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 – 바다 밑 금빛 음모와 여인들의 파도

밀수 포스터
밀수 포스터

밀수 – 해녀들의 물장난, 바다를 뒤흔들다

1970년대 중반, 군천 앞바다는 누런 밀물을 품고 있지만 그 물살 아래에는 서울 장안의 금값을 뒤흔들 ‘비밀 보따리’가 숨겨져 있다. 영화는 이 지점을 파고들어,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새벽 안개를 뚫고 뻗어 나가는 순간부터 관객의 폐 깊숙이 소금을 들이붓는다. 물질의 리듬은 근육을 짜내는 호흡법이자 해녀 공동체가 공유하는 암호 같은 것인데, 류승완 감독은 그 리듬을 해녀판 드럼 소로 변주한다. 첫 입수 장면에서 우리 시야는 거대한 수중 풍경으로 던져지지만, 사실 카메라가 집요하게 비추는 것은 전복이나 해삼이 아닌 납작한 나무상자다. 해류에 쓸려가지 않도록 바닥에 돌로 눌러둔 그 상자는 ‘도깨비 물건’이라 불리는 밀수품의 은닉법을 드러내는데, 해녀들이 채취 도구 대신 도르래를 손에 쥐고 상자를 건져 올리는 모습은 마치 보물선 인양작업 같은 서스펜스로 탈바꿈한다. 해저 액션이라 하면 흔히 스쿠버 장비를 떠올리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허리춤에 무쇠칼 하나, 폐활량 한 줌만 의지한 채 블랙아웃 직전까지 잠수를 반복한다. 그 원초적 투박함이 오히려 장면에 흡인력을 더한다. 파도가 쓰러뜨린 포말 속에서 웃고 떠들며 허영을 씻어내던 해녀들의 대사—“돈은 다 삼촌 똥구멍으로 들어가는 거 아냐?”—는 관객에게 ‘바다도 시장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현실을 일깨운다. 결국 밀수의 시작점은 거대한 국제 무역망이 아닌, 한 끼 생계를 이어가려는 지방 해녀들의 절박함이다. 이 절박함이 파도처럼 중첩되며 작은 어촌을 전국구 밀항 루트로 변모시키는 과정은, 대도시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어떻게 변방을 탐식하는지를 은유한다. 영화 속 바다는 더 이상 풍요의 상징이 아니라 밑 빠진 통장이며, 해녀들의 물장난은 원초적 생존기술이자 국가 시스템을 조롱하는 불온한 몸짓이다. 이 몸짓이 스크린 한가득 튀겨내는 물보라는, 관객의 뺨에 실제 소금물이 튀긴 듯한 착각을 안기며 “몸으로 번 돈엔 몸값 이상의 값어치가 붙는다”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새긴다.

밀수 – 70년대 바닷가에 던진 금빛 미끼

영화가 배경으로 삼은 1975년 전후의 군천은 눈부시게 가난한 곳이다. 새마을 깃발이 마을회관 앞에 펄럭이지만, 해녀들의 그물에는 고무공장 폐수가 토해낸 독성 거품이 먼저 걸려든다. 생계를 위협받은 마을 주민 앞에 ‘금괴 한 상자에 빚 청산’이라는 시쳇말이 미끼처럼 떠도는 순간, 공동체의 윤리적 방어막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관객은 해녀들이 바다 밑에서 건져 올린 금괴를 “조용히 국가에 팔아넘기면 된다”는 브로커의 감언이설에 흔들리는 장면을 지켜보며, 유사 이래 반복돼 온 ‘약탈형 개발과 보상’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화려한 70년대 개발 신화를 견인한 것은 대도시 고층빌딩이 아니라, 실제로는 변방 노동자의 찰과상과 절단된 손목이었다는 사실을 영화는 숨기지 않는다. 그 단적인 예가 권상사가 내건 거래 조건이다. 부산항이 단속 망으로 봉쇄되자 그는 군천 해녀 조직에 접근해 “서울 금줄을 풀 대가로 손목발목 담보”를 요구한다. 이는 국가‧자본‧암흑세력이 뒤엉켜 ‘지방’을 어떻게 소모품으로 취급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내 눈앞의 금빛이 내일 내 목을 조를 줄 누가 알았겠느냐”는 되물음을 던진다. 해녀들은 동굴 같은 수중 동맥 속을 미끄러지듯 오가며 금괴를 건져 올리지만, 그 과정에서 급류에 휩쓸려 사라지는 동료, 기관총 파도에 몸이 찢기는 선주, 그리고 ‘사람을 건져 올린 적 없는 해경’의 싸늘한 시선까지 목도한다. 감독은 이 잔혹한 교환 관계를 고발할 때도 유머를 버리지 않는다. 금괴 무게를 헤아리던 해녀가 “서울집 사모님들은 허리도 없이 걷나 보지?”라고 툭 내뱉자, 관객은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왜냐하면 그 대사는 ‘돈의 무게는 가진 자에겐 0g’이라는 냉소적 진실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가, 금괴가 결국 ‘국가의 금’으로 회수되는 아이러니를 통해 “서울로 올라간 금은 다시 내려오지 않는다”는 개발독재 시대의 흡혈 구조를 재연한다. 바닷가에 던져진 금빛 미끼는 애초에 해녀들의 꿈이 아니라 해녀들의 목을 죄는 목줄이었고, 관객은 눈부신 금빛이 남기고 간 소금기 어린 상처를 보고 나서야 물러나는 파도의 잔향 속에서 씁쓸함을 삼킨다.

