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 리스트 – 죽음을 앞둔 두 남자의 우정

The Bucket List Poster
The Bucket List Poster

버킷 리스트 – ‘목록’이 가져다준 두근거림

다 늙어 인생 4회말쯤에 들어섰다고 믿었던 두 노인, 카터와 에드워드가 병실이라는 좁고 퀴퀴한 무대에서 기적처럼 서로를 발견하는 순간, 나는 엉겁결에 “우정에도 골든타임이 있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카터의 역사책에는 줄줄이 밑줄이 그어져 있고 에드워드의 달력에는 회의 시간이 빼곡하지만, 정작 둘 모두의 가슴 속엔 오랫동안 공란으로 남아 있던 항목이 있었다. 바로 ‘같이 웃어줄 사람’이다. 영화는 이 빈칸에 과감히 체크표시를 그려 넣는다. 천문학적 재산을 가진 에드워드가 카터의 종이컵 커피에 입을 대며 “이게 그렇게 맛있나?” 하고 비죽거리는 장면은, 부유층과 서민층을 가르는 투명한 칸막이를 와장창 깨뜨리는 유쾌한 해머질이다. 한편 카터는 체스판 위에서 에드워드를 몰아붙이며, 돈으로는 살 수 없는 ‘한 수 앞을 내다보는 통찰’을 선물한다. 둘이 번갈아가며 빈약한 심장을 깨우는 박수소리를 만들어낼 때마다, 병실의 발판처럼 딱딱했던 시간은 말랑한 젤리처럼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흔들림은 이후 스카이다이빙 장면에서 폭발적 탄성으로 튀어 오르고,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찰나의 정적 속으로 가라앉는다. 돈과 지식, 나이와 피부색, 체력과 잔고가 죄다 무색해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는 노년의 우정을 ‘늦게 만난 첫사랑’처럼 싱그럽게 채색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버킷 리스트 맨 위에 ‘마음을 통째로 내줄 단짝’을 적어 넣었음을 깨닫고, 주름진 두 남자의 주먹 인사에서 뜨거운 혈류를 느낀다.

버킷 리스트 – ‘목록’이 가져다준 두근거림

흰 종이 위에 검은 잉크로 ‘1. 스카이다이빙 2. 관광열차 타기 3. 세계 7대 불가사의 방문…’ 같은 글자를 적어 내려가는 행위가 이렇게 가슴을 요동치게 할 줄은 몰랐다. 목록은 놀랍도록 단순한 도구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거대한 마침표 앞에서, 그 단순함은 미루기의 기록부가 아니라 삶을 연장하는 작은 ‘쉼표 생산기’가 된다. 해야 할 일(To-do)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Want-to-do)이 빽빽이 채워질 때, 남은 시간이 ‘벌점’이 아니라 ‘보너스 턴’으로 바뀌는 기분. 카터가 만년필을 잡은 손끝을 떨며 “가장 맛있는 커피 마시기”라고 적어 넣을 때, 우리는 한 방울의 카페인이 온 우주를 새벽으로 깨운다는 사실을 믿어버린다. 에드워드는 그 옆에 “가장 아름다운 소녀에게 키스하기”라고 적고는 낄낄대지만, 그 농담 속엔 ‘사랑받을 자격’이란 항목을 끝내 포기 못 한 인간의 집요함이 숨쉰다. 종이 한 장이 두근거림을 소환하는 마법진이라면, 체크표시를 그어 넣는 순간은 드디어 마법이 현실이 되는 축포다. 낯선 사막에서 눈부신 석양을 바라보며 카터가 펜으로 ‘✓ 피라미드 위 일몰 보기’를 그을 때, 나는 관객석에서 의자 팔걸이를 꾹 움켜쥐고 있었다. 내 리스트는 어디에 있나, 나는 왜 아직 빈칸을 남겨두고 핑계를 찾고 있나. 영화는 속삭인다. “목록을 쓰는 일은 남은 생을 예약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예약 버튼을 누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작고 가벼운 클릭일 뿐이라고.

버킷 리스트 – 돈과 삶의 가치, 에드워드의 깨달음

에드워드는 평생 ‘병원은 침대 두 개면 충분하다’며 이윤을 중시해 온 자본의 화신이다. 그러나 암 진단서 한 장이 그에게 들이민 질문은 “돈이 목숨을 연장해 줄 수 있느냐”가 아니라 “돈이 외로움을 밀어낼 수 있느냐”였다. 호화 요트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던 사내가 병원 커튼 뒤에서 고요히 흐느끼는 장면은, 금빛으로 도배된 일상이 얼마나 허약한지 여실히 드러낸다. 카터의 아내가 싸온 집밥 냄새가 병실에 퍼지는 순간, 자본의 갑옷은 뜨끈한 김 앞에서 허술한 양철 조끼로 변한다. 영화는 에드워드에게 세 번의 깨달음의 물벼락을 퍼붓는다. 첫째, ‘소유’는 추억을 사지 못한다. 둘째, ‘권력’은 용서를 매수하지 못한다. 셋째, ‘시간’은 어떤 통장으로도 적립이 불가하다. 피라미드 정상에서 카터가 “인생의 기쁨을 찾았나요?”라고 물을 때, 에드워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딸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그 한마디가 거대한 사막보다 광활하다. 결국 그는 ‘가장 아름다운 소녀에게 키스하기’ 항목을 위해 스스로 화해의 문을 두드리고, 손녀의 볼에 입 맞추는 찰나에 세상이 눈부시게 재편되는 경험을 한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버킷 리스트란 남은 날들을 소비하는 쇼핑 목록이 아니라, 잃어버린 가치를 되사들이는 영수증이다. 에드워드의 은행계좌엔 표기되지 않았던 ‘사랑’이라는 잔고가, 영화의 엔딩에서 비로소 플러스 기호와 함께 찍히는 장면은 잔잔하지만 묵직한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

버킷 리스트 – 나의 버킷리스트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도 자리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화면 속 두 남자가 눈 덮인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다음 생에서 또 보자”라며 장난치던 환영이 내 머릿속을 느리게 떠돌았다. 영화관을 나서며 찬 바람을 맞는 순간, 손바닥 안쪽이 저릿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많이 쥐고 다닌 게 스마트폰이라면, 가장 적게 쥐었던 건 ‘나답게 살 권리’가 아니었을까. 카터와 에드워드가 하늘에서 몸을 던지던 난폭한 자유가 부러웠다. 동시에 ‘지금 당장 비행기 탈 용기까지는 없지만, 집 앞 언덕에라도 올라 해가 지는 걸 보겠다’는 소박한 각오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버킷 리스트라는 단어는 누군가의 마지막 하루를 위한 포장지가 아니라, 내일 아침을 새로 접는 종이배였다. 나는 아직도 “언제 시간이 나면…”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이 영화 덕분에 달력이 아니라 심장을 먼저 들여다보는 법을 배웠다. 남은 날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 체크할 수 있는 항목’이 한 가지라도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이 내게 주는 실시간 업데이트다. 그러니 종이와 펜을 꺼내자. 그리고 이렇게 적어보자. 1) 오래 보고픈 친구에게 안부 전화하기. 2) 나를 설레게 하는 노래를 큰 소리로 따라 부르기. 3) 황혼이 물든 하늘을 핑계 삼아,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을 다시 꺼내보기. 체크표시를 그어 넣을 때마다, 우리도 카터와 에드워드처럼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지.” 우리 각자의 리스트 맨 밑에는 마지막으로 이런 문장을 적어두자. ‘다음 칸은 내일의 나를 위해 비워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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