·예레미야·맘메르,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던 아비탈이 결국 재회할 때 보여 준 미소가 나를 움직인 셈이다. 《뷰피풀라이》는 거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손바닥 한 뼘만큼의 용기’를 건네며 묻는다. “당신이라면 내일 아침 누구의 물통을 들어 줄 것인가?” 그 질문이 남기는 잔향 덕분에 나는 이 영화를 ‘필요한 체온’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 체온으로 오늘을 조금 더 단단히 살아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