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 30년 집념이 빚어낸 기적
테리 길리엄 감독이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처음 마음에 품은 건 1990년대 초반이었다. 그가 이미 『브라질』과 『피셔 킹』으로 세계 영화계의 ‘괴짜 천재’라는 훈장을 달고 있던 시절이지만, 400년 전 세르반테스가 남긴 광기의 기사 이야기는 길리엄조차도 삼키기 벅찰 만큼 크고 깊은 심연이었다. 2000년 첫 촬영은 폭우·군사 훈련 소음·주연 배우 부상이라는 ‘재난 3종 세트’에 일격을 맞고 산산조각 났다. 그 참혹한 현장은 다큐멘터리 〈로스트 인 라만차〉에 고스란히 담겨 전설로 남았다. 이후 10여 년 동안 투자자가 바뀌고 시나리오가 개정되고, 주연 후보가 조니 뎁·이완 맥그리거·로버트 듀발로 끝없이 갈아끼워지는 동안에도 감독은 한 번도 창을 내려놓지 않았다. 영국·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룩셈부르크를 오가는 공동 제작 계약서는 쓰였다가 찢겼고, 완성 직전에 배급권 분쟁으로 상영 금지 가처분까지 당했지만 그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30년, 세트가 무너질 때마다 다시 세우고, 투자처가 사라질 때마다 새 지도를 그려가며 길리엄은 자신이 만든 미궁 안에서 스스로 미노타우로스가 되었다. 그리고 2018년, 칸 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그의 ‘평생의 숙제’는 20분간의 기립박수로 귀환했다. 결국 영화 자체가 길리엄 삶의 자서전, 아니 ‘살아 있는 제작 일지’가 된 셈이다. 그가 인터뷰에서 “끝까지 버티면 꿈도 현실이 된다”라고 웃으며 말할 때, 우리는 그 웃음에 30년짜리 고된 숨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했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 풍차가 거인으로 보이는 순간
관객이 가장 먼저 빨려드는 장면은 단연 풍차가 거인으로 변신하는 시퀀스다. 황혼의 라만차 평원을 핏빛으로 물들인 채 거대한 날개를 돌리는 풍차가 서서히 인간형 실루엣으로 솟구칠 때, 카메라는 어안렌즈처럼 왜곡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녹여낸다. 조나단 프라이스는 “사악한 거인들이 우리 앞에 서 있다!”라며 광기 어린 포효를 터뜨리고, 아담 드라이버는 산초 판사처럼 당혹스러운 표정 속에 묘한 전율을 숨기지 못한다. 테리 길리엄 특유의 만화적 과장, 과포화된 색보정, 급작스러운 딥포커스 전환이 겹치면서 관객은 스크린을 쫓는 시선만으로도 ‘풍차=거인’ 착시를 실제로 체험한다. 그 찰나, 극장 좌석의 팝콘 통이 투구로, 에어컨 송풍구가 거인의 콧김으로, 주변 관객의 스마트폰 불빛이 기사들의 횃불로 착각될 정도다. 영화는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세계를 바꾼다는 메시지를 명징하게 시각화한다. 그리고 장면이 끝난 뒤 차가운 공기가 환영을 밀어내도 이미 관객 뇌 속에서는 일상의 풍차들이 슬금슬금 거인으로 부풀어오른다. 퇴근길 지하철 환풍구, 밤새 돌던 노트북 팬, 회사 로비 회전문 같은 사소한 구조물조차 거대한 모험의 문턱처럼 느껴지는 것은 길리엄이 우리 안의 어린 몽상가를 깨웠기 때문이다. 풍차 장면이 선사하는 전율은, 곧 ‘상상력이라는 근육’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의 짜릿한 체감이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 세 개의 시간이 교차하는 스토리텔링
길리엄은 직선적 구조를 과감히 버리고, 세 개의 시간 레이어를 빈틈없이 얽어매어 ‘서사 지도’ 자체를 헝클어뜨린다. 첫째는 세르반테스 원전 속 17세기 라만차, 둘째는 토비가 대학 졸업작품으로 찍은 10년 전 흑백 필름, 셋째는 러시아 재벌 광고를 찍는 현재 시점이다. 문제는 이 세 시간이 논리적 컷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토비가 촬영지로 돌아가는 오토바이 핸들바 클로즈업은 곧장 16 ㎜ 카메라 셔터 스냅으로 겹치고, 하비에르가 “산초!”라 부르며 달려드는 순간 현재와 과거, 현실과 영화, 광기와 제정신의 구분선이 증발한다. 관객은 마치 세 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돌리는 영사실에 갇힌 듯 착각을 겪는다. 특히 2막 이후 꿈속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꿈인 듯 현실인 듯 미끄러지는 흐름은 ‘로스트 인 라만차’의 제작 악몽과 『브라질』의 디스토피아 악몽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린 변주다. 기승전결에 익숙한 시청자라면 산만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바로 그 혼란 덕에 영화는 ‘돈키호테적 광기’라는 추상어를 형식 자체로 구현한다. 원작 속 돈키호테가 기사도 문학 과다섭취로 현실을 왜곡했듯, 길리엄은 영화를 과다섭취한 현대인을 겨냥해 “당신 일상도 픽션일지 모른다”라고 속삭인다. 서사 시간의 파편화는 결국 우리 모두가 스마트폰 알림음 하나로 과거·현재·가상 세계를 수시로 넘나드는 ‘디지털 돈키호테’임을 비추는 거울이다. 영화가 끝난 뒤 카페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조차 스태프롤 속 엑스트라처럼 느껴지는 기묘한 여운은, 이 다층 서사 퍼즐이 남긴 가장 짜릿한 후유증일 것이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 귓가를 멤도는 작은 메아리
상영관을 나서자 서울 초여름의 묵직한 습기가 뺨을 스치는데도 머릿속엔 여전히 거대한 풍차 날개가 돌고 있었다. 어릴 적 수학여행 버스 창문 김 서림 위에 ‘기사도’라 쓰다 친구들 웃음거리가 됐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는 각자 현실에서 ‘거인’이라 부르며 돌격했던 대상들이 사실 회사 KPI, SNS 좋아요 숫자 같은 풍차였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길리엄은 그 풍차라도 전력으로 향해 달려보는 자만이 스스로를 구원한다고 속삭였다. 세상은 조롱과 실패를 연료 삼아 달려가는 끝없는 촬영 현장이고 우리는 서로의 졸업작품에 카메오로 등장했다가 후유증을 앓는 하비에르 혹은 안젤리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이 꺼진 자리에 남는 건 “망상이라도 좋으니 사랑하고 싸우라”는 400년짜리 주문이다. 창끝에 내려앉은 비둘기 깃털처럼 덧없는 꿈일지라도 누군가의 삶을 흔들 바람이 될 수 있다면 돌격할 가치는 충분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끊긴 와이파이 아이콘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간헐적 신호 속에 우리는 저마다의 내러티브를 버퍼링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돈키호테는 그렇게 우리 스마트폰 틈에 숨어 있다가 타임라인을 밀어내고 자신의 서사를 삽입한다. 결국 영화가 던진 질문은 “당신은 어떤 거인을 향해 달려들 것인가”였다. 아직 선뜻 답을 내리긴 망설여지지만, 적어도 이 밤만큼은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조금 더 앞서 있다. 실패로 얼룩진 먼지 냄새와 함께 “이젠 당신 차례”라는 작은 메아리가 귓가에 오래도록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