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 정의와 오만이 치열히 충돌

베테랑 포스터
베테랑 포스터

베테랑 – 정의감 폭발 형사 서도철

서도철은 첫 등장부터 “광역수사대의 미친 소”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를 몸소 증명한다. 상대가 손에 흉기를 들고 있든, 배경에 권력이 있든, 그에게 중요한 건 단 한 가지다. 눈앞에 약자가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가? 그렇다면 일단 뛰어들어 막아 세우고 본다. 그런 정의감은 단순한 의협심이 아니라 현장에서 축적된 경험으로 단련된 베테랑의 직감에 가깝다. 중고차 절도단 잠입 수사에서 도철은 허름한 모텔 복도에서 박수 두 번, 눈빛 한 번으로 팀원 전체를 통솔한다. 동시에 상대방을 현장에서 “덜 다치게” 제압하기 위해 스스로 맞아 주기도 하고, 필요할 때는 돌발적으로 테이블을 뒤엎으며 분위기를 일순간에 압도한다. 구두를 벗고 뛰어드는 건 기본, 넥타이를 뽑아 던지는 건 옵션이다. 그러면서도 팀 막내 윤 형사가 칼에 찔려 쓰러지는 순간, 도철의 얼굴엔 치솟는 분노보다 묵직한 죄책감이 먼저 스친다. “우리가 마음에 칼집 났어”라는 독백엔 ‘동료의 피를 보는 것만큼은 견딜 수 없다’는 베테랑의 자기 윤리가 배어 있다. 그러니 관객은 그가 조태오를 뒤쫓아 번화가 한복판에서 끝장 승부를 벌이는 마지막 5분을 무조건 응원할 수밖에 없다. 서도철은 완력으로만 움직이는 캐릭터가 아니다. “밀린 대리운전비라도 받아 줘야지” 하며 주머니를 털어 경비를 쥐여 주고, 사건 기록이 묻히지 않도록 기자에게 제보도 던져 놓는다. 거칠지만 세심하고, 터프하지만 따뜻한 이 양면성이 바로 서도철을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지금도 어디엔가 있을 것 같은 현장 형사’로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때 관객은 깨닫는다. 베테랑 형사의 진짜 힘은 주먹보다도 “억울한 사람을 보면 가만있지 못하는 성미”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베테랑 – 유아인 ‘조태오’가 남긴 악역 미학

조태오는 ‘악인이 된 이유’ 같은 친절한 해설이 전혀 없는 캐릭터다. 재벌 3세라는 설정 외엔 출신 학교도, 해외 유학 경력도, 비뚤어진 성장사가 담긴 플래시백도 없다. 대신 영화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흡연을 금지한다는 안내에 코웃음 치고, 파티장에서 경호원을 주먹으로 때리며 “너도 재벌 아들 해 볼래?”라고 비아냥대는 장면을 내리 꽂는다. 관객은 그 무례함의 스펙트럼을 통해 ‘이 인간은 선과 공감을 배제한 상태로 자랐구나’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유아인은 그 단선적 악을 100분 내내 질리도록 보여 주는 대신, 표정과 호흡의 리듬으로 사이코패스적 ‘긴장→방심→폭발’ 구조를 반복한다. 배기사를 가족 앞에서 굴복시키는 순간, 조태오의 눈동자는 냉담하지만 입가에는 어린아이 같은 장난기가 번뜩인다. “돈은 내가 더 얹어 줬잖아”라는 대사는 순수한 호의처럼 들리지만, 실은 인간 존엄을 화폐 단위로 거래하는 극악의 폭력 고백이다. 이 지점에서 조태오는 단순한 ‘나쁜 놈’이 아니라 **‘자기 연민조차 없는 공허한 괴물’**로 확장된다. 그 공허는 절정부 파티장에서 더욱 선명하다. 뒤늦게 밀려드는 공포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 약물과 음악에 몸을 맡기고 춤추는 조태오의 실루엣은, 화려한 조명 속에서도 기묘하게 고립되어 보인다. 유아인이 창조한 조태오는 그래서 관객에게 모순적 감정을 남긴다. “저런 자는 당연히 잡혀야 해!”라는 분노와 동시에 “어쩌다 저렇게까지 망가졌지?”라는 공포. 그리고 그 양가감정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불편한 깨달음에 이른다. 조태오가 특별한 괴물이 아니라, **절제 없는 특권사회가 재현할 수 있는 ‘제조품’**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베테랑 – 호쾌한 액션과 현실고발의 조화

