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헌트 – 거짓말이 부른 마녀사냥 비극

영화 더 헌트 포스터
영화 더 헌트 포스터

더 헌트 – 거짓말이 만든 지옥

누구나 한 번쯤은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내가 왜 그랬지?” 하고 후회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더 헌트〉가 그리는 세계에서 거짓말은 단순한 실수나 장난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뒤엎는 폭탄이다. 영화는 루카스라는 소박한 유치원 교사가 친구들의 축 처진 웃음 속에 얼음물에 뛰어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평화로운 도입부는 곧 클라라의 무심한 거짓말 한 줄로 산산조각 난다. “선생님 고추는 막대기 같았어요.” 유치원 원장은 “아이들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신앙에 가까운 확신으로 루카스를 성추행범으로 낙인찍고, 상담사는 “트라우마가 기억을 가린 것”이라는 전형적인 자기 확신으로 상황을 밀어붙인다. 마을은 오랜 친구, 이웃, 심지어 반려견에게까지 등을 돌린다. 루카스는 스스로 결백을 증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무죄라고 기록된 서류 한 장만 달랑 들고 폭력과 냉소 앞에 노출된다. 영화는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굴러가며 억울함과 공포를 어떻게 증폭시키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보다 “믿고 싶은지 아닌지”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순간 지옥이 손쉽게 생성된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보여준다. 시종일관 차분한 화면과 절제된 음악은, 관객이 루카스의 숨 막히는 고립감을 도저히 피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아이의 허술한 상상력, 어른의 확증편향, 공동체의 집단 히스테리가 한데 뭉쳐 벌이는 이 비극은 “우리는 과연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마치 겨울 호수의 살을 에는 물처럼 차가운 진실이 관객의 멱살을 잡고 늘어지는 장면마다, 거짓말의 파괴력은 스릴러보다 오히려 현실 다큐멘터리에 가깝다는 깨달음을 안겨준다.

더 헌트 – 아이는 정말 거짓말을 안 할까?

우리는 흔히 “아이들은 순수하다”는 통념을 앞세워 아이의 말을 과대평가한다. 하지만 〈더 헌트〉는 아이 역시 욕망과 호기심, 그리고 즉흥적인 감정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클라라는 루카스를 동화 속 왕자님처럼 좋아하다가 거절당하자, 자기 감정이 상처받았음을 표현하기 위해 상상과 현실을 뒤섞은 이야기를 만든다. 그 이야기는 성적이거나 음탕하다는 의도에서 비롯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미워진 선생님을 벌주고 싶은 마음” 같은 유아적 보복 심리에 가깝다. 문제는 어른들이 그 말을 “거짓일 가능성”보다는 “사실일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 순간 발생한다. 영화 속 전문가와 원장은 아이의 진술을 검증하기보다 확증하려는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집 지하실은 어땠니?”라는 유도 심문은 지하실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조차 덮어버린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짜 기억’은 곧 여러 아이들에게 복제되어 확산되고, 마을은 아이들의 “상상 속 지하실”을 실제 범행 장소로 굳게 믿는다. 아이가 철저히 무고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아이도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짚으며, 그 거짓말은 대개 ‘의도적인 악의’가 아니라 ‘감정의 직진’에서 나온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어린이는 스스로 파급 효과를 계산할 능력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어른은 아이의 말을 진실로 만들지 말고, 사실로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순수함은 금세 흉기가 된다. 〈더 헌트〉가 던지는 뼈아픈 메시지는 분명하다. “아이의 말이니까 믿어야 해”라는 도식은 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그리고 억울한 루카스 같은 누군가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 이 간단한 진실을 놓칠 때, 우리는 아이를 보호하려다 결국 아이의 거짓말을 ‘사실’로 만들어 버리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더 헌트 – 공동체가 부서지는 순간

