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 – 꿈과 사랑의 재즈왈츠곡

영화 라라랜드 포스터
영화 라라랜드 포스터

라라랜드 – “Another Day of Sun”이 만든 황홀한 오프닝

로스앤젤레스 한복판, 태양빛이 아스팔트 위에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번져 있을 때 고속도로 위 수백 대 차량은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커다란 한숨처럼 정체된 그 틈을 뮤지컬 넘버 **“Another Day of Sun”**이 비집고 들어온다. 영화관에서 처음 이 시퀀스를 마주했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시간 감각을 잃었다. 차 문이 열려 있고, 따가운 햇빛 속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도로 위로 뛰어내려 오르내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현실과 꿈의 경계는 이토록 얇은 종잇장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씬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현실이 아무리 꽉 막혀 있어도, 꿈 하나만큼은 언제든 차창을 열고 뛰어내려 춤출 수 있다는 선언. 반바퀴, 전후좌우로 교차하는 롱테이크 카메라는 땀방울과 도로 열기를 그대로 품은 채 따라간다. 그 속도감은 관객이 화면을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만든다. 클랙슨 소리와 엔진 열기로 뒤범벅된 캘리포니아의 아침이 단숨에 브로드웨이 무대로 치환되는 순간, 나는 낯선 해방감을 맛본다. 오프닝이 끝나고 조용해진 스크린은 다시 건조한 현실을 비추지만, 이미 관객의 심장엔 태양보다 뜨거운 박자가 새겨져 있다. 그 황홀은 이후 미아가 카페에서 얼룩진 티셔츠를 입고 오디션장으로 뛰어가든, 세바스찬이 허름한 아파트에서 낡은 피아노를 조율하든 간에 계속 배경음으로 맴돈다. 그래서 오프닝은 단순히 눈을 사로잡는 쇼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도시는 꿈을 벌이지 않은 이들을 위해 매일 아침 새로이 무대 장치를 바꿔 놓는다”는 묵시록을 속삭이는 서곡이다. 현실에 질식해 있는 청춘들에게 “오늘 역시 태양은 떴다”는 소식을 선창하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또 다른 하루의 태양’을 기다리게 만드는, 일종의 마법 주문이기도 하다.

라라랜드 – 미아와 세바스찬, 꿈과 현실의 교차점

미아에게 세상의 모든 문은 닫혀 있었다. 카페 계산대 너머로 흘끔 내다보는 스튜디오 관계자들의 주문처럼, 그녀의 오디션도 늘 한 줄 대사로 툭 잘렸다. 반면 세바스찬의 문제는 문이 너무 많다는 데 있었다. 그는 레스토랑, 파티 밴드, 순회공연 무대처럼 “노력이면 열릴 수 있는 문”을 지나며 살아간다. 전혀 다른 궤적을 달리던 두 사람이 첫 키스를 나누던 날 밤, 보랏빛 언덕 위 로스앤젤레스 야경은 의도적으로 과장된 세트 같았다. 도시가 꾸며 놓은 어울리지 않는 무대 위에 서서 두 사람은 ‘이것이 진짜일까’라도 묻듯 신발 끝으로 살금살금 스텝을 밟는다. 그 언덕에서 내려온 뒤부터 두 사람 앞엔 끊임없는 선택지가 등장한다. 미아는 실패한 1인극 대신 오디션장으로 돌아갈 용기를, 세바스찬은 순회 밴드에서 버는 정기 수입 대신 ‘재즈 클럽’이라는 오래된 꿈을 놓고 고민한다. 둘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선은 한없이 가늘다. 미아가 밤새 대본을 쓰고 있을 때 세바스찬은 드럼과 베이스에 피아노를 맞추느라 새벽을 보낸다. 둘은 “당신이라면 내 꿈을 이해할 거야”라고 굳게 믿지만, 정작 서로의 꿈을 위해 투자할 시간과 에너지는 점점 고갈된다. 사랑이 꿈을 밀어 올리는 순간도 있지만, 꿈이 사랑을 압박하는 순간 또한 찾아온다는 역설이 여기 있다. 식탁 위 스파게티가 타버리고, 전등이 깜박이며, 레코드 플레이어에 먼지가 쌓이는 동안 두 사람의 심장 BPM은 조용히 엇나간다. 그러나 그 틈새에서 올려다본 도시의 하늘은 여전히 ‘라라랜드’라는 이름으로 반짝인다. 그래서 영화는 두 사람을 냉혹하게 갈라놓으면서도, “각자의 꿈을 완성한 뒤 언젠가 다시 미소 지어 줄 수 있다”는 작은 신뢰를 지워 버리지 않는다. 꿈과 현실의 교차로에서 사랑은 항상 황색 점멸등이다. 멈추어야 할지, 속도를 높여 통과해야 할지는 결국 운전자의 몫. 라라랜드는 그 판단이 어떤 결말을 가져오든, 하늘은 매일 새로운 색으로 물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속삭인다.