류승완 감독은 매 작품마다 장르 액션의 쾌감을 앵글과 리듬으로 증명해 왔다. **〈베테랑〉**은 그 중에서도 가장 경쾌한 박자를 타는 영화다. 차량 드리프트로 시작되는 부산 추격전, 물류창고에서 벌어지는 절도단 일망타진, 지하 파이트 클럽을 방불케 하는 빌딩 옥상 격투, 그리고 조태오와 서도철이 번화가 신호등 위를 질주하는 최종전까지—컷 한 번 잘못 이어지면 관객이 길을 잃을 법한 복잡한 동선을 감독은 롱테이크-핸드헬드-하이앵글을 교차하며 실감나게 엮어 낸다. 그런데 이 통쾌한 액션은 ‘현실 고발’이라는 쓴맛을 가득 머금은 양념 덕분에 더 강렬해진다. “어이가 없네”라는 한마디는 단순 유행어를 넘어, 대한민국 관객 대부분이 체감해 본 ‘유전무죄·무전유죄’를 콤팩트하게 요약한 선언이다. 영화는 특정 기업명을 언급하지도, 뉴스 자막을 길게 집어넣지도 않는다. 그 대신 대리운전 기사·하청 노동자·홍보대행사 직원 같은 주변 캐릭터를 빼곡히 배치해 “특권층의 재미가 누군가의 피와 땀을 짜내 만들어진다”는 구조를 시각화한다. 마치 관객에게 ‘이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축소판’이라고 귓속말하듯. 그래서 서도철의 주먹이 조태오의 턱을 강타할 때, 극장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는 액션 쾌감만이 아니다. **“현실에서라도 이런 통쾌한 정의가 실현되면 좋겠다”**는 집단적 바람이 응축된 굉음이다. 류승완표 액션과 사회 풍자의 합체는 너끈한 흥행(1,341만)을 낳았고, 동시에 한국 대중영화가 오락성과 시의성을 어떻게 병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과서가 되었다.

베테랑 – 깜빡이는 신호, 깨어나는 마음

재관람을 마치고 극장을 나서니, 밤공기가 유독 날카롭게 느껴졌다. 찬 바람이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지만, 그보다는 영화 속 장면들이 아직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파란 신호등을 무시하고 도심을 가로질러 달리던 조태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고, 문득 ‘내 일상에도 저런 조태오가 어딘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묘한 불안이 엄습했다. 거칠게 웃고, 교묘하게 빠져나가며, 정의를 조롱하는 얼굴들. 현실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발걸음은 묘하게 가벼웠다. 서도철이 마지막에 툭 내뱉은 “밥은 먹고 다니냐?” 그 한마디가, 마치 관객인 나에게도 건네는 응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날카롭지만 따뜻하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절절한 그 말.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위로는 그렇게 허공에 던져지는지도 모른다.현실의 부조리를 단숨에 날려 버리는 통쾌한 주먹질은 없지만, 최소한 무심코 지나칠 뻔한 억울함을 보듬는 시선만큼은 베테랑 형사처럼 날카로워지고 싶다. ‘세상은 원래 그래’라는 체념 대신, ‘그래도 한 번 해 보자’는 투지를 매일 충전하는 일. 그게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정의감 아닐까. 오늘도 거리에는 파란불이 깜빡이고, 어딘가에선 누군가가 걸려 넘어질지 모른다. 그 순간만큼은, 내 안의 서도철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손끝이라도 움직이고, 말끝이라도 붙잡고, “어이가 없네”라는 한마디로 세상이 아주 조금은 멈칫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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