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운드 미드나잇, 파리 블루노트에 울려 퍼진 진짜 재즈
한밤중의 빗소리가 잦아들 때쯤, 블루노트의 낮은 무대 위로 덱스터 고든이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을 기억한다. 그는 악보 대신 허공을 바라보며 텐서 색소폰을 들어 올리고, 첫 음이 파리의 허름한 골목까지 스며드는 찰나 관객들은 숨조차 잊는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재즈가 나온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감독 베르트랑 타베르니에와 실제 연주자들이 고집스럽게 지켜 낸 ‘라이브 녹음’의 결이 스크린을 뚫고 나와 우리 귀를 섬세하게 간질이기 때문이다. 녹음실에서 따로 찍은 트랙을 덧입히지 않고, 촬영 현장에서 그대로 받아낸 호흡과 마찰음은 재즈 특유의 즉흥성과 일회성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래서 블루노트의 사운드는 반질반질한 스튜디오 음원이 아니라, 담배 연기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관객의 얇은 숨소리가 뒤섞인 ‘현장의 온도’로 들린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카메라가 아니라 의자에 앉아 실제 공연을 듣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스피커가 5.1 채널로 둘러싸인 방에서는 색소폰 음색이 천장으로 솟구쳤다가 다시 바닥으로 차분히 내려앉으며, 마치 새벽 공기가 폐 깊숙이 밀려 들어오는 듯한 생리적 경험을 준다. 특히 곡이 고조될 때 드럼의 심벌이 은은하게 떨리는 미세한 진동은 블루노트의 낡은 벽면을 공명판 삼아 관객의 가슴을 두드린다. 공연이 끝나고 조명이 꺼지는 순간, 어디선가 흘러나온 “굿나잇” 속삭임이 이 영화의 제목과 절묘하게 겹치는데, 그 둘 사이에는 한낮과 한밤보다 더 먼 거리―‘음악이 끝나도 계속되는 감정의 여운’―이 존재한다. 이 여운 덕분에 우리는 영화가 흘러간 뒤에도 재즈를 계속 흥얼거리며 새벽길을 걷게 된다.
라운드 미드나잇, 덱스터 고든의 숨결이 만든 캐릭터 스터디
딜 터너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덱스터 고든의 폐를 지나 나온 숨결이 그를 실존하는 인간으로 만든다. 카메라에 잡힌 그의 몸짓은 연기라기보다 ‘두 번째 생애’에 가깝다. 골목을 걷다 돌연 멈춰서서 공중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딜은 과거의 명성과 현재의 쇠락 사이 어딘가에 매달린 자신을 듣는다. 목소리는 자주 끊기고, 발음은 노트처럼 길게 늘어지며, 그는 말 대신 리듬을 배치한다. “음… 음악은… 시간 전체를… 채우지.”라는 대사는 문장보다 박자에 가깝다. 술과 약물에 의지해 미끄러지는 손끝, 딸의 사진을 지갑에서 꺼냈다가 다시 접어 넣는 미세한 지연, 그리고 무대 밖에서는 의자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다 막상 관객 앞에서는 다시 일어서는 아이러니한 의연함 ― 이 모든 디테일이 ‘살아 있는 사람’ 특유의 불균형을 증명한다. 나는 고든이 실제로 퇴근 후에도 딜 터너의 말투를 유지했다는 제작진 인터뷰를 떠올리며, 그가 얼마나 완전히 인물 속으로 잠수했는지 상상했다. 특히 딸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를 쓱쓱 적다가 포기하고 구겨 넣는 장면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재즈 즉흥 연주처럼, 그의 감정도 예측 불가능한 리프를 따라가다 불시에 꺾인다. 마치 일정한 박자 없이 흔들리는 심전도처럼. 그래서 관객은 “딜이 오늘 밤 무사히 살아 있을까?”라는 불안과 “그가 다시 한 번 소리를 뽑아낼까?”라는 기대를 동시에 안고 영화를 본다. 캐릭터 스터디라는 말이 이토록 피부에 와닿는 예는 드물다. 결국 딜은 관객에게 “음악이 없는 장면에서도 계속 들리는 음”이 되어, 극이 끝난 뒤까지 우리 머릿속에서 멈추지 않는다.
