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네임 이즈 칸 – 편견을 넘어선 여정

마이네임이즈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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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네임 이즈 칸: 편견을 넘어선 순수한 여정

어릴 적 어머니에게 “세상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두 종류뿐이란다”라는 말을 들은 칸은, 그 한 문장의 가르침을 삶 전체로 확장하며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칸이 공항 검색대에서 반복적으로 직면하는 의심은 실은 ‘칸’이라는 성씨와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이 짊어진 편견의 압축 파일과도 같다. 하지만 이 서사의 핵심은 그 무게를 증오로 되돌려주지 않는 칸의 태도다. 노란색에 대한 공포, 날카로운 소리에 대한 과민 반응, 그리고 타인과 눈 맞춤을 오래 하지 못하는 특성은 아스퍼거 증후군의 전형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그는 매 순간 진심이 담긴 동사(動詞)로 세상을 대한다. 길 위의 낯선 이에게 “도움이 필요합니까?”라고 묻는 손짓, 사고로 멈춘 차 보닛 속을 열어 배선을 단숨에 정리하는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도 끝까지 말을 이어 가는 끈기까지. 그 순수한 동사들은 오해와 혐오를 잠시나마 정지시킨다. 9·11 이후 미국 전역에 퍼진 무슬림 혐오는 칸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테러리스트일지 모른다”는 낙인을 쓰고 고문실 철의자에 묶인다. 그러나 칸이 보여주는 태도는 ‘오해받는 약자의 분노’가 아닌 ‘오해를 녹이는 꾸준함’이다. 배낭에 든 성전(聖典) 구절을 꺼내 들기도, 손바닥으로 흙을 문질러 기도를 올리기도 하며 그는 스스로의 존엄을 지킨다. 그렇게 쌓인 작은 선의의 층위가 마침내 지역 방송국 기자의 카메라에 담기고, 화면 밖의 관객에게조차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나는 과연 처음 만난 타인을, 이름만으로 단정 짓지 않는 좋은 사람인가?” 칸의 여정은 이 질문을 관객의 가슴팍에 붙여 놓고 결코 떨어지지 않게 하는 강력한 접착제다.

마이 네임 이즈 칸: 칸이라는 이름의 무게

‘칸’이라는 두 글자 성씨는 인도·파키스탄권에선 김씨‧이씨 못지않게 흔하지만, 9·11 이후 미국 보안 요원에게는 즉각적인 위험 신호가 되었다. 영화가 오프닝 10분만에 공항 보안실 클로즈업을 반복하는 이유도 그 두 글자가 지닌 사회적 잉크 자국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칸 자신에게 ‘칸’은 어머니의 성씨이자, 동생 자키르와 함께 나눠 든 가족 서명일 뿐이다. 그러나 타인에게 ‘칸’은 “혹시?”라는 의심의 괄호를 열어 두는 트리거다. 제목이 끊임없이 “My name is Khan”을 강조하는 것 역시, 단 한 글자로 규정되는 정체성의 껍질과 그 내부의 인간다움을 병렬 배치하려는 의도다. 영화 후반, 칸이 폭우 속에서 허리까지 물이 잠긴 조지아 주 윌헬미나 마을에 고립되었을 때, 그를 알게 된 흑인 할머니 윌마는 “칸? 그게 뭐 어떤 문제라도?”라고 되묻는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물이 새어 들어오는 허름한 지붕을 고쳐 준 손이었지, 손의 주인이 가진 성씨가 아니었다. 반대로 테러를 선동하던 사원 지도자는 “너도 칸이라면 우리 편”이라며 혈연·종교적 동질감을 강조한다. 칸은 그 자리에서 단호히 선을 긋는다. “칸이라서가 아니라, 잘못된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고. 결국 ‘칸’이라는 이름의 무게는 외부 시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쓰는 주체가 선택하는 길의 무게다. 영화는 우리 각자에게도 묻는다. “너의 이름이 누군가에게 편견의 돋보기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스스로 이름에 갇혀 세상을 좁혀 두지는 않았는가?” 이름의 무게는 타인이 정착한 납덩이가 아니다. 칸이 증명하듯, 그것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가벼워질 수도, 누군가를 짓누르는 돌덩이가 될 수도 있다.

