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쿠바 리듬의 시간 여행
1999년 빈 벤더스 감독의 카메라가 녹음실 문을 열고 들어가던 그날, 나는 비로소 시간을 ‘소리’로 듣는 경험을 했다. 필름 속에서 연주자들은 악보 대신 손바닥 위에 주름진 세월을 펼쳐 놓는다. 1920 ~ 30년대 하바나의 살롱에서 태어난 손(Son) 과 볼레로, 그리고 후일 살사에 재흡수된 리듬들은 원래 흙먼지를 품은 거리 음악이었다. 하지만 혁명과 냉전, 경제 봉쇄가 뒤엉킨 20세기 후반 쿠바에서는 이 전통이 잠시 숨을 죽였다. 라이 쿠더가 “이건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시간 여행”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老)연주자들의 지문 위에 남은 돌기 하나하나는 그들이 살아낸 군사정변, 사탕수수 들녘, 그리고 미국 출장선 뱃고동의 진동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영화 속 녹음실 벽을 따라 달리는 파형(波形)을 바라보며, 마치 78rpm 쉘락판이 회전하던 시절과 지금의 디지털 파장 사이를 순간 이동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시간은 흐르지만 리듬은 돌고, 돌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은 ‘옛날 노래’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 그 자체’를 포장 뜯지 않은 채 들려주는 타임캡슐 같다. 멜로디의 첫 음이 떨어질 때마다 우리는 늘어지게 늘어선 과거의 샛길로 미끄러져 들어갔다가, 트럼펫의 비브라토가 공기를 찢는 순간 다시 현재로 튕겨 나온다. 한때 잊혔던 무도장의 선율이 이렇게 부활했을 때, 역사란 결국 ‘사라진 것들의 귀환’을 품은 반복무늬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되풀이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박자로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는 과거를, 누군가는 미래를, 나처럼 음악에 무지한 청취자는 ‘지금 이 순간’이란 박동을 비로소 듣게 된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아바나의 골목과 노인들
영화가 하바나 구시가의 좁은 골목으로 시선을 돌릴 때마다 내 눈에는 거대한 악기가 한 대씩 놓여 있는 듯했다. 파스텔빛 페인트가 벗겨진 벽은 기타 바디처럼 마호가니색 속살을 드러냈고, 오렌지나무 그늘 밑 검은 고양이의 꼬리는 마치 콘트라베이스 활끝처럼 느리게 흔들렸다. 그 골목을 따라 걷는 연주자들은 하나같이 70~90세 노인들이었지만, 그들의 발걸음에는 “무대가 나를 떠나도 리듬만은 남는다”는 오랜 신념이 박자처럼 밟혀 있었다. 잠시 카메라는 꼬리곰탕처럼 뿌연 시가 연기를 스치고, 그 틈에서 우리는 루벤 곤살레스의 뼈마디 튀는 피아노를 듣는다. 진열대에 먼지가 내려앉은 오래된 악보 가게, 밤이면 램프 하나로 버티는 바 버(Bar) 나 식료품점, 그리고 ‘소셜 클럽’이라는 간판이 떨어진 채 방치된 건물들… 이 모든 풍경이 사라졌던 클럽의 빈자리를 증언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빈자리야말로 음악을 다시 소환한 진공(眞空)이었다. 낡은 콘크리트 벽 사이로 흘러나오는 볼레로는 마치 오래 묵은 럼주처럼 단내와 쓴맛을 동시에 품고 있었고, 나는 그 쌉싸래한 음의 층위를 혀 대신 귀로 천천히 음미했다. 카메라가 노인들의 주름을 클로즈업할 때마다, 주름 사이엔 연주자의 과거와 도시의 기억이 얽혀 있었다. 하바나 특유의 퇴색된 초록과 푸른 바다의 대비, 그리고 저녁 노을에 적셔지는 거리 색감은 이 다큐멘터리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쿠바 혁명 이후의 풍진(風塵)을 말해 준다. 그 속에서 음악은 “과거를 애도하되, 현재를 살아갈 이유”로 다시 피어난다. 음악을 듣기 전엔 몰랐다. 그러나 종일 타일 깨진 보도블록 위를 오가는 노인들의 가벼운 스텝을 따라하다 보면, 인간이 늙어도 리듬은 늙지 않는다는 사실—그 놀라운 역설이 가슴 깊은 곳에서 꽤 오래 울린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담배 연기 속의 트럼펫
