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버드 – 반항 속 첫사랑의 성장통

영화 레이디 버드 포스터
영화 레이디 버드 포스터

레이디 버드 – 17살, 첫사랑이 남긴 성장통

사람이 처음 사랑을 만날 때 몸속에는 설명하기 힘든 파장이 일어난다. 크리스틴, 아니 ‘레이디 버드’가 교내 뮤지컬 연습실에서 대니를 보고 심장이 튀어 오르는 순간이 바로 그 진폭의 첫 박자다. 그는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며 “노래 정말 잘하더라”고 한마디 툭 던지지만, 그 짧은 문장이 그녀의 세계를 통째로 바꿔 놓는다. 레이디 버드는 그날 밤 일기장에 하트와 별을 난사하고, 대니와 함께라면 고된 합창 연습도 불빛 가득한 브로드웨이 무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첫사랑은 언제나 성장통을 품는다. 고백 대신 수줍은 손인사만 주고받던 두 사람 사이를 한순간에 깨뜨린 건, 파티장에서 들려온 속삭임 한 줄–“대니, 사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이디 버드는 영화 속처럼 ‘삐―’ 하는 이명과 함께 자신이 단 한 차례도 상상해 본 적 없던 현실을 마주한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상대를 소유한다는 뜻이 아님을, 마음이란 것은 종종 방향을 바꿀 수 있음을, 그리고 그 변심의 고통을 온전히 감당해야만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상처받은 채 극장 뒤편 벤치에서 울어 버리던 그녀는, 이후 카일을 만나 또 다른 두근거림에 휩쓸린다. 한 번 깨진 마음이 다시 사랑을 향해 기울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관객인 나 역시 17살 그 시절, 하루에도 열두 번씩 설렘과 절망 사이를 왕복하던 내 감정을 떠올렸다. 첫사랑은 내게도 종착점이 아닌 환승역이었다. 레이디 버드가 대니, 카일을 통해 사랑의 빛과 그림자를 전부 받아들였듯, 우리도 그렇게 파도처럼 요동치는 감정의 크레바스 속에서 다음 계절로 건너간다. 풋풋한 고백, 눈물, 재회, 그리고 손 놓음까지—모든 순간이 튜닝 전의 악기처럼 삐걱거려도, 그 불협화음이 결국 나만의 음악이 되어 준다는 것을 영화는 속삭인다. 첫사랑이 남긴 것은 흉터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뛰게 해 줄 단단한 심장 근육이었다.

레이디 버드 – 가난과 자존심 사이에서 흔들리다

레이디 버드가 오래된 집 앞마당의 페인트 벗겨진 난간을 지나면서도 친구 제나에겐 “저기 벽돌 저택이 우리 집이야”라고 능청스레 거짓말을 던질 때, 관객석의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남의 시선에서 내 초라함을 감추고 싶어 허풍을 떠는 심리, 그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본 적 있는 은밀한 부끄러움이기 때문이다. 새크라멘토 외곽, 고물차 문짝을 세게 닫아야 잠기는 현실 속에서 크리스틴의 자존심은 늘 빈 지갑과 충돌한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가난 자체가 아니라, 가난이 덧씌운 ‘별 볼 일 없는 아이’라는 낙인이었다. 그래서 값비싼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팁을 모으고, 유행 지난 드레스를 리폼해 댄스 파티에 나가면서도 머릿속 깊은 곳에는 “나는 특별하다”는 문장이 깃발처럼 펄럭인다. 영화가 탁월한 지점은, 가난을 눈물 짜내는 소재로만 소비하지 않고 그 안에 숨은 자존심의 서사를 포착했다는 데 있다. 레이디 버드는 학비 지원을 받으면 ‘불쌍해 보일까’ 걱정하면서도, 남몰래 장학금 신청서를 집어넣는다. 아버지가 실직 사실을 숨기고 면접에서 딸의 이력서를 몰래 밀어 넣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은 잠시 교차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한다. 서로를 위해 거짓말로 상처를 연기하는 모습은 씁쓸하지만 따뜻하다. 나 역시 대학교 등록금 고지서 앞에서 ‘가족형편’ 란에 체크를 하며 손끝이 얼어붙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존심을 꺼내 접어 가방 깊숙이 숨긴 자리에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들어앉는다. 영화는 말한다. 가난은 결코 한 인간의 가치를 측정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고. 레이디 버드가 결국 뉴욕행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쥐었을 때, 그 종이 한 장은 돈보다 더 큰 의미—자신이 스스로 증명해 낸 가능성—으로 빛난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깨닫는다. 부끄러움 끝에서 마주한 진짜 자존심은,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화려함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지탱해 주는 끈기라는 사실을.