마이 네임 이즈 칸: 9·11 이후 상처를 걷다

영화가 가장 크게 가슴을 치는 지점은 9·11 이후 무슬림 가정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추상적 공포’가 아니라 ‘가장 사적인 상실’로 구현해 냈다는 데 있다. 만들라의 아들 삼은 친구들과 거리낌 없이 미식축구를 하던 소년이었지만, 비행기가 빌딩을 파괴한 그날 이후 ‘무슬림’이라는 단어만으로 교실에서 쫓겨난다. 운동장 펜스 뒤에서의 구타, 그리고 “테러리스트 새끼!”라는 욕설은 삼의 심장을 멎게 만들고, 만들라의 심장에도 돌을 심는다. 손목에 “WHY?”라고 파고들 듯 새겨진 이 질문은 칸에게도, 관객에게도 오래 남는다. 그러나 영화는 상처의 돌덩이를 피하는 대신 걷어내는 방식을 택한다. 칸은 삼의 죽음 이후 “대통령을 만나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I am not a terrorist)’라고 말하라”는 만들라의 절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길 위로 나선다. 폭풍우가 덮친 조지아에서 허리케인 피해 복구를 도우며 흑인 공동체와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즉석 예배에서 이맘(이슬람 성직자)과 목사, 그리고 유대교 랍비가 손을 맞잡는 장면은 마치 상처 위에 놓인 임시 다리처럼 보인다. 완벽한 치료가 아니라, 서로를 건너갈 작은 다리. 칸이 테러를 신고했다는 사실이 방송을 타고 퍼질 때, “무슬림도 우리를 지켜 줬다”는 말이 들려오고, 만들라는 무너졌던 신뢰를 다시 들여다본다. 상처를 걷는다는 건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나가는 타인의 발걸음이 더 이상 피 흘리지 않도록 길을 닦는 일임을 영화는 보여 준다. 편견으로 열린 상처는 편견을 벗긴 연대로만 덮인다. 칸의 ‘I am not a terrorist’는 그래서 부정(否定)이 아니라 초대(招待)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그러니 당신 곁으로 걸어가도 되겠는가?”라는.

마이 네임 이즈 칸: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동안 내내 “나는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편견을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은 없어도, 마음속에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선입견조차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칸이 대통령 앞에서 ‘그 유명한 한 마디’를 외치는 순간, 나는 오히려 무대 아래 관객석에 앉은 스스로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우리 사회 역시 이름과 피부색, 출신국, 종교라는 단어를 ‘편리한 분류표’로 삼아 누군가를 미리 평가하지 않는가. 영화는 그 편리함의 대가가 누군가의 일상, 누군가의 목숨일 수 있음을 분명히 상기시킨다. 또한 칸이라는 인물이 증명하듯, 세상을 바꾸는 힘은 거대한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좋은 행동을 선택할 것”이라는 작은 결심의 누적임을 보여 준다. 난폭한 검문 앞에서 차분히 이름을 세 번 반복하는 것, 낯선 도시에서 길을 묻는 이를 끝까지 안내해 주는 것, 혐오의 낙인을 단 사람에게도 “당신을 돕겠습니다”라고 말할 용기를 내는 것. 그 사소해 보이는 선택들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대통령의 귀를 열고, 기도를 함께 올리게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밤, 문득 SNS 피드를 스크롤하다가도 ‘그 사람’에게 쏟아지는 혐오 댓글에 손이 멈췄다. 그리고 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떨렸다. “세상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만 있을 뿐이야. 너는 어느 쪽에 서 있겠니?” 그 질문이 내 안에서 잠잠해질 때까지, 나는 계속 답을 써 내려가야 할 것 같다. 오늘도, 내 이름 앞에 붙는 어떤 수식어보다 ‘좋은 행동’을 먼저 떠올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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