내게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은 마누엘 “구아히로” 미라발이 카네기홀 리허설에서 트럼펫을 들어 올리던 순간이다. 그는 마치 주변 공기를 한 움큼 움켜쥐듯 연기 자욱한 무대 뒤편에서 악기를 들어 올렸고, 금빛 벨 끝에 묻어 있던 담배 냄새와 구리 냄새, 그리고 약간은 짠 소금기까지 음색으로 바꿔 뿜어냈다. 그 음색은 깨끗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 소금이 굳어 생긴 자국처럼 거칠고, 모래바람처럼 맹렬했다. 하지만 그 거침은 인간을 얼어붙게 만드는 ‘딱딱함’이 아니라, 오랜 침묵 끝에 찾아온 “아직 살아 있다” 는 확신의 울퉁불퉁한 촉감이었다. 관악기는 연주자의 폐(肺)가 만든 압력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구아히로의 트럼펫은 노년의 허파가 들려줄 수 있는 최대치의 공기 밀도를 자랑했다. 한 음을 뻗어내고 허리를 잽싸게 펴는 동작만으로도, 그는 “내 폐는 아직 카리브해 바람을 품기에 충분히 넓다”고 선언하는 듯했다. 나는 그 선언을 들으며 담배 연기가 한 줄씩 조명을 가로지르는 장면을 떠올렸다. 산소보다 니코틴을 더 사랑했던 세대가 폐를 다 태워버린 뒤에도 음악으로 다시 숨을 쉬는 광경. 그 광경은 어쩌면 ‘예술이 인간의 육체와 어떻게 화해하는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주석이었다. 젊음은 숨이 가쁘고 뜨겁다. 그러나 늙음의 호흡은 느리고 깊다. 구아히로의 트럼펫은 그 느리고 깊은 호흡의 끝에서만 들을 수 있는 걸쭉한 묵직함을 품었고, 그 묵직함은 내 속에서 한동안 메아리쳤다. 영화관을 나선 뒤 지하철 플랫폼에서 이어폰으로 다시 음원을 틀었을 때, 나는 트럼펫 소리 사이로 담배 연기 대신 나 자신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아직 내 삶의 호흡을 전부 써보지도 못했구나.” 그때부터 나는 한음, 한 호흡을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깊게 마시며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음악이 존재하는 이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는 동안 내내 마음 한켠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젊은 날 어깨춤을 감추느라 무릎을 곧추세웠던 기억, 세상에 뒤처지지 않으려 리듬을 조용히 끄고 살았던 기억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그리고 상영이 끝나자, 나는 영화 속 노인들처럼 등을 곧게 펴고 하품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늙지 않은 리듬은 어디에나 숨어 있다.” 그 깨달음이 가슴을 노크하자, 나는 손가락 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두드리며 즉석 타악기를 만들었다. 뚜벅뚜벅 걸음마다 박자를 새겨 넣고, 휘파람 사이에 볼레로의 반음계를 끼워 넣었다. 영화가 가르쳐 준 것은 화려한 기교가 아니라 ‘일상의 리듬을 사랑하는 태도’였다. 회색 출근길에도, 단조로운 퇴근 전동차에도, 나의 숨소리만큼은 분명히 박자를 타고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조차 키보드 타건음이 삼바와 손 사이 어딘가에서 춤추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음악은 누군가의 기억이자, 또 다른 누군가의 미래이며, 동시에 내 현재를 규정하는 심장 박동이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오래전에 닫혔다 해도, 귓가에 남은 리듬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모레도, 조금은 더 과장된 스텝으로 걸을 예정이다. 음악이 사라지지 않았듯, 나 또한 아직 ‘완전한 쉼표’를 찍을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