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프롬 어스 – 불멸이 던진 인문학 통찰

맨 프럼 어스 포스터
맨 프럼 어스 포스터

맨 프롬 어스 – 집 안에서 펼쳐진 우주적 대화 

거실 한가운데 놓인 낡은 소파와 박스 몇 개, 그리고 주인공 존의 이삿짐 트럭. 카메라가 보여 주는 공간은 이게 전부인데, 관객은 그 안에서 마치 광활한 우주를 떠돌 듯 끝없는 지적 여행을 경험하게 된다. 이 작품이 대사를 수학 공식처럼 치밀하게 배열했다는 사실은, 첫 대화가 시작된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분명해진다. ‘만약 1만 4천 년을 산 사람이 있다면? ’이라는 존의 가벼워 보이는 농담은 곧 교수들의 학문적 자존심을 긁어 세우고, 식탁 위의 조명은 토론장이 된 거실을 고대 포럼처럼 비춘다. 인류학·생물학·신학·역사학이 동시에 맞물려 돌아가며 촘촘히 짜여 든 논리 퍼즐 안에서, 각 인물은 자신만의 언어로 우주를 해석해 보여 준다. 재미있는 점은 그 우주가 다른 행성이 아닌 ‘존’이라는 한 인간의 생애로 수축된다는 거다. 말하자면 거실은 미시 세계요, 존은 거대한 우주다. 우리가 그의 입을 통해 듣는 기원전의 풍경·구전 설화·종교 탄생 설은 곧 과학 다큐멘터리가 되고, 청중인 교수들은 동시대 최고의 ‘우주 망원경’ 역할을 한다. 이렇게 집이라는 가장 익숙한 공간이 일순간 낯설고 거대한 사고 실험실로 변모할 때,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숨을 죽인다. 이 영화가 말로만 이루어졌다는 단순한 사실은 그래서 치명적인 함정이다. 존과 교수들의 문답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장엄한 해안선을 처음 목격한 구석기 사냥꾼이 되었다가, 인도·수메르·프랑스의 골목을 헤매는 떠돌이 화가가 되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정신은 기원에서 현대까지 140세기를 종횡무진 달린다. 결국 ‘대화’는 움직임이 없는 대신 가장 먼 거리를 건너뛰는 순간이동 장치라는 것을, 이 영화는 신랄하게 증명한다. 말이 곧 우주선이 되고 방 한 칸이 은하수가 되는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집 안에서 펼쳐진 우주적 대화’라는 표현이 조금도 과장이 아닌 이유다. 

맨 프롬 어스 – 믿음과 과학이 충돌할 때 

존이 던진 설정은 단순히 흥미로운 가설로 남지 않는다. 교수들은 자신의 학문적 무기를 꺼내 남은 밤을 겨루듯 반응하고, 그들 사이에 팽팽한 지적 전선이 형성된다. 인류학 교수 댄은 화석 연대·구석기 도구 용어로 존의 기억을 검증하려 하고, 생물학 교수 해리는 ‘멜라토닌·텔로미어·흑사병 항체’ 같은 과학어휘로 불멸을 해부하려 든다. 한편 신학자 에디스는 ‘그가 예수를 만났는가’를 집요하게 캐묻고, 존의 입에서 나온 ‘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고백은 신학·역사·윤리의 거대한 둑을 동시에 무너뜨린다. 이때부터 대화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믿음을 지키려는 생존 싸움으로 급변한다. 재미있는 점은 논파와 설득의 과정이 학문 간 경계선을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과학자인 해리는 혈액·유전자·세포 재생률이라는 ‘측정 가능한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신학자인 에디스는 ‘신비·계시·구원’이라는 ‘체험 가능한 것’으로 대응한다. 측정과 체험, 두 세계는 절대로 같은 잣대로 계산될 수 없다. 영화는 그 간극을 고스란히 무대 위에 올려놓고, 관객에게 둘 다 체험하게 만든다. 결국 누가 옳고 그른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할 즈음, 우리는 각자 스스로의 믿음이 허약한 나무다리인지, 철근 콘크리트 다리인지 시험받았다 느끼게 된다. 존이라는 존재가 허구든 실제든 간에, 그가 보여 준 것은 ‘믿음과 과학의 결정적 충돌점’이 아니라 ‘믿음과 과학이 서로를 어떻게 보완하며 인간을 확장시키는가’라는 질문이다. 무한한 수명을 가진 존재가 과학의 눈으로도, 신학의 눈으로도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역설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과학으로 세상을 이해했다 믿지만, 그 과학조차 매 순간 변한다. 우리는 종교로 구원을 약속받았다 생각하지만, 종교 역시 인간 해석에 따라 끝없이 새해석을 산출한다. 존의 이야기는 그래서 ‘거짓이면 어떻고, 진실이면 어떤가’라는 무심한 외침으로 들린다. 믿음과 과학이 충돌할 때 진짜 중요한 것은 그때 드러나는 우리의 태도, 즉 회복 탄력성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태도로 자신의 세계관을 방어 또는 확장할 준비가 돼 있는가? 영화는 묻지 않고, 그저 거울을 들이미는 듯하다. 