레이디 버드 – 10대의 반항이 품은 철없는 용기

‘레이디 버드’라는 새 이름을 밀어붙이기 위해 달리는 차에서 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장면은 언제 봐도 아찔하다. 하지만 그 무모함 속에는 10대만이 낼 수 있는 순도 100 %의 용기가 들어 있다. 세상은 아직 거대하고 자신은 미미하다고 느끼는 나이—그 불균형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종종 과장된 행동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학교 규칙에 맞선 빨간 염색, 파란 브레이스 밴드, 심지어 수녀님 앞에서 펼친 기습 유머까지. 크리스틴의 모든 반항은 철없지만, 그 안에는 ‘내 삶의 운전석은 내가 잡겠다’는 선언이 또렷하다. 어른들의 눈에는 터무니없는 객기로 비칠지라도, 그 과정에서 길러지는 것은 결단력과 책임감이다. 모친 마리온과의 끝없는 설전—“넌 왜 늘 부족하다고 느끼니?” “그건 엄마가 날 그렇게 느끼게 하잖아!”—은 단순한 잔소리와 반항의 대립이 아니라, 두 여성이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려 몸부림치는 대화다. 레이디 버드는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엄마는 딸에게 상처를 남기지만, 상처 위에 새살이 돋듯 관계도 조금씩 자란다. 그 치열한 갈등을 보며 나는 학창시절, ‘문 닫는 소리로 서운함을 표현하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그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쌓인 오해와 눈물의 총량이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반항을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실수해도 괜찮다, 하지만 그 결과를 너 자신이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숨결처럼 불어넣는다. 레이디 버드가 파티에 같이 가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카일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다 스스로 돌아서는 장면은, 불완전한 선택을 통해 배우는 책임의 실습이다. 철없는 용기는 때로 무릎에 멍을 남기지만, 그 멍이 바로 자라난 키만큼의 증거라는 사실을, 우리는 결국 시간이 지나서야 깨닫는다.

레이디 버드 – 나에게 용기를 주다

영화가 끝난 뒤 불이 켜졌을 때, 나는 자꾸만 휴대전화 속 ‘집’이라는 연락처를 들여다보았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잔소리를 피해 이어폰 볼륨을 키우던 중학생 시절, “아프면 말이라도 하지”라며 약 봉투를 내밀던 엄마의 손등을 외면하던 대학 1학년 겨울, 그리고 고향역 플랫폼에서 서둘러 뒤돌아섰던 지난 명절 아침—레이디 버드는 이런 기억들을 파노라마처럼 호출했다. 크리스틴이 공항 보안검색대를 지나가며 뒤돌아보지 못한 엄마의 빈손을,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우리 엄마의 뒷모습과 겹쳐 보았다. 사랑이란 때로 너무 가까워서 상처처럼 느껴진다. 나를 옭아매던 것 같던 고향의 골목, 발목 잡는 줄로만 알았던 가족의 기대, 숨막히던 학교 종소리마저 시간이 흐르자 그리움의 스크린에 따스한 셉리아 색으로 잔상처럼 번진다. 영화가 일깨운 건 거창한 교훈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사실—우리가 격렬히 부정하던 것들이 실은 우리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다. 그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레이디 버드’가 술 취해 전화를 걸어 “엄마, 나… 고마워”라고 중얼대던 장면을 곱씹었다. 미처 건네지 못한 말들은 마음 어딘가에 남아 언젠가 꼭 흘러나오게 마련이고, 그 순간 우리는 조금 더 솔직해진다. 스스로 지은 이름으로 날아오른 날갯짓 끝에는, 결국 부모가 지어 준 이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역설처럼, 인생은 떠남과 귀환이 반복되는 원형 비행 같다. 이 영화를 본 뒤, 나는 오랫동안 켜 두기만 했던 톡 창에 짤막한 문장을 남겼다. “엄마, 오늘 늦게 끝나. 집에 가는 길이 좀 그리워.”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게 뜨거워졌다. 영화 한 편이 내 일상의 색조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레이디 버드가 또 한 번 증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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