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사이먼 – 비밀과 사랑의 성장담 완성

러브, 사이먼 포스터
러브, 사이먼 포스터

러브, 사이먼 – 이메일 속 미지의 블루 추적기

고등학교 3학년의 새벽, 나는 때때로 오래된 야간버스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메일함을 들여다보며 “혹시 답장이 왔을까?” 하고 숨을 삼키곤 했다. 사이먼도 그랬다. ‘블루’라는 익명의 누군가에게 닉네임 ‘자크’로 첫 메일을 보낸 뒤, 그는 쉬는 시간마다 휴대폰 잠금화면을 슬쩍 확인한다. 그 간질간질한 기다림은 연애 세포를 깨우는 동시에, ‘내가 나를 드러내도 괜찮을까?’라는 자아 탐사로 확장된다. 두 사람은 오레오 쿠키, 잭슨 파이브, 크리스마스를 향한 애증 같은 사소한 기호로 연결된다. 그런데 이 호흡은 단순한 로맨틱 게임이 아니다. 서로의 삶을 ‘비밀 폴더’째 압축해 전송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결국 “정체성이란 한 줄의 서명이 아니라 매 순간 갱신되는 대화”임을 깨닫는다. 나는 영화를 보며 문득 학창 시절 메신저 창에 떠 있던 ‘상태메시지’를 떠올렸다. “과제의 늪…” 같은 짧은 문장에 조차 내 심정을 숨겨두곤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마저도 일종의 ‘익명 블루’였는지도 모른다. 사이먼이 블루의 실체를 좇는 동안, 관객은 ‘나는 누구의 블루였을까, 혹은 내 블루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을 자연스레 품게 된다. 추적과 고백이 교차 편집되는 서사는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한 수사물이 아닌, ‘관계’라는 만화경 속에서 자신을 투영해 보는 감정 탐험기다. SNS에서 수천 개의 하트를 받아도 단 하나의 고백 메일이 더 절박한 이유, 그것은 결국 “내 이야기를 기꺼이 읽어 줄 단 한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러브, 사이먼 – ‘커밍아웃’ 두려움과 진짜 용기

커밍아웃은 마치 개기월식 같다. 모두가 달을 바라보지만, 빛이 완전히 가려지는 순간의 암흑은 철저히 혼자 감내해야 한다. 사이먼에게도 그 순간이 있었다. 농담처럼 던진 아버지의 게이 관련 유머, 급우들의 무심한 시선, 교내 익명 게시판 ‘Creek Secrets’에 올라온 폭로 글…. 그는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이 나를 다르게 볼까 봐” 두려웠다. 영화는 이 두려움을 억누르지 않는다. 대신 홀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바라보며 포도주스를 홀짝이는 장면, 교복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리다 결국 메일 창을 닫아 버리는 장면처럼, ‘말하지 못한 함정수’들을 길게 비춘다. 나는 그 화면들을 보며 첫 이직 면접 날을 떠올렸다. ‘경력 단절’이라는 단어가 내 이름표 대신 달려 있는 느낌, 그것이야말로 작은 커밍아웃이었다. 사이먼이 선택한 ‘진짜 용기’는, 세상을 향해 번쩍 깃발을 올리는 퍼포먼스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가족, 친구—앞에 자기 목소리로 서는 일이다. 결국 그는 관람차 위에서 블루인 브램과 입맞춤하며, “나는 여기 있고, 그대로 괜찮다”는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달이 다시 밝아지는 그 찰나처럼,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빛에 녹아 투명해진다. 중요한 건 ‘사라짐’이 아니라 ‘함께 견딜 수 있음’ 아닐까.

러브, 사이먼 – 친구를 속인 대가와 뜨거운 화해

사이먼이 겪은 가장 아픈 순간은 사실 강제 아우팅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던 그 밤이었다. 블루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는 리아에게 “닉을 좋아한다는 줄 알았어”라고 돌려 말하고, 애비에게는 “대학생 남친이 있잖아”라고 없는 사실을 꾸민다. 비밀 유지를 위한 작은 조각 거짓들이 연쇄적으로 쌓여 벽돌담이 되고, 결국 우정의 집을 무너뜨린 셈이다. 영화는 이 무너짐을 일시적 파국이 아니라 성장의 진통으로 그린다. 닉과 애비, 리아가 사이먼을 외면하던 장면에서 관객은 “커밍아웃보다 더 무서운 건 관계의 붕괴”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러나 진짜 하이라이트는 후반부 화해 시퀀스다. 친구들은 “우리는 네가 게이라서 화난 게 아니라, 우리를 믿지 못해 서운했다”고 목소리를 모은다. 이 대사는 관계의 본질을 정확히 찌른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믿음은 ‘편을 들어주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공유하려 애쓰는 태도’에 가깝다. 관객석에 앉아 있던 나도 덩달아 반성했다. 친한 친구에게 필요 이상으로 밝은 얼굴만 보여 주려다 정작 힘든 순간, 서로를 멀리한 적이 있었으니까. 사이먼과 친구들이 관람차 앞에서 다시 어깨동무를 하는 장면은, 상처 난 자리 위에 더 단단한 연대가 돋아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용서’는 과거를 없애는 지우개가 아니라, 그 위에 새로운 색을 덧칠하는 큰 붓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따뜻하게 보여 준다.

러브, 사이먼 – 우리가 깨닫게 될 것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귀에는 ‘I Wanna Dance with Somebody’가, 마음에는 관람차 꼭대기에서 번진 달빛이 남았다. 나에게 ‘러브, 사이먼’은 단순히 LGBTQ 하이틴 로맨스가 아니다. 스무 살 무렵, “나 사실 다른 길을 가고 싶어”라며 전공을 바꾸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족과 친구들이 내게 보여 준 표정들이 겹쳐 보였다. 어떤 이는 당황했고, 어떤 이는 조용히 응원했고, 또 어떤 이는 거리두기로 자기 혼란을 감췄다. 그때의 나는 사이먼처럼 ‘아무도 날 이해 못 할 거야’라며 방안에 틀어박혔다가, 결국 나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낸 것도 관계의 힘이었다. 영화 속 사이먼이 블루에게 “너의 한 줄 메일이 나를 숨 쉬게 해”라고 고백하듯, 우리도 매일 작은 타인들의 메시지—눈빛, 농담, 침묵—속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아낸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달콤한 러브스토리’보다 ‘관계 리부트 매뉴얼’에 가깝다고 느낀다. 만약 지금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다면, 혹은 친구의 비밀을 알게 되어 어쩔 줄 모른다면, 사이먼의 이메일을 떠올려 보자. 진짜 용기는 나를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드러난 뒤에도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며 함께 머무르는 시간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그 시간이 쌓일수록 우리는 관람차가 천천히 올라가는 순간처럼,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넓다는 것을—그리고 그것을 함께 바라볼 사람이 이미 곁에 있다는 것을—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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