밀수 – 진숙과 춘자의 의리와 배신

진숙과 춘자는 같은 물소리를 들으며 자란 ‘바다 자매’다. 하지만 생존은 남매보다 촘촘한 정조차 갈라놓는다. 영화는 두 인물의 감정선을 액체처럼 흔들리게 만들되, 어느 쪽도 완벽한 선과 악의 편에 고정하지 않는다. 이 모호함이야말로〈밀수〉가 던지는 가장 현대적인 질문이다. 진숙은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해녀 대장이지만, 동생의 죽음 이후 시퍼렇게 부풀어 오른 복수심을 품은 채 물질을 이어간다. 그 분노는 사체처럼 무겁고, 관객은 그 무게가 그녀를 수심 아래로 끝없이 끌고 내려간다는 사실을 숨 막히게 확인한다. 반면 춘자는 한때 목숨을 나눌 만큼 가까웠던 친구를 뒤로하고 홀연히 서울로 떠난 인물이다. 그녀의 언행에는 생의 기술이 스며 있지만, 너무 많은 ‘기술’은 믿음을 좀먹는다. 두 사람이 오랜 세월 끝에 거북섬 밀수 작전 현장에서 재회하는 장면은, 적막한 밤바다 위 투광등 아래 벌어지는 일종의 무도회다. 진숙의 한 손엔 녹슨 작살, 춘자의 손엔 권상사가 건넨 서류봉투가 들려 있는데, 그 대비가 곧 두 사람의 현재 좌표를 말해준다. 놀라운 점은 감독이 여기서 ‘우정 회복’이라는 감상적 도식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춘자가 금괴 중 일부를 따로 빼돌리는 복안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직후, 진숙은 “같은 물이 우리 폐를 씻어 줬는데 어쩌다 이렇게 탁해졌냐”며 눈물보다 더 거친 욕설을 내뱉는다. 그러나 이 절교 선언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을 다시 엮는 실마리가 된다. 왜냐하면 둘 다 해녀이기 때문이다. 해녀에게 바다는 배신을 용납하지 않는다. 동료가 줄을 끊으면 누구든 죽는다. 따라서 진숙이 마지막 순간 춘자를 위해 숨통이 막히도록 잠수를 감행하는 장면은, 의리와 배신의 이분법을 넘어 ‘숨을 나누는 존재’라는 해녀 공동체의 원초적 윤리를 환기한다. 이후 진숙은 권상사 일당이 몰려든 호텔 옥상에서 춘자와 등을 맞대고 선다. 두 여자 사이에 오가는 대사는 단 세 줄. “등에 칼 꽂지 마.” “물속에선 칼을 던질 힘도 없잖아.” “이번엔 물 밖이야.” 이 짧은 호흡은 칼날보다 날카로운 서사 전환이다. 궁극적으로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를 용서했는지, 여전히 속고 속이는 관계인지 명확히 판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우정이든 배신이든, 바다 위에 그은 경계선은 파도 한 줄에 지워진다. 관객은 흐릿해진 경계선 너머로 두 인물이 각자의 방식으로 숨을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의리와 배신이 언제나 맞물려 돌아가는 인간관계의 톱니바퀴를 실감한다. 그 톱니가 물에 젖어 삐걱거리는 음경음을 끝까지 듣고 나면, 누구라도 진숙과 춘자 사이에 ‘완벽한 이해’ 대신 ‘완벽한 불완전성’을 선물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밀수 – 거래란 무엇일까?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극장 천장 스피커에서 들려오던 파도 소리가 내 귓속 고막에 작은 패각을 남긴 듯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바닷물 대신 시내버스 창밖으로 흐르는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도시에서 매일 겪는 ‘거래’라는 이름의 일상은, 따지고 보면 해녀들이 목숨 걸고 금괴를 건져 올린 뒤 적당히 눈감아 주는 세무 직원에게 봉투를 찔러 넣는 장면과 다르지 않다고.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고무잠수복 대신 셔츠에 넥타이를, 납작한 나무상자 대신 클라우드 서버 안 숫자 파일을 다룬다는 것뿐이다. 그러자 문득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하루에 몇 번쯤 의리를 배신하고, 몇 번쯤 배신을 의리로 둔갑시키며 살고 있을까?’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집에 도착했을 때, 낡은 현관 거울에 비친 내 머리칼이 유난히 검게 보였다. 춘자의 머리가 여러 차례 색을 달리하다 결국 검은색으로 돌아온 까닭을 떠올리며, 나는 거울 속 자신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바다에 들어가기 전 해녀가 물안경을 닦듯, 눈꺼풀을 한 번 세게 감았다 떴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말했다. “오늘 하루 내 숨비소리는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가라앉혔지?” 〈밀수〉는 거창한 교훈 대신 이런 작고 날 선 질문을 남긴다. 바다처럼 넉넉하고 잔혹한 세상에서, 우리는 늘 물장난과 생존경쟁 사이를 오간다. 그 경계선이 사라지기 전에, 적어도 내게 소중한 사람의 줄만은 맨 먼저 잡아야겠다고—그렇게 다짐하며, 내일 아침 거울 앞에서 또 한 번 내 머리칼 색을 확인할 것이다. 파도 소리를 기억하는 한, 검은 머리가 지닌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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