맨 프롬 어스 – 마지막 장면이 남긴 여운 

영화가 끝나는 순간, 관객은 어떤 거대한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하며 숨을 삼켰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준비된 스포트라이트 대신 작은 손전등 한 줄기만 비춘 채 종을 울린다. 존이 자신의 정체를 믿어 준 유일한 인물 샌디와 함께 트럭에 오르는 장면—그것이 끝이다. 대학을 떠나는 중년 교수의 평범한 이사처럼 보이지만, 실은 1만 4천 년을 떠돌던 존재가 처음으로 ‘관계’를 선택한 역사적 순간이다. 샌디를 바라보는 존의 눈빛 속에는 영생의 고독이 비늘처럼 겹겹이 쌓여 있다. 영화를 여러 번 돌려본 후 깨닫는 사실은, 이 장면이 앞서 펼쳐진 90분의 토론보다 더 잔혹하다는 것이다. 불멸자가 최초로 영원의 족쇄를 느슨하게 풀고 한 인간에게 삶의 공유를 제안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은 이제 엄청난 속도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기 시작한다. 샌디는 늙고, 존은 늙지 않으며, 그 격차는 앞으로 10년 단위로 기하급수적인 간극을 만들 것이다. 다른 교수들이 떠난 뒤 적막해진 집 앞마당, 차 뒤편에 실린 반 고흐의 모작은 마치 두 사람이 택한 불완전한 미래를 상징하는 오브제로 남는다. 정본(眞本)이 아닌 복제 그림처럼, 존이 누리는 영원도 사실은 ‘완벽한 삶’의 복제일 뿐이라는 뒷맛을 남긴다. 마지막 엔진음이 잦아들 무렵, 관객은 자신이 방금 목도한 것이 ‘사랑의 해피엔딩’인지 ‘영원의 지옥문’인지 판단하지 못한 채 극장을 나선다. 끝내 의심도 확신도 선택하지 못한 우리가 들고 나오는 것은, 그저 ‘여운’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공백뿐이다. 이 여운이 오래도록 제 가슴에 남은 이유는, 영화가 결코 존의 진실을 증명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순간부터였다. 결말은 열린 문이 아니라 오히려 빼곡히 닫힌 문의 촘촘함을 보여 주며, 그 틈새마다 관객 스스로의 상상력을 채우라고 요구한다. 그 요구는 친절하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오래 남는다. 

맨 프롬 어스를 보고.. 

스크린에 불이 꺼진 뒤에도 나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흩어진 팝콘 부스러기처럼 머릿속에 남은 문장들을 주워 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가장 크게 울린 것은 ‘불멸에는 윤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존은 스스로를 신으로 여긴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가 지나온 시간을 찬찬히 되짚어 보면 수많은 문명·사람·사건이 그의 발치에서 생겨나고 사라졌다. 그 모든 역사적 파도 위에서 그는 한 발 물러나 관찰자이자 때론 방관자로 살아남았다. 나는 거기서 묵직한 두려움을 느꼈다. 만약 내 삶이 영원하다면, 사랑도 우정도 꿈도 언젠가 의미를 잃어버릴 공산이 크다. 결국 어제의 영광과 오늘의 실패를 동일한 무게로 떠안은 채, ‘다음 10년’을 위해 또 다른 이름을 지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과연 지금처럼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고, 오늘처럼 필사적으로 글을 쓰며, 어쩌면 이렇게 영화를 보고 눈시울을 붉힐 수 있을까? 존이 마지막에 샌디에게 보여 준 선택은 그래서 내게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일으켰다. 하나는 ‘그래도 인간에게 돌아오려 하는 따뜻한 용기’였고, 다른 하나는 ‘영원히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비극’이었다. 삶의 유한성은 우리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지만, 그 불안이야말로 하루를 충실히 살아 내는 추진력이 된다. 나는 그 추진력 덕분에 오늘도 키보드를 두드리며, 어제보다 조금 더 진심 어린 언어를 찾으려 애쓴다. 존처럼 모든 시대를 통달할 수 없어도 괜찮다. 대신 오늘을 살아낸 기록 하나가 먼 훗날 누군가에게 작은 불씨가 될 수도 있다. ‘맨 프롬 어스’는 결국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끝없이 사는 것보다, 끝이 있음을 알고 사는 편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어.” 나는 그 문장을 가만히 되뇌며 극장을 나섰다. 어둑한 밤공기에 부딪히는 순간, 이상하게도 내 숨소리가 전보다 또렷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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