루카스의 마을은 누구나 얼굴과 이름, 심지어 애완견 이름까지 알고 지내는 작은 공동체다. 그런 공간에서 “응, 나는 너를 믿어”라는 말은 사실 확인보다 친분의 언어에 가깝다. 그런데 영화는 이 친밀함이 위기 앞에서 얼마나 쉽게 적대감으로 전복되는지 잔혹할 만큼 냉정하게 묘사한다. 클라라의 부모는 “네가 본 것을 말해줘서 고마워”라며 딸을 더 큰 거짓의 늪에 밀어넣고, 원장은 “아이를 우선 보호해야 한다”는 전가의 보도를 들이밀며 루카스를 사회적으로 사형 선고한다. 친구들은 “네가 아니길 바라지만 혹시…”라는 불안감을 이웃의 불안감과 결탁해 폭력으로 배출한다. 사냥 문화로 묶여 있던 남자들의 연대는 금세 삐걱대며, 마트에서 루카스를 집단으로 몰아붙이는 장면은 ‘규범’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되는 과정을 일상적으로 재현한다. 특히 영화가 크리스마스 예배 장면에 배치한 긴장감은 공동체 종교 의식이 “용서와 화해”를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추방과 배제”의 의식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루카스가 태오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순간까지 쌓여 온 분노는, 사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자기존중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루카스는 마을을 떠나지 않는 선택을 한다. 그는 폭력으로 맞서 싸우기보다 ‘견디며 보여주기’를 택한다. 이 ‘잔류’는 도피보다 훨씬 힘든 싸움이다. 공동체가 단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 순간, 법적 무죄는 사회적 사형선고를 뒤집지 못한다. 영화는 “마을 사람 모두가 루카스를 이해했다”는 해피엔딩을 허락하지 않는다. 1년 뒤, 의문의 총성이 다시 루카스를 겨냥한다. 공동체는 겉으로는 화해했지만, 도사리고 있던 불신의 방아쇠는 언제든 다시 당겨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결국 〈더 헌트〉는 묻는다. ‘우리가 만든 공동체’는 서로를 보호하는 울타리인가, 아니면 필요할 때마다 희생양을 갈아 넣는 늑대우리인가?

더 헌트 – 나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

영화관을 나서는 길, 마치 눈앞에 서늘한 겨울 공기가 내려앉은 듯 숨이 막혔다. 나는 “나는 결코 그런 무리에 끼지 않을 거야”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실시간 댓글창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분노와 냉소 속에서 나 역시 손쉽게 ‘좋아요’를 누른 적이 있다. 확인되지 않은 기사 한 줄에 분개하며 “저 사람 정말 너무하네”라고 혀를 차기도 했다. 〈더 헌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쉽게 믿어도 괜찮을까?” 영화 속 루카스는 끝내 클라라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대신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려 금이 그어진 바닥 너머로 옮겨 준다. 나는 그 장면에서 묘한 울컥함을 느꼈다. 마녀사냥에 맞서 싸우는 영웅적 복수 대신, 그는 여전히 ‘좋은 어른’이길 택한다. 그것이 그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품위라는 듯이. 그리고 품위는 생각보다 강했다. 오해와 분노, 거짓과 확신이 뒤엉킨 광기 속에서도 품위만은 스스로 훼손할 수 없는 내면의 증거가 된다. 화면이 암전된 뒤에도, 귀에 맺힌 총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루카스가 겪은 악몽은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인터넷 창 하나면 누구라도 가해자가 되고, 사과 한 줄 없이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는 시대다. 〈더 헌트〉는 마치 거울처럼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오늘도 확신의 편안함을 고를 것인가, 아니면 불편한 의심을 견딜 것인가?” 나는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극장을 나왔다. 하지만 적어도 다음번에 누군가를 손쉬운 단죄로 몰아가고 싶어질 때, 비틀거리며 겨우 버티고 선 루카스의 눈빛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그 눈빛이 내 안의 조급한 정의감을 잠시라도 붙잡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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