라라랜드 – 보랏빛 언덕 탭댄스가 남긴 설렘

해 질 녘, 언덕 위 골든아워가 보라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시간. 미아와 세바스찬은 서로 “당신은 내 취향이 아니야”라고 선언하면서도 발끝이 자석처럼 끌린다. 최초의 탭댄스 장면은 연인의 스킨십보다 더 관능적이다. 두 사람이 나눈 것은 손과 입술이 아니라 리듬과 호흡이었다. 스윽-스윽 구두가 포장도로를 스치는 마찰음, 뒤꿈치로 박자를 찍는 둔탁한 타악, 그리고 가볍게 튕겨 나가는 손목 선. 대사가 멎는 사이사이에 삽입된 이 짧은 박자들은 ‘썸’을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비밀 비트다. 무엇보다 이 시퀀스가 빛나는 이유는 “우리는 아직도 춤출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사람들”이라는 메시지를 시청각적으로 증명한다는 데 있다. 자동차 열쇠를 찾느라 투덜거리는 일상, 고장 난 가로등,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all 그리 낭만적이지 않은 디테일들이 무대 장치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턴을 돌고, 하늘을 가리키며, 마지막 포즈를 잡는다. 춤이 끝난 지점에서 둘은 숨이 조금 거칠어졌을 뿐, 어느새 낯선 이 아닌 ‘공모자’가 된다. 나 역시 극장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몸 속 근육들이 저도 모르게 리듬을 따라 미세하게 떨렸다. 살면서 무표정으로 지나쳤던 장소에 노래 한 줄, 박자 세 박만 얹으면 언제든 첫사랑의 시작점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 영화는 언덕 탭댄스를 통해 그 요령을 귀띔해 준다. 덕분에 나는 퇴근길에 지나치던 횡단보도가, 밝은 네온 대신 가로등 하나 달랑 켜진 골목이, 언젠가는 나만의 라라랜드가 될 수 있으리라 상상한다. 당신이 이 장면을 잊지 못한다면 아마 같은 이유일 것이다.

라라랜드 – 미래의 나를 써본다.

엔딩에서 5년의 시간이 점프하고, 미아와 세바스찬이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먹먹함에 눌려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 미소는 ‘완전한 해피엔딩’도 ‘돌이킬 수 없는 세드엔딩’도 아니었다. 꿈을 이룬 두 사람이 원점이 아닌 어딘가에서 서로를 인정해 주는 어른의 인사였다. 화면이 암전된 뒤에도 귀에는 “City of Stars”의 피아노 여운이 잔잔히 남아 있었다. 극장을 나서는 동안 마음속에서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다 내 맘처럼 되진 않겠지”라며 접어둔 낡은 클립보드가 다시 떠올랐다. 잊고 있던 글쓰기 노트를 꺼내려 책상 서랍을 여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라라랜드는 그렇게 무릎 꿇은 꿈을 다시 세워 준다. 물론 영화가 약속하는 것은 태양이 떠오르면 또 다시 교통체증과 카드 결제일이 기다린다는 현실이다. 하지만 태양이 떠오르는 즉시 도로 위 사람들 하나둘이 문을 열고 노래를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미련 역시 우리 몫이다. 라라랜드는 “이 도시가 당신을 실망시킬 때마다, 도로 위에 올라가 한 번쯤 노래해 보라”는 작은 권리를 건네 준다. 언젠가 나도 보랏빛 언덕에 서서 발끝으로 리듬을 주워 담을 수 있기를, 그리고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탭 스텝으로 화답해 주기를 소망한다. 그것만으로도 “또 다른 하루의 태양”을 버텨 낼 이유가 충분하니까. 나는 이렇게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한다. 어쩌면 오늘과 같은 내일이 올것을 알면서. 그래도 언젠가는 달라질것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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