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리틀 선샤인 – 고장난 가족엔진 시동

영화 미스 리틀 션샤인 포스터
영화 미스 리틀 션샤인 포스터

미스 리틀 선샤인 – 가족이라는 고장 난 엔진

폭스바겐 마이크로버스의 덜컹거리는 소음은 이 영화의 심장박동이다. 클러치가 나가 한 번 멈추면 다시 움직이기 위해 모두가 차를 밀어야 하는 장면, 그 허둥지둥 뛰어오르는 가족들의 실루엣은 어쩌면 우리가 매일 겪는 ‘관계’의 물리적 은유다. 리처드의 허세 어린 “위너 담론”이 바퀴처럼 헛돌고, 드웨인의 무언 수행은 엔진 오일처럼 응고되어 있지만, 결국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려면 팔을 뻗어 서로의 등을 밀어야만 한다. 할아버지가 말하듯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진짜 패배’라면, 이 가족은 패배를 모르는 고집스런 정비공들이다. 차가 멈출 때마다 얼굴에 먼지를 뒤집어쓰고도 다시 달릴 채비를 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관계라는 낡은 엔진을 유지·보수하는 법을 배운다. 엔진룸 속에 숨은 미묘한 부품—말 못 하는 드웨인의 노트, 프랭크의 붕대 감긴 손목, 올리브가 꼭 쥔 탑승권—이 하나라도 빠지면 여행은 끝난다. 그러니 이 영화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단순하다. ‘네가 타고 있는 버스는, 그리고 네가 함께 미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클러치가 서걱거릴 때마다 우리는 선택한다. 내리거나, 밀거나. 미스 리틀 선샤인은 끝내 묻는다. “당신은 함께 밀 사람을 찾았는가?” 그 물음이 스크린 밖 우리를 달리게 만든다.

미스 리틀 선샤인 – 블랙코미디의 웃픈 온도

시신을 병원 창문으로 밀반출하고, 자살 실패자를 어린 조카 옆 침대에 눕히며, 색맹 판정을 받은 아이가 욕설로 침묵을 깨는 이 막장 로드무비가 어째서 관객을 미소 짓게 할까? 비극을 웃음으로 중화하는 영화는 많지만, 미스 리틀 선샤인이 특별한 이유는 ‘웃음의 사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관객에게 폭소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이 상황에 우리가 웃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견딜 텐가?”라 묻는다. 할아버지가 몰래 주문한 포르노 잡지가 순경의 호기심을 돌려놓는 장면은 ‘코미디의 방패’가 얼마나 현실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삶이 끝없이 던져주는 재난 앞에서, 이 가족은 유머를 만능 열쇠처럼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얼어붙은 분위기를 살짝 눅여 주는 ‘난로’처럼 켜 둔다. 그래서 웃음 뒤에는 늘 한기가 스며 있다. 우리는 관객석에서 키득거리다가도 “저건 내 얘기잖아” 하고 속으로 뜨끔한다. 블랙코미디가 던지는 역설적인 온도차, 차갑고 뜨거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 뒤틀린 감정이야말로 영화가 남긴 체온이다. 실소와 한숨의 경계에서, 우리는 불편한 안도감을 얻는다. 어쩌면 인생도 이런 식으로 우리를 ‘웃픈’ 모드로 구동시키는 건 아닐까? 비극이 코미디가 되고, 코미디가 다시 비극으로 스윙하는 롤러코스터 위에서, 관객인 우리는 결국 안전바를 꽉 쥐고 끝까지 타 볼 수밖에 없다.

미스 리틀 선샤인 – 프랭크와 프루스트의 위로

자살미수, 학계 추락, 짝사랑 파탄. 프랭크 삼촌은 ‘패배’라는 단어를 신체화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는 여행 내내 올리브에게, 드웨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조용한 구원자가 된다. 그 비밀 열쇠는 시트 한 귀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프루스트 이야기다. “프루스트는 인생 마지막에, 고통의 순간들이 자기 최고의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대.” 프랭크의 이 독백은 단순 위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깊이 추락한 상태에서, 고통을 서사화하고 의미화하는 법을 몸으로 증명한다. 그러자 드웨인의 ‘비행’이라는 직선형 꿈은 잠시 멈춰지고, 수평선처럼 길게 늘어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문득 내 서랍 깊숙이 숨겨 둔 낡은 일기장을 떠올렸다. 실패와 좌절의 목록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페이지들이 사실은 ‘나만의 프루스트적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여행이 끝난 뒤 프랭크는 여전히 논문도 없고, 애인도 없고, 돈도 없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다. 그리고 ‘살아 내는 법’을 전염시켰다. 학문적 권위나 사회적 성공이 아닌, “버텼다”는 단순한 사실로 타인을 견인해 낸 사람. 영화는 프랭크를 통해 조용히 속삭인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건, 잘난 승리담이 아니라 엉망인 생존담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 그 속삭임을 완전히 체득하지 못했다. 그래도 가끔 마음이 바닥을 칠 때, 프랭크의 그 반쯤 허탈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면 조금은 덜 두렵다. 나의 고통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조용한 구원이 될 수 있으리라 믿게 되니까.

미스 리틀 선샤인 – 내 귀에 속삭이는 메시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는 이상하게도 무릎이 간질거렸다. 울컥 눈물이 날 듯하다가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묘한 감각—마치 장거리 뛰고 난 다음 다리에 몰려드는 피로감과 해방감이 한꺼번에 터지는 순간 같았다. 영화 속 VW 밴이 우리의 삶이라면, 나 역시 매일 시동이 꺼지는 현실 앞에서 “이번엔 누구랑 밀어야 하지?”를 고민한다. 때로는 가족이, 때로는 친구가, 때로는 그저 옆자리의 낯선 동행이 땀을 보태 준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누군가의 클러치가 되고, 밴을 민다. 이 순환을 깨닫는 순간, ‘승리’나 ‘패배’ 같은 표지판은 무의미해진다. 중요한 건 달린 거리보다 함께 밀며 터져 나온 웃음소리,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올리브가 무대에서 보여 준 ‘슈퍼 프릭’ 댄스는 그래서 그 자체로 선언문이었다. “우리가 엉망진창이어도, 춤은 멈추지 않는다.” 영화관을 나와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는 작은 다짐을 했다. 내일 아침, 삶의 엔진이 또 멈추면 당황하기보다 옆 사람부터 찾자고. 그리고 힘껏 밀어 보자고. 덜컹거리며 출발할 그 순간, 미스 리틀 선샤인이 내 귀에 속삭일 것이다. “No one gets left beh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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