라운드 미드나잇, 1950년대 파리를 호흡하게 하는 미장센
타베르니에가 재현한 1950년대 파리는 엽서 속 관광지가 아니다. 햇빛이 비켜 간 낡은 간판, 끈적한 포스터 자국이 남은 벽, 그리고 매연과 비의 층위를 고스란히 담아낸 색보정이 이 도시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만든다. 알렉상드르 트라오너의 세트 디자인이 특히 빛나는 이유는 공간이 단순한 배경을 넘어 ‘음악의 또 다른 악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블루노트 내부를 가로지르는 목재 기둥은 색소폰의 황동관처럼 빛을 반사하고, 스테이지 위쪽에 매달린 작은 전구들은 드럼 브러시가 심벌을 스칠 때마다 반짝이며 리듬에 시각적 층위를 더한다. 카메라는 이 세트를 순환 동선으로 돌며, 관객이 파리의 속도를 따라 자연스레 호흡하도록 유도한다. 안개 낀 새벽 센 강변을 걷는 롱테이크에서는 도심의 인공조명과 강물에 비친 달빛이 겹겹이 드리워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공연장처럼 느껴진다. 4K 복원을 통해 살아난 필름 그레인은 “이곳은 과거지만, 지금도 호흡한다”라고 선언하듯 모니터를 살짝 거칠게 스친다. 나는 화면 속 사물이 너무 선명해져서 오히려 더 ‘필름 같다’는 역설적 기분을 맛봤다. 또한, 실내와 거리 장면을 잇는 편집 리듬은 재즈의 스윙감과 절묘하게 맞물린다. 밤공기가 물씬 묻어나는 액자식 쇼트가 이어질 때, 관객은 여행용 캐리어 대신 폐 깊숙한 곳에 파리의 냄새를 담아 올 수밖에 없다. 덕분에 영화가 끝난 뒤에도 길가 카페의 금속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블루노트에서 들었던 잔향을 무의식중에 따라 치게 된다.
라운드 미드나잇 – 음박보다 박자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재즈라는 음악보다 ‘친절’이라는 박자가 더 오래 귀에 맴돌았다. 프란시스가 딜을 위해 마련한 좁은 다락방, 딜이 딸에게 서툰 전화를 거는 순간에 흘렀던 어색한 침묵,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채운 “괜찮아, 천천히 해”라는 표정―이 작은 친절의 파장은 내 일상까지 번져 왔다. 혹시 나도 혼자서 고개 숙인 누군가를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내 안의 딜 터너를 외면하며 “아직은 바빠”라고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가, 거울 앞에서 오래 서 있게 된 것이다. 이 영화가 건네는 위로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들이 서로를 살짝 붙들어 주는 순간에 존재한다. ‘재즈의 즉흥성’은 결국 삶의 즉흥성과 다르지 않다. 악보를 잃어버려도 연주는 멈추지 않고, 음이 살짝 새어 나가도 다음 마디로 이어질 수 있듯이, 우리의 하루도 삐걱거리며 흘러가다 다시 고쳐 잡을 기회가 계속 이어진다. 딜의 마지막 공연에서 관객이 보여 준 뜨거운 침묵은, 음악이 멈춘 자리에 잔향을 남기듯 삶이 멈춘 자리에도 의미가 남는다는 걸 알려 준다. 그래서 나는 이제 새벽에 잠이 오지 않을 때, 블루노트의 조명을 마음속에 켜 두고, “굿나잇” 대신 “라운드 미드나잇”을 중얼거린다. 그 말 한마디면 방 안을 채우는 고요가 음악처럼 느껴지고, 언젠가 다시 들려올 색소폰 음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오늘도 “라운드 미드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